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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고 13 SE - [초특가판]
데자키 오사무 외 감독 / 덕슨미디어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킬러만큼 마초에게 적절한 직업이 또 있을까.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직업상의 특성이 그러하고, 그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음모와 암투가 벌어져야 한다는 사실 또한 그러하며, 무엇보다 임무를 완수하든 실패하든 끝내 비극적 아우라를 짊어져야 한다는 숙명이 그러하다.
그러하기에, 마초물 주인공들에게 '킬러'는 오랜 동경의 대상이었다.
턱시토를 갖춰입고 마티니를 홀짝거리는 카사노바 스파이 007이 그러했고,
호색한적 주접을 부리다가도 문득문득 스나이퍼로서의 본성을 드러내는 시티헌터가 그러하고(하긴, '호색'이야말로 마초의 본성이 아니겠는가. 마초를 위한 그 유명한 작품이 있지 않은가, 영웅호색이라고).
롱코트와 라이방으로 코디를 맞추고 베레테를 휘두르며 "강호에 의리가 떨어졌다"고 속삭이는 오우삼 영화 속의 주윤발이 그러지 않았던가.
1968년부터 줄기차게 연재되고 있는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데자키 오사무 감독의 1983년 작품 <고르고13(ゴルゴ13)>의 주인공 듀크 토고도 역시 그 오랜 전통을 계승한다.
그는 과묵하며, 신의를 지키고, 또한 냉혹하다. 요컨대, 킬러로서의 자질을 갖춘 것이다.
작품 내내 등장하는 괴물적 체력이나, 불사(不死)에 가까운 생존능력, 마초라면 모름지기 갖추어야 할 유혹의 기술 혹은 성교의 기술 등등은 악세서리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마초의 마음가짐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결단코 반성하지 않는다. 오랜 조력자들이 죽임을 당할 때에도, 믿었던 동료에게 배신을 당할 때에도, 킬러라는 이유로 의뢰자의 아버지에게 공격을 받을 때에도.
그는 누군가를 죽이고 죽임 당한 위험에 빠지는 것에 대해, 자신이 택한 킬러라는 직업에 대해, 그리고 그로 인해 주변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에 대해, 무감각하다. 혹은 무감각을 가장한다.
사실 이 작품의 내용이나 세계관은 뭐, 그리 길게 생각할 여지가 없다.
스토리텔링도 느와르 필름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것이다.
오히려 주목되는 것은 세련된 표현 기법이다.
특히 초반 3분, 대사 없이 영상만으로 진행되는 하드보일드는 압권이다.
이 부분의 미장센과 시퀀스 구성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가치 있다.
표현 기법의 측면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이 작품은 3D기법을 도입한 최초의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이다.
그것을 확인하는 것으로도 이 작품의 역사적 가치는 인정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이 작품의 3D는 민망할 정도의 수준이다. 적어도 현대의 시각에서는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