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보 대장 내친구 작은거인 22
이지현 글, 정승희 그림 / 국민서관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참신한 아이디어로의 짧은 이야기

 - 한국 동화는 왜 짧은가? (하나) 



  한국 동화는 대부분 분량이 짧다. 

  "동화는 아이들이 보는 이야기이니 길 수가 없지 않겠는가"라는 반론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톨킨의 <호빗>이나 프랭크 바움의 <오즈> 시리즈 등의 외국 동화를 고려하자면, 적어도 모든 동화가 짧은 것은 아닌 듯 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왜 한국에서는 긴 동화가 나오지 못하는가?"로 이어진다.

  동화에는 분량이 긴 것과 짧은 것이 모두 존재한다. 그러니 분량이 짧은 동화가 주로 나온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아니다. 다만, 발표되는 작품 중에서 압도적인 수가 분량이 짧은 작품뿐이라면 문제가 된다. 

  한쪽 주의주장을 되풀이하거나, 하나의 시각에 편중되는 것이 위험한 것처럼, 문학의 창작방법이 한쪽으로 집중되는 것도 역시, 문학을 한정시키고 편협하게 만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문화, 그리고 그 일부로의 문학은 숲이다. 한 가지 종류의 나무만 무성하다고 해서 숲이 형성되지 않는다. 숲은 다양한 종류의 식물과 동물이 어울려 사는 공간이다. 키 큰 나무도 있고, 덤불도 있고, 키 작은 풀들도 있다. 그 뿐인가, 크고 작은 산짐승들과 사람들도 이곳에서 함께 살아간다. 이들이 모두 공존해야 비로소 숲이 된다.   
  문화는 숲이 되어야 한다. 다양한 종류의 문화가 서로 공존할 때, 비로소 그 문화는 살아 숨쉬는 생명력을 획득하게 된다. 
 

  동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여러 종류의 동화가 서로 조화를 이룰 때에 비로소 그 수준이 향상될 수 있다. 우리가 특정 분량의 동화만 발표되는 현실을 문제 삼아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다시 이야기를 집중해보자. 한국 동화들은 왜 짧은가?
  결코 단순한 문제는아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좀더 고민하고 생각해야 하는 문제이지만, 몇 가지 의심되는 것들만 지적하겠다. 

  

  1) 출판 시스템의 문제 
 

  우리의 출판 시스템은 장기적인 기획이 거의 없다. 출판 산업의 규모와 수준 자체가 지극히 영세하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의 출판시장은 구조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오랜 세월 반복되고 있는 '돌려막기'가 바로 그 주범이다. 

  콘텐츠 생산에서 수익을 내고 그것을 다시 콘텐츠 개발에 투자하는 안정적인 시스템이 아니라, 만들어낸 콘텐츠를 유통시키는 과정에서 우선 돈을 외상으로 끌어쓰고 그 부족분을 또다른 콘텐츠를 만들어내어 채워넣는 구조인 것이다.

  이런 시스템이 왜 문제인가? 외상을 외상으로 채우다보니 콘텐츠를 무조건적으로 단기간에 만들어내야 하고, 그런 식으로 성급하게 기획과 개발이 이루어지다 보니, 장기적인 안목에서 이루어지는 프로젝트는 만들어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중에서 오직 <무한도전> 만이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왜 그런가? 그만큼 긴 역사를 가지고 있고, 고정적인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1박2일>이나 <패밀리가 떴다>는 항상 단발성의, 혹은 같은 포멧을 반복하면서 장소와 게스트를 변화하는 방법 밖에는 아이템을 만들 수가 없다. 이들이 아무리 인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무한도전>만큼의 마니아층이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예를 통해서도 대충 눈치챘겠지만, 꼭 장기 프로젝트가 좋은 것은 아니다. 단발성 아이디어들이 참신하고 재미있는 경우도 많으니까.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하자면) 단발적인 것만 있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동화를 포함한 우리의 출판 시장이 가진 문제도 그러하다. 짧지만 참신한 시각을 가진 동화들은 많이 배출되고 있다. 내게 이런 긴 상념을 끈을 제공해준 이 작품, 이지현의 <울보 대장> 역시 그러하다.

  섹스(sex)와 젠더(gender), 즉 생물학적 성과 사회학적 성은 분명한 차이를 가진다. 섹스는 타고나는 것인데 비해, 젠더는 학습되는 것, 구성원들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섹스가 아닌 '젠더'의 문제는 동화에서 다룰 만한 가치를 가진다. 젠더의 형성은 대부분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이루어지며, 이때 잘못된 성역할 개념을 가지게 되면 이후에도 이성관계를 편협하거나 폭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고, 자신의 성 정체성을 왜곡해서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울보 대장>은 젠더 중에서도 '남성성', 그 중에서도 마초적인 남성성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이런 비판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 
 

  다시 길이의 문제로 돌아가겠다. 이처럼 참신한 작품들이 발표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우리는 배가 고프다. 
  독창적인 것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분명히. 번뜩이는 아이디어뿐만 아니라 다른 요소들도 충만하게 갖추고 있는, 또 다른 종류의 이야기가. 그리고 그것은 조금 더 시간을 들이고, 더 정성을 들이고, 더 긴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아느냐고? 당연하지 않은가.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은 그곳밖에 없는데. 

 

  2) 작가 의식의 문제
 

  또 하나의 문제로 지적할 만한 것은 동화를 만들어내는 작가의 의식수준이다. 
  한국의 동화작가들은 수준이 낮다, 따위의 아마추어적인 발언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작가들은 모두 개별적이며 독자적인 존재들이다. 어느 집단에 소속되었다고 해서 그 수준에 머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빼어난 작가는 소속 집단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언제나 집단적 수준을 뛰어넘는다. 그러한 예야 너무 많아서 모두 언급할 수 없을 지경이다. 
 

  한국의 작가라고 해서 좋은 동화작품을 쓰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다. 다만, 좋은 작품의 기준에는 참신한 아이디어 뿐만 아니라, 작품에 내포되는 철학이나 시대의식 등도 포함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사실 이는 이야기의 길이를 좌우하는 창작방법이기도 하다. 시대의식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다양한 양상을 고찰해야 하기 때문에 이야기의 폭이 넓어지게 되며, 철학을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심도있는 논설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깊어지게 된다. 

  아이디어는 철학과 시대의식의 뼈대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아이디어에 살을 붙이는 작업이 필요하다. 
 

  한국 창작 동화에게는 바로 이러한 작업이 필요하다. <울보 대장> 역시 그러하다. 이 작품의 참신성이야 앞에서 이미 언급했으니, 아이디어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그 아이디어를 형상화하는 작업은 다소 부족하다. 그만큼 이야기의 흐름이 급박하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할머니와 함께 만드는 비밀의 화원에 대한 이야기, 장미의 가족사, 세영이 아버지의 이야기, 장미와 세영의 로맨드 등등은 조금 더 길고도 자세하게 다룰 수 있지 않았겠는가. 이런 부분이 더욱 더 보강되었다면 더욱 길고도 세밀한 이야기로 만들어질 수 있었을 텐데, 아쉽고 또 아쉬울 따름이다. 

 

  한국의 동화는 왜 짧은가?
  더 생각할 문제가 많이 남아 있다. 

  내 부족한 글은 여기에서 끝을 내지만, 생각은 아직 남는다. 
  앞으로 더 많은 작품을 읽고, 그를 통해 생각을 발전시켜야 하리라. 
  



* 이 포스트는 네이버 블로그 <All that story>와 알라딘 서재 <서재에서 세상 읽기>에 함께 게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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