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비자다. 내가 하나의 물건을 있기 까지는 생산자와 유통업자가 있어야한다. 지식에도 마찬가지로 생산자와 유통업자 소비자라는 서로 다른 계층이 있다.

학문을 추구한다는 것은 이러한 여러 단계 중의 하나에 자신을 자리 매김하는 것으로 생산과정에 종사할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기간 외국에서 공부하시던 서울대학교의 교수님 분이 자신은 소비자 약간 유통업자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것을 들었다.

한국에서 인문사회과학 분야 학문에 뜻을 두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좌절을 느끼게 하는 것에는 가지 원인이 있는 하나는 고전이고 다른 하나는 외국어다. 고전은 앞에 묘사 한대로 지식의 산에서 중간 중간의 굵은 능선이다. 다른 사람의 지적인 축적물을 정확히 파악하지 한다면 그들이 도달해 놓은 한계가 어느 곳인지 방법도 없다.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언급한다. 기껏 고민을 하다 보면 이전에 누가 깔끔히 정리해 놓은 것을 발견할 있다. 얼마나 허탈할 것인가?

어지간히 뛰어난 사람도 역사 속에서 지적 능력이 자신보다 훨씬 뛰어 났던 사람들을 무수히 만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한 대로 다른 사람의 노력이 만들어 결과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중턱의 무수한 쉼터나 앞선 등반객의 자취를 무시하고 밑바닥부터 혼자 힘으로만 오르겠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이 용기 있다는 이야기가 듣고 싶겠지만 적어도 현명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할 것이라고 있다. 가령 누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들고 산에 올라가 거기서부터 출발하여 헤겔의 <정신현상학> 만들어 내려왔다고 가정해 보자 이미 시대는 헤겔의 시대를 넘어 마르크스를 거쳐 포스트 모던까지 흘러갔다. 심하게 말하면 그는 고대인간일 따름이다.

 

따라서 창조를 하고 싶은 사람은 무엇보다 자신이 소화한 고전의 범위를 알아야 한다. 이를 기반으로 하고 지금까지 인류가 도달한 한계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다시 앞으로 나아갈 있는 힘이 된다. 자연과학과는 다르게 인문사회과학에서는 자신이 섭렵한 고전의 범위를 따져 보아야 한다. 그것이 창조를 이룰 있는 가능성의 한계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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