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자면.. 1997년 나를 가장 즐겁게 했던 일 가운데 하나가 채팅이다.

김국진이 선전했던 광고문구 그대로 나는 밤을 새며 채팅했고,

온라인 세상의 성별 불균형과 외모를 절대 알 수 없는 그 세계의 묘미 덕분에

단연코 내 생에 가장 인기 있는 한 해를 보냈다. (물론 증좌를 댈 수는 없다. ^^;)

(당시 한 논문에 의하면 온라인상에서 남성:여성의 비율은 85:15로 압도적으로 남성비율이 높았다)


많은 또래 친구들을 알게 되었고, 귀여운 동생들을 만났다.

한명씩 날 보러 내려오겠다고 난리치고(실제로 몇 명은 직접 내려왔다. 그저 이 한몸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하지만 당시에는 제법 낭만적이라 생각했다. 어쩌겠는가, 나는 그때 겨우 20대 중반이었다.)

만나서 반갑긴 했지만 사실 수다떠는 것 외엔 별 다른 공통점이 없는 우리들이 뭘 하겠는가.

채팅방에서 다시 만나도 약간 서먹.

더구나 당시 내겐 온라인 외의 삶에 그들과 함께 할 여유가 없었다.


서서히 채팅방에서 멀어져갈 무렵, 결정적으로 나를 채팅방에서 내몰았던 사건이 발생했다.

"30만원 줄께"란 쪽지를 받았던 날의 충격..

대꾸하지 않는 내게 뒤이어 도착한 쪽지는 "50만원 줄께" 였고,

나는 즉각 그의 ID를 조회했다.

그는 비공개 대화방을 개설하고 혼자 들어앉아 있었다.

방제는 '돈이 너무 많아서 쓸 데가...'였고, 닉네임은 '러브호텔'이었다.


그때부터는 아는 사람들과만 채팅을 했다. 그러나 점점 무의미한 수다같다는 생각이 더해졌고,

공통된 관심과 취미를 가진 사람들을 찾아 자연스럽게 활동무대를 까페로 옮겼다.

거기서도 역시 밤마다 열리던 채팅방에서 즐거운 대화 삼매경에 빠졌던 건 당연. ^^;


15년만에 다시 밤마다 채팅을 한다.

이번엔 대화상대가 나보다 한참 어린 남성, 

바로 내 큰 조카다.

조카는  사람잡는 선행학습 위주의 입시학원에는 다니지 않는다.

친구들이 국영수학원으로 몰려갈 때, 그는 사뿐히 기타학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나는 조카와 영어책 한 권을 사서 매일 두 쪽씩 읽고 있다.

나름 쉬운 책을 골라 같이 해석해가며 틀린 부분은 고쳐주며 대화한다.

이건 꼭 공부 때문에 하는 건 아니다.

영어를 너무 공부처럼 배우는 건 질색이니까.

다른 나라 말을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물론 내 직업이 영어선생님은 아니니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얼마나 조카를 사랑하는지를 느끼게 해주고 싶다.

다행스럽게도 조카는 이모들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고 있다.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우수한 성적표가 아니라 너의 행복이라는 걸 얘기해줬다.

그가 모쪼록 즐겁고 행복한 사춘기를 보냈으면 하는 바람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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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2-03-20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사한 이모에게 추천을!

rosa 2012-03-20 12:02   좋아요 0 | URL
히히 감사합니다.^^

2012-03-20 1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20 1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2-03-20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채팅방 참 잼나잖아요..... ^^
그런데 정말, 멋진 이모시네요,, 조선인님의 댓글에 완전 동의를 표합니다!

rosa 2012-03-20 14:06   좋아요 0 | URL
맨 처음 채팅하면서 젤 신났던 게, 실시간으로 전국의 날씨를 알 수 있다는 거였습니다.^^ 부산은 구름 한 점 없는데, 강원도에서는 비가 내린다 하고, 서울은 흐리다 하고... 이런 식의 날씨 얘기조차 재밌던 기억.^^
그저 좋은 이모가 되려는 몸부림이지요.^^

머큐리 2012-03-20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채팅... 좋아요...ㅎㅎ

rosa 2012-03-20 17:51   좋아요 0 | URL
흐흐.. 저도 좋아합니다, 이런 채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