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아마도 그의 첫 영화출연작이면서 주연을 맡았던, 흥행에 참패한 영화가 있다.

그 영화를 부산의 한 대학 캠퍼스에서 촬영했고, 우연히도 내가 일하던 학과 사무실을 주연배우 대기실로 제공하면서 9시간 동안 그를 가까이서 볼 기회가 있었다. (당시 내가 조교였다는.. ^^)


그는 참 반듯한 사람이었다.

촬영 진행 스탭이 이미 사무실을 찾아와 편의 제공에 감사하다며 인사를 하고 간 뒤였다.

백팩을 메고 들어온 그는 자기들 때문에 오늘 많이 불편할 텐데 미안하다, 잘 부탁한다고 인사했다. 물론 그와 함께 주연을 맡았던 여배우는 오자마자 우리 입을 딱 벌리게 만들 만큼 황당하고 무례한 일을 연속적으로 벌였다. 다 씻어 엎어놓은 컵 위에서 머리카락을 자른다거나, 사무실에 걸려 있던 대형거울을 말도 없이 빼서 사용한다거나, 우리를 투명인간 취급한다거나.....


그는 자기 매니저인 듯한 젊은 남성을 제외하고는 모든 이들에게 높임말을 썼다. 감독부터 막내스탭에게까지. 반면, 상대 여배우는 모든 이들에게 반말로 일관했다. (어쩌면 그는 성인이 되어 배우가 되었고, 그녀는 어릴 때 데뷔하여 이미 당대를 대표하는 여배우라는 서로 다른 처지 때문일지도 모른다.)


계속 촬영을 이어가면서 모든 촬영스탭들과 배우들이 햄버거로 점심을 때우는 상황에서, 그는 진행스탭에게 조교선생님들에게도 햄버거 드리라며 우리까지 챙겼다. 뜻밖이었다. 함께 일하던 조교선생님은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함박웃음을 지었고(점심 먹고 난 뒤니 그 햄버거가 뭐 탐이 났겠는가, 다만 그가 보인 매너에 하트눈이 되어 버린 것이지), 급기야 다른 사무실에서 빌린 카메라로 그와 함께 사진을 찍기까지 했다. 나는 왜 그때 사진을 안 찍겠다 버텼을꼬. 흠..


한 가지 재미있었던 것. 

차인표씨는 소품팀에서 준비한 운동화를 보더니 자신이 직접 챙겨온 운동화-그가 신던 조금 낡은-를 꺼내면서 소품팀 운동화가 새거에 브랜드라 적절하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런데 소품팀 스탭은 끝까지 자신이 가지고 온 운동화를 주장했다. 어떤 운동화를 신고 촬영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차인표씨가 모든 사람들에게 예의를 갖추고 높임말을 사용하고, 스탭들도 차인표씨에게는 주늑들지 않고 자기 주장을 적극적으로 하더라는 것이었다. 반면 상대 여배우에게는 모든 스탭들이 칭찬일색이었다는 것. 연기 좋았다, 예쁘게 나왔다... 


그는 떠날 때에도 고마웠다는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그가 비록 연기에 뛰어난 배우는 아니지만 인격적으로는 매우 훌륭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는 스스로를 2류배우라 칭하지만, 모두가 1류가 될 수도 될 필요도 없다.

또 한 번 배우였다고 끝까지 배우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의 연기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만한 좋은 작품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는 그의 대표작을 만나기를 바라는 팬심으로 적은 글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늘바람 2012-03-21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힐링캠프 보면서 더 팬이 되었어요

rosa 2012-03-21 22:37   좋아요 0 | URL
저야 뭐 워낙에 그의 팬이었으니까요.ㅎㅎ

blanca 2012-03-21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osa님 글을 읽으니 차인표가 더 좋아집니다. 차인표를 가까이든 멀리서든 한번씩 본 분들은 다들 칭찬하더라고요. 그 여배우가 누구인지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rosa 2012-03-22 10:42   좋아요 0 | URL
아, 궁금해하심 아니 아니 아니돼요~
옆에서 보니까요, 차인표씨 속눈썹이 정말 예쁘더군요.
카메라에는 왜 그 이쁜 눈이 안 잡히는지 모르겠어요. 힝~

2012-03-22 1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22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2-03-22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여배우 누군지 알겠어요.^^
차인표는 참 매력적인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갈수록 들더군요.
근데 그때 사진 같이 찍어놓으시지 그러셨어요.. 로사님 ㅎㅎ 아쉬워라..

rosa 2012-03-23 19:13   좋아요 0 | URL
흐.. 아시는군요.
그땐 완전 열 받아서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지..싶었는데, 10대에 데뷔하여 여전한 인기를 누리는 여배우였다 생각하니 그런 오만방자함을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그런 인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제가 전날 밤에도 밤샘을 해서 얼굴이 누렇게 뜨고 다크서클이 코옆까지 내려온 상황이라 그런 모습을 남기고 싶지 않았어요. 그리고 배우와 사진 찍는 것 보단 영화감독 싸인 받는 걸 더 좋아할 때였어요.^^*
 

고백하자면.. 1997년 나를 가장 즐겁게 했던 일 가운데 하나가 채팅이다.

김국진이 선전했던 광고문구 그대로 나는 밤을 새며 채팅했고,

온라인 세상의 성별 불균형과 외모를 절대 알 수 없는 그 세계의 묘미 덕분에

단연코 내 생에 가장 인기 있는 한 해를 보냈다. (물론 증좌를 댈 수는 없다. ^^;)

(당시 한 논문에 의하면 온라인상에서 남성:여성의 비율은 85:15로 압도적으로 남성비율이 높았다)


많은 또래 친구들을 알게 되었고, 귀여운 동생들을 만났다.

한명씩 날 보러 내려오겠다고 난리치고(실제로 몇 명은 직접 내려왔다. 그저 이 한몸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하지만 당시에는 제법 낭만적이라 생각했다. 어쩌겠는가, 나는 그때 겨우 20대 중반이었다.)

만나서 반갑긴 했지만 사실 수다떠는 것 외엔 별 다른 공통점이 없는 우리들이 뭘 하겠는가.

채팅방에서 다시 만나도 약간 서먹.

더구나 당시 내겐 온라인 외의 삶에 그들과 함께 할 여유가 없었다.


서서히 채팅방에서 멀어져갈 무렵, 결정적으로 나를 채팅방에서 내몰았던 사건이 발생했다.

"30만원 줄께"란 쪽지를 받았던 날의 충격..

대꾸하지 않는 내게 뒤이어 도착한 쪽지는 "50만원 줄께" 였고,

나는 즉각 그의 ID를 조회했다.

그는 비공개 대화방을 개설하고 혼자 들어앉아 있었다.

방제는 '돈이 너무 많아서 쓸 데가...'였고, 닉네임은 '러브호텔'이었다.


그때부터는 아는 사람들과만 채팅을 했다. 그러나 점점 무의미한 수다같다는 생각이 더해졌고,

공통된 관심과 취미를 가진 사람들을 찾아 자연스럽게 활동무대를 까페로 옮겼다.

거기서도 역시 밤마다 열리던 채팅방에서 즐거운 대화 삼매경에 빠졌던 건 당연. ^^;


15년만에 다시 밤마다 채팅을 한다.

이번엔 대화상대가 나보다 한참 어린 남성, 

바로 내 큰 조카다.

조카는  사람잡는 선행학습 위주의 입시학원에는 다니지 않는다.

친구들이 국영수학원으로 몰려갈 때, 그는 사뿐히 기타학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나는 조카와 영어책 한 권을 사서 매일 두 쪽씩 읽고 있다.

나름 쉬운 책을 골라 같이 해석해가며 틀린 부분은 고쳐주며 대화한다.

이건 꼭 공부 때문에 하는 건 아니다.

영어를 너무 공부처럼 배우는 건 질색이니까.

다른 나라 말을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물론 내 직업이 영어선생님은 아니니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얼마나 조카를 사랑하는지를 느끼게 해주고 싶다.

다행스럽게도 조카는 이모들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고 있다.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우수한 성적표가 아니라 너의 행복이라는 걸 얘기해줬다.

그가 모쪼록 즐겁고 행복한 사춘기를 보냈으면 하는 바람 가득하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조선인 2012-03-20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사한 이모에게 추천을!

rosa 2012-03-20 12:02   좋아요 0 | URL
히히 감사합니다.^^

2012-03-20 1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20 1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2-03-20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채팅방 참 잼나잖아요..... ^^
그런데 정말, 멋진 이모시네요,, 조선인님의 댓글에 완전 동의를 표합니다!

rosa 2012-03-20 14:06   좋아요 0 | URL
맨 처음 채팅하면서 젤 신났던 게, 실시간으로 전국의 날씨를 알 수 있다는 거였습니다.^^ 부산은 구름 한 점 없는데, 강원도에서는 비가 내린다 하고, 서울은 흐리다 하고... 이런 식의 날씨 얘기조차 재밌던 기억.^^
그저 좋은 이모가 되려는 몸부림이지요.^^

머큐리 2012-03-20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채팅... 좋아요...ㅎㅎ

rosa 2012-03-20 17:51   좋아요 0 | URL
흐흐.. 저도 좋아합니다, 이런 채팅.^^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조카는 내게 늘 특별했다.

4살 무렵까지 함께 살아서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렇게 어린 꼬맹이가 대단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었기 때문이다. 또래의 아이들보다 점잖고 지적 호기심도 많고, 또 너무 빨리 형이 되어야 했던 아이. 
터울이 별로 없는 아이들을 둔 부모들은 왜 그렇게 한결같이 큰 애에게 형 노릇, 오빠 노릇을 시키는 것인지 모르겠다. 둘째는 10살이 넘어도 여전히 막내 노릇을 하며 땡깡을 부리는데, 첫째는 4살부터 형 노릇을 하며 자랐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새로 맞춘 교복을 입어 보던 날, 괜시리 마음 짠해지고 감동스럽더라. 어느새 이 녀석이 이 만큼 자랐는가 싶어서.
아빠 사랑을 동생에게 죄다 뺏기고 늘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이 아이를 위해 이모가 할 수 있을 만큼 사랑해주려고 한다. 결코 부모 대신은 안되겠지만.

2월부터 한달에 한번씩 큰언니네 집을 찾아 아이들 간식을 챙겨주고 공부도 봐주기로 했다(그러니 이제 겨우 두 달 됐다). 다행히 두 녀석 모두 이모 말을 잘 듣고, 내가 해 주는 모든 음식을 맛있다며 감탄하기까지 한다. 민망하게도. 내가 해 준 건 그저 세 끼 밥과 간식이 전부. 한참 자라는 아이들이 든든했으면 했다.

늦은 밤에 귀가하는 부모들이 아무리 애들에게 게임을 하지 마란다고 들을쏘냐.
숙제하고, 밥 먹고, 치고박고 싸우고, 한 녀석은 삐쳐서 방구석에 틀어박혀도 또 다른 녀석은 컴컴한 거실에 귀신처럼 앉아 모니터에 정신을 빼앗기곤 한다.
스스로 시간을 통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집에 지키고 있을 수도 없고, 그럴 여력도 없으니.

여전히 얄랑꼴랑한 판타지물을 좋아하는 조카에게 중학생이 된 기념으로 책 선물을 했다.

물론 조카가 좋아한 책이 아니었다. --;

이모가 권해준 책을 다 읽고 함께 얘기하자, 그 다음에 네가 원하는 책을 꼭 사주마.


한달 후에 만난 조카는 책을 다 읽었을 뿐 아니라 담담하게 책을 읽은 느낌을 읖조린다.

절대로 공책에 감상물을 적지는 않겠다고 버티면서.^^;

조카가 원하는 대로 했다. 편하게 얘기하면서 느낌을 나누었다.

그리고 조카가 원했던 책을 다음날 서점에 가서 사 주었다.


인권에 대해 가르친다는 것, 깨닫게 한다는 것은 어렵다.

뭔가 어렵고 까다롭게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다.

또 스스로 인권을 소중하게 느끼고 배려받은 경험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삶을 통해서라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려고 한다.

그리고 가능한 10대의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

로자 파크스보다 앞서 버스에서 벌어지는 차별에 저항하고 아픔도 겪었던 한 10대의 얘기는

시험과 성적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한국의 10대들에게

조금은 힘이 되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며칠 전 일이다. 

거래하는 카드사 고객센터라며 전화가 걸려왔다. 상담원은 숨도 안쉬고 상품을 설명하면서, '굉장히 좋은 금융상품이 있으니 가입'하라고 권했다. 

바쁘지 않은 시간이었고, 무례하게 대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전화 끊을 짬이 생기면 얘기하려 했으나 그 짬이 나질 않았다. 설명을 듣던 중 '이거 혹시 보험사와 연계된 상품 아닌가' 하고 문의했으나 아니라고 하면서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그러나 설명 중에 ***화재를 언급하기에 관심없고 여유가 없어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너무 좋은 상품이고 고객에게 도움이 되는 거라며 계속 가입할 것을 권했다. 이때부터 짜증스러워졌다. 전화를 끊을 생각에 다른 데 지출이 많아 조금의 여유도 없다, 곤란하다 했다. 상담원은 '하루에 커피 한잔값이면 된다. 커피 한 잔 값도 없냐'는 말을 했고, 나는 전화 끊겠다는 말과 함께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생각할수록 화가 나고 불쾌했다. 내가 왜 이런 상품 판매 전화를 들어야 하는지,  왜 상품 판매원으로부터 이렇게 모욕적이고 불쾌한 말을 들어야 하는지, 내가 **카드만 사용하는 사람이지만 왜 그 카드사에서 판매하는 금융상품까지 강매당해야 하는지....

숨 돌릴 틈도 없이 상품 설명을 하는 상담원의 상황은 개인의 문제라기 보다는 기존 카드고객을 새로운 잠재적 상품 판매처로 보는 카드사의 태도에서 비롯된 일일 것이다. 항의메일을 작성하려다  혹시라도 상담원에게 어떤 불이익이 발생할까 걱정되어 머뭇거렸다. 


하지만 다시 이런 경험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또 기존 카드사용고객을 새로운 상품판매처로 삼는 카드사에 분명하게 의사를 밝히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받은 전화통화 내용과 함께 앞으로 어떠한 금융상품판매 전화도 받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밝히는 메일을 보냈고, 해당 직원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나의 불만사항에 대한 카드사측의 공식적인 사과와 답변을 요청했다. 


다음날 해당 카드사 보험센터 실장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향후 다시는 보험관련 상품 판매 전화를 하지 않을 것임을 밝히고, 해당 상담원에게 교육을 실시하겠다고 했다. 이미 담당실장은 누가 내게 전화했는지 파악한 상태였다. 나는 이 문제가 그 직원의 문제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 개인에게 부당한 가혹한 처벌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당부했다. 담당 실장은 다소 당황하는 듯하더니 그래도 부적절한 말을 한 것에 대한 교육은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우수고객이어서 전화를 했다는 말이 우스웠다. 연체없이 꼬박꼬박 카드결제한 것이 각종 보험안내전화를 받게 한 원인이었다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사무실은 낡고 허름한 건물에 자리잡았다.

오래된 건물이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너무 추워서 오는 사람들마다 한마디씩 덧붙이는 곳.


지난해 가을부터였나보다.

부쩍 사무실이 있는 건물 앞에 누군가 자꾸만 쓰레기를 갖다 버렸다.

시커먼 비닐봉투에 담겨 여기저기 뒹구는 쓰레기들.

사무실로 들어오는 건물 입구가 지저분하니 외부인 출입이 많은 사무실 식구들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건 당연한 일. 게다가 처음엔 한 두 개 작은 봉투가 뒹굴었지만 어느날엔 커다란 침대 매트리스가 놓여 있었다. 참지 못하고 결국 무단투기로 신고했고, 구청에서 나와 수거해갔다. 누가 버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설날 무렵이었다. 사무실 입구에 이번엔 백화점 선물박스가 놓여 있었다. 

고기세트를 선물받았던 모양이다. 안에 물건은 쏙 빼고 박스채로 뒹굴었다.

살펴보니 택배 송장이 붙어 있어 쪼그리고 앉아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때 누군가 골목을 지나가고 있었다. 젊은 남자였다.

사무실 청소를 마치고 사진을 확인했는데 이름과 전화번호가 분명하지 않았다. 다시 사진을 찍으러 내려 갔을 때, 송장이 찢겨진 걸 확인했다. 쓰레기는 그 자리에서 뒹굴고 송장만 떼간 것이다.

이런 염치 없는 사람 같으니!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 화가 났고, 결국 택배회사 송장번호로 추적하여 전화를 걸었다.

남자였다.

왜 남의 사무실 앞에 쓰레기를 버리냐고 했더니, 거기 놔두면 재활용으로 가져가는 것 아니냔다.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날도 아니고 안에 잡쓰레기를 함께 넣어둔 것이라 청소하시는 분들이 가져갈리 만무하다.

당장 치우라고 얘기했더니 알았단다. 두시간이 지나고 세시간이 지나도 사무실앞에 그대로 버려뒀더라. 결국 문자로 연락했다. 당장 가져가지 않으면 신고하겠다고. 퇴근하면서 보니 박스포장지만 벗겨가고 스티로폴 박스는 그대로 나뒹굴고 있었다.


2월 말의 일이다.

목요일이었다. 이번엔 어린이 학습지 봉투에 쓰레기가 담겨 버려져 있었다. 

사무실 다른 활동가가 직접 봉투에 붙어있는 연락처로 전화했다. 젊은 여자였다. 아이가 버렸나 하더니 치우라고 말하겠단다.(아이가 남의 집 사무실까지 쓰레기를 들고 와서 버린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겠다) 그러나 퇴근때까지도 쓰레기는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아이의 이름은 설날무렵 쓰레기를 버렸던 남자와 성씨가 동일했다. 가족일까? 그냥 추측만 할 뿐. 결국 다음날 건물 청소하시는 분이 지저분해 안되겠다며 쓰레기를 치우셨다.

토요일, 다시 학습지 봉투에 쓰레기가 담겨진 채 놔뒹굴고 있었다. 구청에 신고해야 겠다 생각하고  사진을 찍은 후 사무실로 가지고 올라왔다. 월요일, 신고했다. 구청에서 나와 쓰레기를 치웠을 뿐 아니라 봉투에 찍힌 전화번호를 가져갔고, 직접 연락해서 조치를 취하겠단다.


한동안 쓰레기 버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주 월요일 다시 사무실 앞에 쓰레기 봉투 대여섯개가 나뒹굴고 있었다. 다시 구청에 연락했다. 지난달 신고했던 건에 대해서 어떤 조치가 취해진 것인지 문의했다. 자세한 정보가 없이는 확인 불가하다고 하여 정식으로 팩스로 신고사항에 대해 내려진 조치를 확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화요일 오전, 구청 담당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쓰레기 무단 투기자에게 과태료를 부과할 것이라고.


정확하지 않다. 쓰레기를 버린 이들이 부부인지 아닌지. 그러나 이 동네 골목 어디에선가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같은 동네 사람이 매일같이 남의 집 사무실에 쓰레기를 갖다 버린다. 그리고 이제 주소는 도려낸 쓰레기가 놔뒹굴고 있다. 그러나 정작 버려진 건 쓰레기가 아니라 그들의 양심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