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담유 > 돌아온 탕아를 위해 씌어진 20세기의 위대한 비가

 

'순간'에 사로잡힌 사람. 착란도 하나의 사실을 알게 되면서 '찰나'에 미혹되어버린 사람. 찰나에 미혹되면서 서사가 지워져버린 사람. 그래서 매순간 불안한 사람. 그런 사람에게 《말테의 수기》를 권하고 싶다. 말테가 고백한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고 싶다. "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모든 것이 내 안 깊숙이 들어와서, 여느 때 같으면 끝이었던 곳에 머물지 않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지금까지는 모르고 있었던 내면을 지금 나는 가지고 있다. 이제 모든 것이 그 속으로 들어간다.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나는 모른다."


보는 법을 새로 배울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남겨진 삶이란 단절과 분열, 몰락의 형식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러나 시간을 건너뛰는 법을 알아차린 사람만이 추억과 미래를 교통시키며 현실을 재창조해나갈 수 있다. 릴케는 바라보는 것만이, 정면을 응시하고 그 너머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만이 시간을 건너뛸 수 있는―도처에 무수히 널린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충실한 길이라고 오늘 우리에게 전한다.



도시의 한켠에서 죽음을 맞닥뜨리다


스물여덟 살의 덴마크 시골 청년 말테가 대도시 파리에 도착한 지 3주가 흘렀다. 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오는 도시. 그러나 실상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도시. 그는 떠나온 사람들에게 이곳의 소식을 전하고 싶다. 편지를 쓰려고 책상 앞에 앉는다. 그러나 도시에서 보낸 3주가 마치 몇 년은 지나가버린 듯한 부피감으로 다가온다. 그는 변해버린 것이다. 그가 변해버렸다면 이제 그가 알고 있었던 사람은 낯선 타인이나 다름없다. 타인에게 편지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말테는 이제 누구에게 편지를 써야 할까.


그는 시간을 건너뛸 수밖에 없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게 말을 건다. 내면에게 말을 거는 행위는 추억을 호출하는 일과 같다. 죽음을 맞닥뜨린 도시에서 그는 그의 기억 속 미답지로 남아 있는 여러 죽음의 얼굴을 호출한다. 그의 고향에서는 죽음이 병원 영안실에서 대량 생산되는 죽음과 달랐다. 거기에서는 죽음이 옷을 입고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 시종관 브리게는 두 달 동안 요란하게 죽어갔다. 유서 깊은 저택, 이 방 저 방 옮겨 다니며 사람들에게 웃어라, 이야기하라, 유희하라, 조용히 하라고 요구하고 때로는 호령하면서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힘든 죽음을 받아들였다. 말테에게 할아버지의 죽음은 삶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적어도 도시에 속해 있기 전까지 말테에게 죽음은 누구에게나 고유한 삶의 한 형식이었다. "남자들은 갑옷 깊숙이 죽음을 지니고 있었"고 "아주 늙어서 자그맣게 오그라든 여자들은 무대처럼 엄청나게 큰 침대에 누워 모든 가족과 하인과 개가 지켜보는 앞에서 분별 있고 주인다운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그들은 '죽어갔고' 말테의 집안은 몰락했다. 그는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으며, 이제 그의 유년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말테는 그들을 다시 삶 속으로 불러들이는 방법을 이곳, 죽음이 도처에 널린 도시에서 알아차린다.



쓰지 않으면 안 된다


파리의 허름한 여관방, 밤마다 불을 밝히고 글을 쓰는 예술가 말테. 보는 법을 새로이 배우고 있는 그는 두려움과 공포에 맞서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먼 길을 걸어온 것처럼 피곤을 느끼는 그는 이제 아는 사람도 없고 가진 것도 없다. 집도, 물려받은 물건도, 개도 없는 삶에 몸서리가 처진다. 추억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탄식만이 그의 친구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다. 그의 유년은 추억 속에 있고 추억은 땅 속에 묻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 모든 추억에 다시 다다르기 위해서는 나이를 먹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나이 먹는 일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시를 쓰는 행위는 그에게 나이를 먹는 일과 같다. 시는 그에게 감정이 아니라 경험이기 때문이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 평생을, 가능하다면 오래 살아서 삶의 의미와 달콤함을 모아야 한다. 그러나 추억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추억이 많아지면 그것을 잊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추억이 다시 솟아오르기를 기다려야 한다. "추억이 우리 몸 속에서 피가 되고 눈짓이 되고 몸짓이 되어 이름을 잃어버리고, 우리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게 될 때에 비로소 아주 드물게 그 추억의 한가운데에서 시의 첫 단어가 솟아올라 걸어나오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작은 방에 앉아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테는 생각하고 있다. 수많은 진보와 발명,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표면에만 머물러 있는 인간 삶의 본질을 바라보기 위해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는, 그것만이 그의 마지막이 되리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고독과 불안과 공포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정면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일 뿐.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말테에게 현실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맞섬을 뜻한다.



돌아온 탕아, 그리고 사랑


현실에 맞서는 이는 한번쯤 현실에서 튕겨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한번쯤 튕겨나갔다 돌아와야만 한다. 그래야만 현실을 직시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사랑받기를 기대하는 이는 현실의 편안한 품속에서 정체되기를 바라는 이와 같다. 그때의 사랑은 반쪽짜리, 불구의 그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소유하지 않는 사랑, 사랑 받기를 바라지 않는 그것이다. 아낌없이 주는 어머니의 사랑이, 조건 없이 기다리는 여인의 사랑이 그 어떤 사랑보다 위대한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집을 떠나 먼 길을 헤매던 탕아가 어느 날 불현듯 집으로 돌아와 집안 식구들의 발밑에 몸을 던진다. 그것은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일까, 사랑해주지 말기를 간청하는 몸짓일까. 분명한 것은 그는 이제 사랑하기에는 몹시 어려운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는 신만이 그를 사랑할 수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신은 아직 그를 사랑하려 하지 않는다. 이로써 비극이 시작된다. 그러나 사랑받기를 원하지 않는 자는 그 비극을 넘어설 수 있다. "사랑받는 것은 불타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마르지 않는 기름으로 타오르며 빛을 내는 것이다. 사랑받는 것은 무상하지만, 사랑하는 것은 영원하다."


돌아온 탕아, 그가 곧 말테이고 릴케이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그들만이 인간 실존의 비극을 끌어안을 수 있다. 순간순간에 깃들이는 사랑을 몸소 실천할 수 있는 그들만이 바로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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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유 2004-10-16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착란도 하나의 사실을 알게 되면서-->착란도 하나의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빠진 구절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들렀습니다. 라일릭와인이라는 아호 혹은 구절을 어디선가 본 듯싶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그래서 기다리는 중이랍니다, 기억을...:)

에레혼 2004-10-16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후님의 리뷰 덕분에 오늘 책장에서 다시 <말테의 수기>를 꺼내 뒤적거려 봅니다. 몇 군데 밑줄 친 부분이 이 글과 겹쳐져 있더군요......

라일락와인에 대한 기시감 혹은 희미한 흔적이라...... 같은 제목의 노래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면, 그 기억의 실마리를 제게도 슬쩍 던져 주시기를...... 어느 길 모퉁이 또는 좁은 골목에서의 흔적인지 저도 궁금하네요
 

 잡담 개명. 추천: 0 I 2004-10-15 01:36

개이름...이 아니고... 닉을 바꿨다.

로드무비님과 라일락와인님 닉넴이 내 닉넴에 비해 압도적으로 멋있어보여서...

그 이름들과 공통점이 있는 이름으로 바꿨다. 짜잔~~

마이페이퍼 링크 주소 : http://www.aladin.co.kr/foryou/mypaper/551614
     
라일락와인(mail) 2004-10-15 08:36
정말 베리 스트롱한 이름이군요!!
개명[개 이름이 아닌!^^]을 축하 드려요!
이제 딸기도 아니고, 스트로베리도 아니고, 딸기밭도 아니고, 스트로베리 필드도 아닌, 삐삐롱스타킹을 닮은 스트롱베리님!

우리, '로라리' 모임이라도 하나 결성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로'드무비 - '라'일락와인 - 스트롱베'리'] ㅎㅎㅎ
아님 두음법칙을 적용시켜 '니나노' 모임으로 하든가요
아 좋다, 멋지다!

 

 

오늘 아침 딸기님, 아니 '스트롱베리'님 방에서 나눈 재밌는 잡담 한 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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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15 16: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레혼 2004-10-15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귓속말 시스템은 왜 발신자만 가능한 거죠? 수신자도 귓속말로 응답하고 싶을 때가 있는데......


어쨌든 ****님, 미워할래요!
흥, 저의 오토바이 배달 실력을 못 믿으시는 거죠?
재색 겸비한(!!) 저를 받아들이기가 그리도 부담스러우셨나요?
님 만나러 간다고 야사시한 스카프도 골라 놨더니만..... ;;;;

 

 

나의 콩나물 다듬기

성 미 정

 

나는 콩나물 다듬는 일을 좋아한다

어디서든 이 일만은 내가 독차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대가리에 붙은 껍질을 벗겨내고

잔뿌리를 다듬는 게 고작인 이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단순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콩나물 다듬기가 좋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이 일을

내가 좋아한다는 게 좋고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이 일이

내게도 잘 맞는다는 게

때론 안심이 될 정도다

그러니까 콩나물 다듬기는 매우 단순하지만

이 일을 즐기는 나의 심리는

결코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콩나물을 다듬어야

나의 콩나물 다듬기도

남의 콩나물 다듬기처럼 될 수 있을까

아무래도 당분간 콩나물 다듬기는

내가 독차지해야 할 것 같다

-- 성미정 시집 <사랑은 야채 같은 것>( 민음사)

 

 

 

 

 

 

 

 

 

 

 

 

콩나물 다듬기와 같은 일상의 표나지 않는 노고들이 있다

누군가가 움직여 주지 않으면, 수고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 일상의 부분들...

나의 시월은 그런 시간들에 보내지고 있다

이 시간들이 無用하다고 느끼지 않기를 바란다

빨래를 개키면서, 걸레를 빨면서, 마루를 닦으면서, 냉장고 안의 시든 야채를 버리면서,  

락스 푼 물로 화장실을 청소하면서.....

투명한 바람처럼 나를 스쳐 지나가는  시간의 깃털을 느낀다 

문득 <천국보다 낯선>의 그녀처럼 커다란 사각 트렁크를 들고 먼 길을 떠나고 싶어지는 마음을

'나의 콩나물'을 다듬으며 애써 붙들어 앉힌다

창 밖으로 오늘 몫의 가을 햇살이 환하고 쓸쓸하게 저물어 간다

 

"그러니까 콩나물 다듬기는 매우 단순하지만

이 일을 즐기는 나의 심리는

결코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천국보다 낯선 (Stranger Than Paradise, 1984)

Directed by Jim Jarmus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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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10-14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콩나물에 그런 심오함이 있었다니...

내가없는 이 안 2004-10-14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콩나물을 다듬는 것과 같은 일이 사실 에너지를 많이 빼앗아요. 힘들어서라기보다는 열정을 조금씩 긁어내는 느낌이거든요. 그래서 손을 놀릴 때마다 하기 싫다는 생각이 늘 불쑥불쑥 들곤 했는데... 어차피 해야 할 일이면 마음이라도 고쳐먹자고 새삼 다질 때도 있죠. 음악이라도 들으면서, 딴 생각이라도 뭉개뭉개 하면서... ^^ 라일락와인님, 아직 하실 일 많이 남았죠? 힘내시얍!

에레혼 2004-10-14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의 표정이 더 심오합니다...

에레혼 2004-10-14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새 이 안님이 다녀가셨군요[전화 한 통 받고 오는 사이...]
어떤 결과, 그럴듯한 성과를 낳는 것보다도 지금 이 순간에 몰두해서 이 순간 자체를 온전히 느끼고 즐기는 게 '잘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런 삶을 살기란 참 어렵고도 오묘한 경지인 것 같아요.
자꾸 잊어버리곤 해서 자주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과 암시가 필요해요..... 잡생각 없이 차분한 손길로 정성스레 콩나물을 다듬으려면요......

선인장 2004-10-14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일매일 손이 가는 일들, 누군가 하지 않으면 표가 나지만 누군가 하고 나면 표도 나지 않는 일들, 가끔 그런 일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이렇게 님의 글을 읽는 순간처럼요... 그럴싸한 말들을 늘어놓고, 나는 일상에 채이며 살지 않을 꺼라고 장담하지만, 그런 장담조차 일상의 단단함을 꾸리는 누군가의 손길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가끔은 잊고 살아요. 차분하게 콩나물을 다듬는 님의 손길이 그런 걸 깨닫게 해 주지요...

hanicare 2004-10-15 0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구처녀의 고독은 둥글다였나요. 그녀의 시. 참 탱글탱글했다는 기억.

로드무비 2004-10-15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미정 시인의 이 시보다 라일락와인님의 글이 더 한 편의 시 같군요.
천국보다 낯선, 퍼갑니다.
여름옷 넣고 가을겨울옷 정리해야 하는데...
별것도 아닌 일이 엄두가 안 나네요.

에레혼 2004-10-15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계절이 바뀔 때 옷 정리하는 일... 그게 때마다 왜 그리도 엄두가 안 나서 생각이 나고도 며칠씩 미루고 미루다가 기온이 뚝 떨어지거나 수은주가 쑥 올라가야 쫓기듯 하게 되는지... 또 막상 시작하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는데 말이지요......

로드무비님, 님은 일찌감치 제가 쳐놓은 덫에 걸린 겁니다, 제 사탕발림에 넘어가 어느새 그 마수(?)에 길들여진 탓이지요, 시인의 '진짜' 시보다 제 끄적거림이 더 시 같다니요....[그래도 기분은 좋은걸요! 앞으로도 사탕 많이 준비해 놔야지...ㅋㅋㅋ]

에레혼 2004-10-15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위의 두 분 답글을 건너뛰다니, 이런...[영업 관리를 이렇게 해서야^^]

선인장님, 님은 일찌감치 목도리 챙겨 두셨군요. 바람이 갑자기 차가워졌지요?
선인장님은 일상도, 몽상도, 원대한 꿈도 모두모두 자기의 몫으로 다스리고 잘 가꿔 가고 있잖아요.... 난 님처럼 '혼자만의 일상'을 스스로 책임지며 살아가는 獨身의 시간을 잘 지내는 사람들이 부러워요. 나에겐 그런 시절이 없었어요......
혼자 살든, 가족 속에서 부대끼며 살든, 자기만의 '콩나물 다듬기'는 다 있는 거겠지요?

하니케어님, 그런 제목의 시가 있었나요? 궁금해서 검색해 보았더니 나타나는 다른 시 한 편... 이 시인은 생활 속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 재능이 있나 봐요, 겉멋을 부리지 않고 어깨에 힘을 뺀 어조라 쉽게 읽히면서 속이 개운해지는, 국물 뽀얀 설렁탕 같은 시......


 

 

 

 

 

 

 

 

 

 

눈물은 뼛속에 있다는 생각  / 성미정

                       

곰국을 끓이다 보면 더 이상 우려낼 게 없을 때

맑은 물이 우러나온다 그걸 보면

눈물은 뼛속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뽀얀 국물 다 우려내야 나오는

마시면 속이 개운해지는 저 눈물이

진짜 진주라는 생각이 든다

뼈에 숭숭 뚫린 구멍은

진주가 박혀 있던 자리라는 생각도

짠맛도 단맛도 나지 않고

시고 떫지도 않은 물 같은 저 눈물을 보면

눈물은 뼛속에 있다는 생각

나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

뭔가 시원하게 울어내지 않았다는 생각

이 뽀얗게 우러나온다.

 


hanicare 2004-10-15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구처녀의 고독은 둥글다 - 성미정

처음에 너는 고독은 날카로운 그 어떤 거라고 짐작했다 고독 때문에 자주 명치끝이 아팠다 너로선 그럴 만도 했다 나이와 더불어 너는 통증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통증을 감추기는 쉽지 않았다 친구들과 있을 때 넌 너무 말을 많이 하거나 아예 하지 않았다 고독이 드러나는 게 싫었던 거다 친구들은 그런 너를 떠났다 가족들은 너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탄식했다 고독은 자주 너의 귀를 막았다
고독에 잠긴 널 불편해 하지 않는 건 TV뿐이었다 방에 틀어 박혀 TV와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어느 날 방망이에 맞고 혼자 날아가는 공을 보았다 하얗게 질린 채 공기 속을 회전하는 공에서 넌 터질 듯한 외로움을 느꼈다 두터운 장갑 안으로 숨어 드는 공에선 감출 수 없는 두려움을 만났다 그런 게 야구라고 불린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넌 왠지 고독이라 부르고 싶었다 야구는 고독이라 불리는 편이 어울린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간 너는 야구 중계를 보는 가족들을 보았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야구광인 듯했다 지금껏 눈치채지 못한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공통관심사를 발견한 넌 몹시 기뻤다 가족들 틈에 슬쩍 끼어들어 야구 얘기를 했다 네가 가장 아끼는 고독은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날아간 공이라고 고백했다 그 공이 그렇게 사라진 건 그만큼 고독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가족들은 사라진 공의 행방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오직 눈앞의 공만 바라보았다 가족들은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다
넌 한동안 연락이 끊긴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구에 대해 말했다 친구들의 태도는 가족들과 다를 게 없었다 어떤 친구는 숫제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은 그건 야구가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자신이 본 야구에 대해 떠들었다 너는 그들이 말하는 야구를 본 적이 없었다 넌 친구들을 떠났다 하지만 인정해야 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야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야구에 잠겨 있을 뿐이라는 것도 이제 너는 고독이 둥글다고 생각한다 이후 고독은 너에게 더 이상 통증을 주지 않을 것이다 다만 끝도 시작도 알 수 없는 둥근 공처럼 지루할 것이다
-옛날에 세계사에서 대머리와의 사랑이란 시집을 냈지요. 참 드물고 숨가쁜 개성이어서 기억에 남았는데 올리신 시를 보니 이 사람도 각이 많이 깎였나봐요. 생활이란 게 뭔지.

에레혼 2004-10-15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각이요, 각!
그게 또 참...... 세월의 흐름에 맨질맨질하고 따뜻한 돌멩이처럼 각이 좀 깎이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기는 한데, 그래도 제 나름의 각을 세워 줘야 하는 때가 있단 말이지요.... 각이 있어야 스타일이라는 게 나오는 거 아니겠어요? 한때 어깨에 뽕을 넣던 유행도 다 그 '각을 통한 스타일'을 위한 것이었지요.

제가 올린 성미정의 시와 '야구 처녀...'를 한데 놓고 읽어 보니, 하니님의 지적처럼 너무 편안하고 각이 깎인 느낌이 들기는 하네요.
이런 눈썰미를 보면 하니케어님은 아직 각이 날카롭고 생생하게 살아 있단 말씀!
 

 

 

 

 

 

 

 

 

 

 

 

 

어제 이사를 했습니다

한 집에서 짐을 싸서 또 다른 한 집으로 옮겨 풀어놓기까지,

모두 14시간이 걸린 장정이었지요

[그나마 포장 이사를 했으니 그 정도이지, 저나 식구들끼리 했다면 한 달 보름쯤 걸렸을지 모를 일...]

 

집을 옮긴다는 것, 居處를 바꾼다는 것

 '이사'라는 그 과정에서만 만날 수 있는 독특한  순간들이 있어요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구나를  환한 햇빛 속에 드러나는 먼지의 형체와 존재처럼 명징하게 보여주는 순간들.....

내가 이런 거 하나 못 버리는 사람이구나,

아, 그동안 이런 건 처박아두고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았구나,

맞아, 그때 이런 사진을 찍었었지,

이 책을 읽던 시절의 나.... 그땐 그런 생각을 했었지.......

이 공간에서 보냈던 시간들 속에 내가 흘렸던 눈물과 웃음들, 그 시간 동안 만나고 헤어졌던 사람들에 대한 조각난 기억들....

그런 순간을, 그런 흩어지는 구름같은 느낌들을 기록해 두고 싶었는데,

마음처럼 잘 되질 않았어요 

아직 길들지 않은, 정들지 않은 공간에서의 시간들이라도 잡아 보고 싶습니다

 

방금 인터넷 연결이 돼서, 그 기념으로(!)  짧게 적어봅니다.

 



 

 

 

 

 

 

 

 

 

짐을 옮겨오기  전 빈 집의 기록....

이제 이 공간에 나는 무엇을 적어넣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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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0-13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 보내는 우정의 엽신들로 채워 주세요.^^
(반가워서 한달음에 달려왔어요.헥헥)
라일락와인님, 수고 많으셨어요. 몸살은 안 나셨어요?

2004-10-13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쓰셨어요.. 뒷 마무리 잘 하시고, 이사한 집에서의 생활이 빨리 안정되길 바랄게요..아자~!

urblue 2004-10-13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하고 나면 정말 몸살 나잖아요.
정리할 게 더 눈에 띄더라도 좀 덮어두고 쉬세요.

내가없는 이 안 2004-10-13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 연결이 무척 빠르네요. 그렇지 않아도 화요일에 이사하신다는 게 어제 생각나
라일락와인님 오시려면 시간 좀 걸리겠다, 하고 있었는데... 너무 반가워요!
집이 너무 훤해요. 저 고운 무늬는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혹 벽지? ^^
집이 정리되면 살짝살짝 보여주실지? (무색하게 긁적긁적. ^^)

에레혼 2004-10-14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의 팬클럽 회원들이 다 모였군요[역시 회원들이란...!] ㅋㅋㅋ

로드무비님, 정말 빠른 속도로 달려오셨네요, 100미터 달리기가 10초 대?
어제는 제가 얼마나 약한 사람인지 절감하겠더라구요, 짐을 다 싸기도 전에 탈진 증세와 망연자실 상태에 돌입... 내가 이렇게 많은 허접한 것들을 지니고 살았단 말인가.... 이런 걸 다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나... 코펠 하나 버너 하나만 있어도 살 것 같았던 그 청춘의 할랑한 영혼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짐을 꾸리며 속으로 별 되잖은 푸념을 늘어놓았다지요, 그래도 어쨌든 시간은 가고,시간이 가니 그럭저럭 끝이 보이더군요
그나저나 앞으로 꼭 '우정의 엽신'이어야 할까요? 핑크빛 아니면 보랏빛 '연애 편지'는 안 될까요, 로드무비님?

참나님, 오랜만에(!) 들르셨네요, 정리는 천천히, 느긋하게, 일상을 즐기면서 하려구요, 뭐 빨리 정리하고 검사받고 '참 잘했어요' 스티커 받을 것도 아니니까요, 쉬엄쉬엄, 놀면서, 즐기면서, 천천히, 아자!

유아블루님, 제가 몸살 같은 것 하기에는 몸이 좀 튼튼한가 봅니다, 어제는 좀 기진맥진했는데 한 밤 자고 일어났더니 그새 몸이 거뜬하네요! 그래도 '쉬어가며 하라'고 응원(?)해 줘서 고마워요!

이 안님, 제 이사 날짜까지 기억해 주시고....... 고맙습니다! 이렇게 이틀만에(!) 다시 만나니 저도 너무 반가워요!!!
원래 계획에는 없었지만, "이사-- 비포어 앤 애프터"를 함 기획해 볼까 구상중이에요^^
[저 꽃무늬는 너무 차분하게 가라앉은 집안 분위기에 작은 변화를 줘볼까 싶어 현관에서 들어오면 마주보이는 쪽 작은 벽면에만 바른 벽지랍니다, 좀 과감했나 싶지만 나름대로 활기있어 보이고 그래서 마음에 듭니다.]

선인장 2004-10-13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비포 앤 애프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철 들고 나서 이사를 하두 많이 다닌 통에, 전 무슨 이사가 이벤트 같아요. 가끔 가구의 위치를 바꾸거나 책장의 책들을 모조리 꺼내 재정리를 하거나, 그래도 지루하다고? 그럼 집이나 한 번 옮겨볼까? 그래도 고단한 건 여전하지요. 팔, 다리, 어깨, 주물러줘야 되는데....

에레혼 2004-10-14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를 심심하면 한번씩 하는 이벤트쯤으로 생각하신다구요? 아, 대단하십니다, 선인장님......
아무리 그래도 이사가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닐 터! 일단 마음에 맞는 적당한 이주처를 구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처음엔 좀 막막한 심정이 들지 않나요? 그래도 자주 집(방)을 옮겨 주면 구질구질한 것들이 쌓이지는 않겠지요...... 저는 이번에 몇 년 만에 대청소 함 했습니다, 결국 100리터짜리 쓰레기 봉투로 들어간 것들.... 그것들을 구석구석 쌓아두고 쑤셔박아넣고 잊어버리고 살았구나 싶더라구요.

이참에 이사에 관한 생각 부스러기, 몇 개 더 적어 보려구요......

플레져 2004-10-14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팬클럽 회원에 지각했지만, 그래도 저를 빠뜨리시면 안되요! ^^
요새 놀러다니느라고...^^:;
꽃무늬 벽지가 무척 마음에 듭니다.
요샌 인테리어 할 때 한 면은 다른 벽지로 채운다는데...역쉬, 와인님은 ~~!!

에레혼 2004-10-14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럼요, 플레져님이야 일찌감치 제 회원 명부에 올려져 있지요^^
좋은 데 놀러도 다니고, 바지런히 페이퍼도 올리고, 살림도 이쁘게 하는... 에너지가 충천한 플레져님

나는 요즘 복고 무드에 젖어서, 꽃무늬 벽지에 쟈카드 커튼에, 폭넓은 통바지에, 옛날 노래들을 듣고 있어요.... 아, 역시 고전이 좋아요!

코코죠 2004-10-15 0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저도 팬클럽 회원;;;

이사를 축하드려요, 오오, 이젠 맨날맨날 아주 자주 뵐 수 있는 거겠죠(라고 강하게 협박하는 오즈마)

에레혼 2004-10-15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회원 수첩 안 드렸던가요, 오즈마님 ㅎㅎㅎ
저의 청*에 빠른 응답을 기다리고 있겠어요옷![라고 강하게 어필하는 라일락와인]
 

 

중 독

 이 장 욱


오늘은 어제의 거리를 다시 걷는 오후. 현대백화점 너머로 일몰. 이건
거의 중독이야. 하지만 어제는 또 머나먼 일몰의 해변을 거닐었지.

 

이제 삼차원은 지겨워. 그러니까 깊이가 있다는 거 말야. 나를 잘 펴서
어딘가 책갈피에 꽂아줘. 조용한 평면, 훗날 너는 나를 기준으로 오래
된 책의 페이지를 펴고. 또 아무런 깊이가 없는 해변을 거니는 거야.

 

완전한 평면의 바다. 그때 바다를 바라보는 너로부터 검은 연필로 긴
선을 그으면, 어디선가 점에 닿는 것. 그 점을 섬이라고 하자. 그리고
그 섬에서 꿈 없는 잠을. 너는 나를 접어 종이비행기를, 나를 접어 종
이배를, 나를 접어 쉽게 구겨지는 학을.

 

조용한 평면처럼 어떤 내부도 지니지 않는 것들과 함께. 그러므로 모
든 것이 어긋나 버렸는지도 모르지. 서서히 늪에 잠겨가는 사람처럼,
현대백화점 너머로 일몰. 일몰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백화점 옥상에
서, 지금 막 우울한 자세로 이륙하는 종이비행기.

 


 

 

 

 

 

 

 

 

 

 

 

 

 

 

 

 

 

 

 

 

 

 

 

The Czars / Dr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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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물고기 2004-10-11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일락님이 올려주시는 음악의 거개가 제가 즐겨 듣는 것이에요(혹시 내가 아닐까..)

에레혼 2004-10-11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아마도......

그때 바다를 바라보는 너로부터 검은 연필로 긴 선을 그으면, 어디선가 점에 닿는 것. 그 점을 섬이라고 하자.

선인장 2004-10-11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둘이 동일인물이었구나.... 이런 식으로 위장해봐야 소용없어요!!!

선인장 2004-10-11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였으니, 아무래도...

에레혼 2004-10-11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안해요, 선인장님! 나와 동일시된 마녀물고기님에게도....
그림을 지워 버렸어요..... 여긴 '19禁'이 안 되네요... 난 또 '금지'나 '금기'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그런 걸 싫어하고 해서..... 그랬더니 선인장님 댓글만 달랑 남게 돼버렸네요

이미 감상하신 분들께도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마녀물고기 2004-10-12 0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싶어요, 보고싶어요, 뭐죠? 게을러서 섹스 이즈 코미디도 못 봤는데.. 너무해..

선인장 2004-10-12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녀님, 원래 부지런한 사람만이 그런 것을 볼 수 있답니다. 라일락와인님 그쵸? 근데 알라딘은 그런 거 안 되는건가? 표현을 자유를 위하여, 뭔가 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