유쾌한 하녀 마리사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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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의 소설은 여하간 그렇게 전통적으로 ‘소설적인 것’이라 일러왔던 것의 방외에 있고, ‘현실’의 방외에 있으며, 한국문단의 방외에 있다. 󰡔고래󰡕에서 보듯이 천명관이 그 놀라운 입심으로 시정에 떠도는 잡스런 이야기를 그러모아 전해주는 이 시대의 패관(稗官)의 모습을 능란하게 보여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실은 그와 전혀 무관하다 할 수 없다. 무리를 떠나 먼 곳을 떠돌던 그는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를 수집해 불쑥 돌아와 한국소설이 알지 못했고 가지 않았던 길 하나를 열어놓았고, 그것이 바로 저 스스로 증식하며 무궁무한 종횡무진 뻗어나가는 무국적적인 이야기의 세계다. 
                                     -  김영찬, <짐작할 수 없는 일들의 아이러니>(해설), p.388.
 

 
   

 

  소설집의 마지막 해설에는 이런 문구가 들어 있다.    

 

  그러나 나는 이를 의심한다.    

  만일 이 해설이 맞다면, 그것은 우리 문단의 폐쇄성과 촌스러움을 증명하는 또하나의 증거에 불과할 것이다.  

  적어도 독자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분명히 그렇다.  이 정도의 내용을 가지고 '참신함'을 운운하는 것은 지극히 부끄러운 짓이다. 문학이 문화예술의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는 21세기 현재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사실 천명관의 이 작품집에 포함되어 있는 이야기는 전혀 낯설지 않다.
  어디에서 보았는지 고민할 필요도 없이 익숙하다.

  믿지 못하겠는가?
  그렇다면 당장 TV를 켜라. 
   

  TV 속에 이 소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이야기들이 차고 넘친다.   
  맞다. 천명관의 소설은 딱 TV만큼 낯설고, 딱 TV만큼 익숙하다.

    

  몇몇 리뷰어들은 한국 작가가 외국인을 등장인물로 소설을 섰다는 점을 대단하다는 듯 떠든다. 

  제길, 촌스럽기는.
  그 역시 익히 보아왔던 것 아닌가?

  외국인, 그게 뭐 대수롭다고. 
  길 반장이 외국인이라서 CSI를 동경했나? 닥더 후가 외국인이라서 주목했었나? 케이블TV에서 주야장창 쏟아지는 미국, 유럽, 일본, 중국, 동남아의 드라마들을 보면서 외국인이 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환호하지는 않는가 말이다.

  그런데 왜 유독 문학에서만 호들갑인가.  

  그럼, 이 세계화, 지구화 시대에 외국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이야기를 우리라고 쓰지 못할 것은 또 무언가? 이제 그런 인종적 열등감 따위는 떨쳐버릴 때가 되지 않았나? 

 

  어떤 리뷰어들은 이 소설집의 수록 작품들의 무용성을 찬양하기도 한다.

  뭐,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니다. 우리의 문학교육은 아직도 여전히 공리주의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였으니. 제길, 사지선다 혹은 오지선다 식 문학문제가 온국민의 감식안을 모두 망치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이제 좀 식상하다.
  천명관 이전에 이런 스타일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영화나 드라마가 보다 본질적으로 무용한 매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래, 뭐, 심심하면 하루종일 틀어주는 TV나 보면 될 것을
  구태여 골 아프게 소설을 찾아읽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TV, 그 속에는 애써 상상하지 않아도 우리를 질겁게 해주는 수많은 이야기가 들어있는데.

 

  오히려 내 눈에는 이러한 무용성은 매우 위험하게 보인다.
  외국인들을 등장시켜 외국이야기를 하는 것은 좋다. 뭐 나쁜 것이 있겠나.  

  그런데 대체 내가 왜 그런 이야기를 보고 있어야 하는 거지? 
  도대체 저 이야기들이 나하고 어떤 연관이 있어서?  
  TV드라마는 흥미롭거나 현란하기나 하지. 그것과 다를 바 없는 소설을 왜 읽어야 하지?

  요따구 의문이 자꾸 꼬리에 꼬리를 문다. 바로 그것이 문제다.   

  아무리 무용한 것이라도, 최소한 읽고나서 재미있기라도 해야지.
  일껏 시간 들여 체력 들여 읽었는데 허무하기만 하다면 그게 무슨 필요가 있나? 
  킬링타임을 할 것이면 도색잡지나 보던지.  

 

  요컨대 사람은 누구나 자기와 상관있는 이야기를 듣기 마련이다. 
  국적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외국의 이야기를 듣는데 아낌없이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그것 역시 어떤 식으로든, 멀리멀리 돌아서라도, 내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집 중에서서 과연 어떤 것들이 나와, 나아가서 우리와 연결되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어쨌든, 문학도 이제 보편적 감성을 갖추어야 한다.  

  적어도 
  우리 시대의 영화, 드라마, 만화, 애니메이션… 따위와 엇비슷한 수준은 되어야 하지 않겠나?   

  아직까지 문학의 우위를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여,
  안타깝게도 당신은 너무 늙었다.

  문학은 이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다른 모든 문화콘텐츠와 함께 경쟁할 수밖에 없다.  

  세련되고 아니고,
  우리 시대를 대표할 수 있고 아니고, 는 

  이제 장르의 문제가 아니라, 개별적인 작품의 문제이다.  

 

  문학은 사라지고, 작품만 남았다.
  이제 작가들에겐 고독한 각개격파만 남은 것이다.  

 

p.s.  이 소설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단편은 <13홀>, 
       역시 기시감을 떨쳐버릴 수는 없으나 스토리텔링이 제일 매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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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구 파이터 1
김언정, 김덕진 지음 / 시공사(만화)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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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어때서?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옆나라 일본에서는 세상의 스포츠란 스포츠는 죄다, 깡그리, 몽땅,  만화 소재로 쓰고 있는데, 우리라고 못할 것 없지 않은가 이 말이다.   

 

  오히려 마케팅 전략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 작품은 칭찬받아야 온당하다. 

  권투? 아무리 열심히 그려봐야 <내일의 죠>를 뛰어넘기 쉽겠나?  

  야구? 이야말로 철옹성같은 일본만화의 장벽을 뛰어넘어야 하는 분야이다.  
          열혈로 치자면 <거인의 별>와, 로맨스로 치자면 <H2>와 경쟁해야 한다는 말이지.  

  농구? 에효 <슬램덩크>의 벽이 높고 또 높을 뿐이다.  

  이런 작품들과의 경쟁? 하려면 할 수 있지, 못할 것이야 없겠지.  

  하지만 솔직히 말해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다를 바 없다. 시장 규모가 우리에 비해 엄청나게 크고, 각종 시스템 지원이 활성화되어 있고, 게다가 풍성한 작가군과 오타쿠적 독자들이 드글드글한 일본 만화를 상대로 정면돌파를 강행하라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명령이라 이거지.  

  물론 성공할 수도 있겠지, 간혹. 하지만 마케팅적인 관점에서 보면, 차라리 거기 들어갈 시간과 열정과 노력을 다른 분야에 쏟으면 훨씬 적은 비용으로 훨씬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요것이지. 

 

  그런 이유로 '족구'를 소재로 삼겠다는 것은 썩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범위에서는) '족구'를 소재로 삼은 외국 작품이 없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리고 그들을 곁에 둔 탓에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족구'라는 스포츠를 알고 있고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좋아. 일단 아이디어는 합격점이라는 거지. 그런데 문제는 스토리텔링이야.  

  일본 만화를 참고로 하자면, 스포츠만화의 스토리텔링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되지.   

① 현실성을 바탕에 두고, 판타지를 추가하는 방법 : reality > fantasy

  이른바 '리얼'계열이 여기에 속한다. <슬램덩크>나 <H2>같은 작품들.  
  <슬램덩크>의 농구 경기장면은 매우 긴박하고 리얼리티가 살아있지. 그렇다면 판타지적인 요소는? 고등학생들이 이런 플레이를 한다는 거지, 뭐.   

② 판타지에 바탕을 두고, 현실성을 추가하는 방법  : reality < fantasy 

  <피구왕 통키>같은 작품이 해당하지. 불꽃슛을 쏘고, 마구를 던지고 하는 뭐, 그런 것들 말이야.
  사실은 한국의 대표적인 스포츠만화 <공포의 외인구단>도 여기에 해당한다. 그들의 플레이는 그야말로 비현실적이니까. 제길, 지옥훈련을 한다고 그런 선수들이 될 수 있다면, 실미도 특수부대, UDT, 해병대, 특전사 등을 모아서 국가대표팀을 만들면 되겠네. 

  아무튼, 뭐,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②라고 해도, 리얼리티가 전혀 없어서는 안 된다는 거야. 오버를 해도 적당하게 해야 한다는 거지. 적당한 오버는 만화적 즐거움을 주는 양념이지만, 그게 지나치면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 마련이다.  

  
▲ 족구로 날려버린 뒷동산이라니, 요런 뻥은 좀 심하다는 말이지. (pp.70-71.)


  정리해볼까? 

  시도는 참신했어. 하지만 스토리텔링은 너무 오버했지.  

  

 당  근  ☞ ☞
  • 어쨌거나 새로운 시도는 소중하다
  • 생각해보니, 족구, 요거 잘만 만들면 재미있는 소재겠는데? 
  • 군대 이야기를 적절히 버무리면, 한국형 이야기의 특색이 만들어질수도… 있을까? 

 

채  찍 ☜ ☜ ☜ ☜
  • 양념맛만 잔뜩 나는 요리를 누가 먹고 싶을까? 오버는 양념이라는 것을 잊지말자!   
  • 원래 허풍에는 적절한 리얼리티가 있어야 하는 법, 리얼은 없고 허풍만 있다.  
  • 작화 및 스토리 수준은 아동용인데, 어쩌나 족구는 예비역 이상에게 통용되는 스포츠인데.
  • 여기저기에서 발견되는 화장실 유머, 꼭 필요했을까? 
  • 쭉빵 글래머와 족구의 관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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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가 찾은 맛있는 문장들
성석제 엮음 / 창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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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최고의 문장가는?" 

  이라는 질문에는 쉽게 대답할 수 없지만,   

 

  "우리나라에서 문장을 제일 감칠맛나게 쓰는 사람은?" 

  이라는 질문이라면 제법 대답을 찾을 수 있겠다.  

 

  더구나 여기에 '현재 살아있는 작가 중에서'라는 단서가 붙는다면, 

  나는 더욱 편한 마음으로 대답을 고를 수 있다.  

 

  성석제,  단연코 이 사람이다.  

  나는 그를 김유정 → 이문구 → 성석제로 이어지는 '감칠맛 문장'의 적통자로 꼽는다.  

 

  뭐, 중언부언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의 작품을 읽어보시라, 그것이 가장 분명하고도 간단명료한 설명이 될 것이다.  

  지금은 절판되어 구하기 어렵지만 《쏘가리》라는 짧은 소설모음집을 권한다.  

  성석제식 입담의 절정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바로 그런 인물인 '맛있는 문장들'을 추천한다고 하니, 어찌 기대하지 않겠는가? 

  물론 이 책은 성석제의 이름을 건 작품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심각하게 고민하거나 고심하면서 읽을 것은 아니다.  

  맛난 음식을 먹듯이, 그저 '후루룩짭짭' 읽어내려가면 되겠다.  

 

  책의 구성은 이렇다.  

  여러 작가의 작품 중에서 맛있는 부분을 소개한 뒤에, 짧은 추천이유가 붙어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다음처럼 성석제의 문장관(觀)을 확인할 수 있는 내용도 있다.   

  

문호(文豪)의 작품이라고 해서 재미가 없는 게 아닙니다. 대표작이라 해서 엄숙하게 큰 줄거리만 이야기할 뿐 세세한 묘사를 소홀히 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작품이든 작은 물방울 하나에서 출발하는 게 아닐까요. 물방울이 모여 샘이 되고 샘물이 개울물이 되며 개울물이 강물이, 강물이 바닷물이 되고 마침내 수증기가 되고 저 높은 곳에서 구름으로 떠돌듯 소설도 아주 기본적인 것에서 출발해서 만인을 감득시키는 걸작이 되겠지요. (p.40.) 

 

  이처럼 빛나는 편린을 찾아내는 것 역시 책을 읽는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당근 ☞ ☞ ☞
  •   여러 작가, 여러 작품의 핵심을 한 자리에서 맛볼 수 있는 문장 뷔페! 
  •   몰랐던 작가를 알아가는 재미 + 알고 있던 작가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는 재미  
  •   추천의 글이 오히려 재미있어 질 수도 있다는 소소한 반전
      
  채찍 ☜ ☜
  •   어디 뷔페에서 음식의 제맛을 맛본 적이 있었던가! 
  •   역시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참맛을 느낄 수 있다는 보편타당한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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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 대장 내친구 작은거인 22
이지현 글, 정승희 그림 / 국민서관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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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신한 아이디어로의 짧은 이야기

 - 한국 동화는 왜 짧은가? (하나) 



  한국 동화는 대부분 분량이 짧다. 

  "동화는 아이들이 보는 이야기이니 길 수가 없지 않겠는가"라는 반론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톨킨의 <호빗>이나 프랭크 바움의 <오즈> 시리즈 등의 외국 동화를 고려하자면, 적어도 모든 동화가 짧은 것은 아닌 듯 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왜 한국에서는 긴 동화가 나오지 못하는가?"로 이어진다.

  동화에는 분량이 긴 것과 짧은 것이 모두 존재한다. 그러니 분량이 짧은 동화가 주로 나온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아니다. 다만, 발표되는 작품 중에서 압도적인 수가 분량이 짧은 작품뿐이라면 문제가 된다. 

  한쪽 주의주장을 되풀이하거나, 하나의 시각에 편중되는 것이 위험한 것처럼, 문학의 창작방법이 한쪽으로 집중되는 것도 역시, 문학을 한정시키고 편협하게 만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문화, 그리고 그 일부로의 문학은 숲이다. 한 가지 종류의 나무만 무성하다고 해서 숲이 형성되지 않는다. 숲은 다양한 종류의 식물과 동물이 어울려 사는 공간이다. 키 큰 나무도 있고, 덤불도 있고, 키 작은 풀들도 있다. 그 뿐인가, 크고 작은 산짐승들과 사람들도 이곳에서 함께 살아간다. 이들이 모두 공존해야 비로소 숲이 된다.   
  문화는 숲이 되어야 한다. 다양한 종류의 문화가 서로 공존할 때, 비로소 그 문화는 살아 숨쉬는 생명력을 획득하게 된다. 
 

  동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여러 종류의 동화가 서로 조화를 이룰 때에 비로소 그 수준이 향상될 수 있다. 우리가 특정 분량의 동화만 발표되는 현실을 문제 삼아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다시 이야기를 집중해보자. 한국 동화들은 왜 짧은가?
  결코 단순한 문제는아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좀더 고민하고 생각해야 하는 문제이지만, 몇 가지 의심되는 것들만 지적하겠다. 

  

  1) 출판 시스템의 문제 
 

  우리의 출판 시스템은 장기적인 기획이 거의 없다. 출판 산업의 규모와 수준 자체가 지극히 영세하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의 출판시장은 구조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오랜 세월 반복되고 있는 '돌려막기'가 바로 그 주범이다. 

  콘텐츠 생산에서 수익을 내고 그것을 다시 콘텐츠 개발에 투자하는 안정적인 시스템이 아니라, 만들어낸 콘텐츠를 유통시키는 과정에서 우선 돈을 외상으로 끌어쓰고 그 부족분을 또다른 콘텐츠를 만들어내어 채워넣는 구조인 것이다.

  이런 시스템이 왜 문제인가? 외상을 외상으로 채우다보니 콘텐츠를 무조건적으로 단기간에 만들어내야 하고, 그런 식으로 성급하게 기획과 개발이 이루어지다 보니, 장기적인 안목에서 이루어지는 프로젝트는 만들어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중에서 오직 <무한도전> 만이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왜 그런가? 그만큼 긴 역사를 가지고 있고, 고정적인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1박2일>이나 <패밀리가 떴다>는 항상 단발성의, 혹은 같은 포멧을 반복하면서 장소와 게스트를 변화하는 방법 밖에는 아이템을 만들 수가 없다. 이들이 아무리 인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무한도전>만큼의 마니아층이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예를 통해서도 대충 눈치챘겠지만, 꼭 장기 프로젝트가 좋은 것은 아니다. 단발성 아이디어들이 참신하고 재미있는 경우도 많으니까.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하자면) 단발적인 것만 있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동화를 포함한 우리의 출판 시장이 가진 문제도 그러하다. 짧지만 참신한 시각을 가진 동화들은 많이 배출되고 있다. 내게 이런 긴 상념을 끈을 제공해준 이 작품, 이지현의 <울보 대장> 역시 그러하다.

  섹스(sex)와 젠더(gender), 즉 생물학적 성과 사회학적 성은 분명한 차이를 가진다. 섹스는 타고나는 것인데 비해, 젠더는 학습되는 것, 구성원들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섹스가 아닌 '젠더'의 문제는 동화에서 다룰 만한 가치를 가진다. 젠더의 형성은 대부분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이루어지며, 이때 잘못된 성역할 개념을 가지게 되면 이후에도 이성관계를 편협하거나 폭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고, 자신의 성 정체성을 왜곡해서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울보 대장>은 젠더 중에서도 '남성성', 그 중에서도 마초적인 남성성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이런 비판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 
 

  다시 길이의 문제로 돌아가겠다. 이처럼 참신한 작품들이 발표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우리는 배가 고프다. 
  독창적인 것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분명히. 번뜩이는 아이디어뿐만 아니라 다른 요소들도 충만하게 갖추고 있는, 또 다른 종류의 이야기가. 그리고 그것은 조금 더 시간을 들이고, 더 정성을 들이고, 더 긴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아느냐고? 당연하지 않은가.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은 그곳밖에 없는데. 

 

  2) 작가 의식의 문제
 

  또 하나의 문제로 지적할 만한 것은 동화를 만들어내는 작가의 의식수준이다. 
  한국의 동화작가들은 수준이 낮다, 따위의 아마추어적인 발언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작가들은 모두 개별적이며 독자적인 존재들이다. 어느 집단에 소속되었다고 해서 그 수준에 머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빼어난 작가는 소속 집단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언제나 집단적 수준을 뛰어넘는다. 그러한 예야 너무 많아서 모두 언급할 수 없을 지경이다. 
 

  한국의 작가라고 해서 좋은 동화작품을 쓰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다. 다만, 좋은 작품의 기준에는 참신한 아이디어 뿐만 아니라, 작품에 내포되는 철학이나 시대의식 등도 포함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사실 이는 이야기의 길이를 좌우하는 창작방법이기도 하다. 시대의식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다양한 양상을 고찰해야 하기 때문에 이야기의 폭이 넓어지게 되며, 철학을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심도있는 논설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깊어지게 된다. 

  아이디어는 철학과 시대의식의 뼈대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아이디어에 살을 붙이는 작업이 필요하다. 
 

  한국 창작 동화에게는 바로 이러한 작업이 필요하다. <울보 대장> 역시 그러하다. 이 작품의 참신성이야 앞에서 이미 언급했으니, 아이디어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그 아이디어를 형상화하는 작업은 다소 부족하다. 그만큼 이야기의 흐름이 급박하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할머니와 함께 만드는 비밀의 화원에 대한 이야기, 장미의 가족사, 세영이 아버지의 이야기, 장미와 세영의 로맨드 등등은 조금 더 길고도 자세하게 다룰 수 있지 않았겠는가. 이런 부분이 더욱 더 보강되었다면 더욱 길고도 세밀한 이야기로 만들어질 수 있었을 텐데, 아쉽고 또 아쉬울 따름이다. 

 

  한국의 동화는 왜 짧은가?
  더 생각할 문제가 많이 남아 있다. 

  내 부족한 글은 여기에서 끝을 내지만, 생각은 아직 남는다. 
  앞으로 더 많은 작품을 읽고, 그를 통해 생각을 발전시켜야 하리라. 
  



* 이 포스트는 네이버 블로그 <All that story>와 알라딘 서재 <서재에서 세상 읽기>에 함께 게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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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고 13 SE - [초특가판]
데자키 오사무 외 감독 / 덕슨미디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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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킬러만큼 마초에게 적절한 직업이 또 있을까.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직업상의 특성이 그러하고, 그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음모와 암투가 벌어져야 한다는 사실 또한 그러하며, 무엇보다 임무를 완수하든 실패하든 끝내 비극적 아우라를 짊어져야 한다는 숙명이 그러하다.

  그러하기에, 마초물 주인공들에게 '킬러'는 오랜 동경의 대상이었다.

  턱시토를 갖춰입고 마티니를 홀짝거리는 카사노바 스파이 007이 그러했고,
  호색한적 주접을 부리다가도 문득문득 스나이퍼로서의 본성을 드러내는 시티헌터가 그러하고(하긴, '호색'이야말로 마초의 본성이 아니겠는가. 마초를 위한 그 유명한 작품이 있지 않은가, 영웅호색이라고).
  롱코트와 라이방으로 코디를 맞추고 베레테를 휘두르며 "강호에 의리가 떨어졌다"고 속삭이는 오우삼 영화 속의 주윤발이 그러지 않았던가.


  1968년부터 줄기차게 연재되고 있는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데자키 오사무 감독의 1983년 작품 <고르고13(ゴルゴ13)>의 주인공 듀크 토고도 역시 그 오랜 전통을 계승한다.

  그는 과묵하며, 신의를 지키고, 또한 냉혹하다. 요컨대, 킬러로서의 자질을 갖춘 것이다.
  작품 내내 등장하는 괴물적 체력이나, 불사(不死)에 가까운 생존능력, 마초라면 모름지기 갖추어야 할 유혹의 기술 혹은 성교의 기술 등등은 악세서리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마초의 마음가짐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결단코 반성하지 않는다. 오랜 조력자들이 죽임을 당할 때에도, 믿었던 동료에게 배신을 당할 때에도, 킬러라는 이유로 의뢰자의 아버지에게 공격을 받을 때에도.
  그는 누군가를 죽이고 죽임 당한 위험에 빠지는 것에 대해, 자신이 택한 킬러라는 직업에 대해, 그리고 그로 인해 주변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에 대해, 무감각하다. 혹은 무감각을 가장한다.


  사실 이 작품의 내용이나 세계관은 뭐, 그리 길게 생각할 여지가 없다.
  스토리텔링도 느와르 필름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것이다.

  오히려 주목되는 것은 세련된 표현 기법이다.
  특히 초반 3분, 대사 없이 영상만으로 진행되는 하드보일드는 압권이다.
이 부분의 미장센과 시퀀스 구성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가치 있다.

  표현 기법의 측면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이 작품은 3D기법을 도입한 최초의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이다.


  그것을 확인하는 것으로도 이 작품의 역사적 가치는 인정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이 작품의 3D는 민망할 정도의 수준이다. 적어도 현대의 시각에서는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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