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가게
장 퇼레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림원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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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하면 자살하지 말자!*


  이 책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온갖 그로테스크한 살풍경이 독가스처럼 꿈틀댈 것이라 상상했다. 왜 그렇지 않았겠는가.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데 말이다. 자살가게는 사람의 무게를 충분히 감당할 만한, 그래서 목매달아 죽기에 더없이 안성맞춤인 수공품 밧줄과 독사탕과 할복자살하기에 알맞은 단도와 의식(할복자살)을 치를 때 입을 기모노와 만지거나 흡입하거나 삼키거나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안전하게 자살에 이르게 해 줄 ‘모래상인’이라 불리는 칵테일 등, 별의별 기발한 자살 도구들을 판매한다. 자살가게답게 쇼핑백에는 “실패한 삶을 사셨습니까? 저희 가게로 오십시오. 당신의 죽음만큼은 성공을 보장해드리겠습니다!”란 문구도 새겨져 있다.


  맏이인 ‘뱅상’은 깡마른 선병질적인 외모에 음식을 혐오하고, 가히 테러 수준이라 해도 무방할 ‘자살 테마파크 모형물’ 만드는 데 열중해 있다. 둘째인 마릴린 또한 비정상적이긴 마찬가지다(물론 이 ‘자살가게’에서는 너무나 정상적이지만). 자신을 못 생기고 뚱뚱하다고 생각하는 마릴린은 “사는 게 지겨워”란 문구가 새겨진 셔츠를 입고 다닌다. 튀바슈 부부는 툭하면 푸념이나 하고 게을러터지고 만사를 비관적으로만 바라보는 아이들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들의 굿 나잇 인사는 “악몽이나 꿔요”이고, 침대 머리맡에서 들려주는 것은 역사적으로 성공한 자살자들의 이야기이다. 십 대에 걸쳐 자살과 관련한, 명실공히 성공한 가문에도 골칫거리는 있었으니 바로 막내아들 ‘알랑’이다. 절대 웃지 않는 이 가문에 유모차에 들어가 앉았을 나이부터 방싯거리며 웃고 있는 괴물이 태어난 것이다! 더구나 그 아이의 머리카락은 밀밭처럼 금빛으로 하늘거리지 않는가!


  이 비정상적인 아이 알랑이(알랑은 저주 받은 시대의 메시아다), 대대로 너무도 모범적이고 상식적이며 제대로 정상적인 가문에 혼란을 가져온다. 어떤 방향으로 변화가 진행될지, 너무도 선명하게 예측 가능하며 이야기는 예측한 대로 진행된다. 그렇더라도 마지막 한 문장은, 누구라도, 절대, 예측 불가능할 것이다. 뒤통수 제대로 맞은 기분이다. 마지막 문장에서 잠깐 주의하자. 홀연히 우수에 찬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정말 제대로 만들어진 블랙코미디다. 작가의 상상력에 이마를 치고 웃고 나면 혓바닥에 쓴물 고이는 순간이 찾아온다. 삶과 죽음, 허무, 부조리와 횡포를 역설과 풍자의 가면 속에 꼭꼭 숨겨둔 탓이다. 게다가 마지막까지 이 작자, 독자를 갖고 논다. 정말 끝까지, 허를 찌른다. 마지막 문장 때문이라도 이 소설을 읽을 이유는 충분하다.     

 

* 옮긴이의 글 제목에서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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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8-02-24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이렇게 말씀하시니 책 사자마자 마지막 페이지를 먼저 들춰보고 싶어질 거 같아서, 읽지말까 읽을까 고민 된단 말입니다.

마녀물고기 2008-02-26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대 참으셔야 할 텐데... 딱, 마지막 한 문장인데... 크
 
장엄호텔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구판) 5
마리 르도네 지음, 이재룡 옮김 / 열림원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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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은 흐리고, 나는 커피에 보드카를 몇 방울 떨어뜨린다. 오른쪽 엄지손가락에서 시작된 통증이 어깨와 목에까지 이르렀다. 마우스를 쥐고 있는 손은 언제나 긴장한다. 힘이 들어가고, 그것이 통증을 유발한다. 긴장을 눈치 채는 건 통증이다. 통증 때문에 힘을 푼다. 하지만 잠깐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른 팔의 근육들이 또다시 잔뜩 긴장해 있다.  ‘장엄호텔’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세 자매의 불온하고 불안한 일상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곳은 유폐로부터 멀지 않다. 봄은, 영원히 당도하지 않을 것만 같다.

  장엄호텔은 늪지에 세워졌다. 늪은 흡반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저 자신이 거대한 흡반이다. 늪이 빨아들이는 건 ‘장엄호텔’이라 명명된 세 자매의 삶이다. 세 자매는 서서히 부식하고(배관 파이프에 녹이 스는 것처럼) 무너지고(대들보가 붕괴된 것처럼) 침수하고(물에 잠긴 할머니의 묘지처럼) 출구를 잃고(변기가 막히는 것처럼) 사회적 관계로 인해 상처 입는다(쥐와 온갖 해충 떼로부터 공격당하는 호텔처럼). 서로의 관계 또한 부조리하다. 배타와 질시, 험구와 야유, 명령과 굴종을 향해 침몰해 간다. 게다가 류머티즘, 근육함몰증, 혈행장애 등 육체의 질병에도 노출돼 있다.


  옮긴이(이재룡)는 “집, 피난처가 여성성의 상징이라는 바슐라르식 해석은 여기에서는 적절치 않을 것이다. 작가의 표현에 따르자면 이름도 나이도 없는 화자 - 주인공은 영원한 폐경기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호텔은 혈관이 막히고 근육이 허물어져 가는 부성, 혹은 남성의 상징. 네온사인만 남은 거대한 팔루스이며 그것을 삼키는 늪이 바로 여성이 아닐지”라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설득력 없는 말이다. 비평이 아닌 바에야 그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일일이 제시할 필요는 없었겠으나, 그 말을 뱉기까지의 소소한 배경조차 생략하고 게재한 의견은, 그 피상성으로 인해 의혹만 증폭시킬 뿐이다. 왜 그러한가. 집에 대한 바슐라르의 해석이 어째서 라캉으로 옮겨간단 말인가. 비약이 아닌가. 아니면 그것을 눈치조차 못 채는, 내 독법의 문제인가.


  호텔이 “네온사인만 남은 거대한 팔루스”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네온사인’은 그 자체로 거대한 팔루스가 아니던가. 『장엄호텔』에서 네온사인은 어둠 속의 여행객들에게 ‘장엄호텔’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등대로서의 역할을 담당한다. 네온사인은 세계를 향해 세 자매(좁게는 화자)가 드러내는 소통의 욕망이자 역으로 결핍을 가시화하는 하나의 장치일 것이다. 상징계로 편입하고자 하는, 결여가 지닌 욕망의 덩어리. 네온사인은 결국 빛을 상실하고 죽어버린다. 욕망이 지닌 ‘환상성’에 불과했던 것이다. 더구나 ‘장엄호텔’은 세 자매와 함께 동거동락하며 쇠락하는 존재가 아닌가. 다시 말해 『장엄호텔』은 여성성과 남성성의 대립이라기보다는 세계와 개인 간의, 욕망과 결핍 간의 불화, 불일치, 그 안에서 끊임없이 부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고립된 운명에 대한 서사로 읽힌다는 것이다. 늪은 개인이 세계로 나아갈 때 부딪힐 수밖에 없는 하나의 장애물일 것이다. 아니, 세계 자체일지도. 와중에 깨지고 멍들고 으깨지는, 류머티즘과 혈행장애와 근육함몰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 지닌 운명이다.


  하늘은 여전히 흐리고, 나는 또다시 커피에 보드카를 몇 방울 떨어뜨린다. 똑똑, 어디선가 물방울 듣는 소리가 들린다. 누수의 위험에 대한 경고인 것인가. 여전히 오른 쪽 근육은 긴장해 있다. 통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세계를 견디는 일은 이토록 고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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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클린느 뒤 프레 - 예술보다 긴 삶
캐럴 이스턴 지음, 윤미경 옮김 / 마티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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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가의 첼로협주곡으로 읽는 천재의 삶


Epilogue


  차곡차곡 쌓이던 빗줄기가 멈춤과 동시에 밤을 잡는 건 이미 가을이다. 열어둔 창틈으로 성마른 바람이 스민다. 쇄골이라도 만져질 듯 강파르고 괴괴하다. 알맞게 차고 알맞게 쓸쓸하고 또 알맞게 은밀하며 스스로 붕괴하는 가을. 가을은 그가 지니는 분위기의 낮음만큼이나 책 읽기에 좋은 계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책을 읽으면 숨이 막힌다. 스위스 작가 ‘알랭 드 보통’이 스물다섯의 나이에 썼다는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을 때에도, 스물세 살에 발표한 『일식』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히라노 게이치로’의 작품들을 일독할 때에도 그러했다. 젊은 그들이 향유하는 사유의 깊이와 치밀함과 해박한 지식이 ‘소설’이란 형태로 탄탄하게 구조화된 것에 대한 일종의 시기심이었을 테다.

  『오감도』의 작가 ‘이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상’의 작품들 거개가 너무 난해하여 읽기에 용이하지 않을 뿐더러,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평가만큼이나 그의 천재성에 대한 상이한 태도들로 인해 그는 내게 여전히 멀고 요원한 작가이지만 그를 향한 부러움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내게 있어, 이른바 ‘천재’라 불리는 사람들에 대한 ‘경외와 질시’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아이들처럼 한 몸을 이루고 있다 해도 좋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삶이 불운하고 절망적이었으며 때로 세인의 경멸을 감수해야 했고 제 아무리 요절을 했다 하더라도 내게 그들은 ‘행운아’ 외에 다름이 아니다. 이렇듯 감상성 짙은 부러움은 내 안의 ‘욕망’ 탓이겠다.



Ⅰ. Adagio - Moderato


  독서의 장점 중 하나는 그와 관련된 참고 서적이나 음악, 미술이나 건축 등 제 분야에 관한 폭 넓은 호기심과 경험을 유발한다는 데 있다. 『자클린느 뒤 프레 예술보다 긴 삶』을 읽으며 그녀의 연주 동영상을 찾아서 보고, 그녀가 가장 많이 연주했을 뿐만 아니라 명반으로 꼽히는 엘가의 첼로 협주곡이 담긴 CD를 구입해서 듣는 등의 행위는 따라서 아주 자연스럽다. 텍스트만으로는 그녀의 연주가 얼마나 감각적이고 열정적인지, 그 미소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그녀의 첼로가 이루어내는 미혹이 얼마나 광적인지에 대해 피상적으로 밖에는 알 도리가 없다.

  강가에 흐르는 버들잎처럼, 때로는 성난 파도의 포말처럼 기다란 금발을 휘날리며 연주하는 첼리스트 자클린느 뒤 프레, 음악에 문외한인 내게도 그 이름은 낯설지 않다. 아마도 연주자에게는 치명적이라 할 법한 ‘다발성 경화증’이란 희귀한 질병을 앓았다는 혹독함 때문일 것이다. 공식 데뷔 이후 십이 년간의 연주 활동과 마흔둘의 생애, 그 짧은 기간 동안 그녀가 이룬 성과는 ‘천재’라는 수식어가 아니고는 설명하기 곤란하다. 천재로 태어났고 천재로 키워졌으며 천재들의 전유물처럼 되어버린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그녀, 엘가의 첼로 협주곡 제 1악장 모데라토에는 그녀가 다발성 경화증을 앓는 동안 느꼈을 비애와 우수, 우울과 외로움의 정조들이 녹아있는 듯하다. 한없이 낮아졌다가 어느 순간 힘차게 솟구치는 현의 폭발, 그리고 또다시 길고 긴 여정처럼 느리게 이어지는 선율을 뒤로 한 채 광활한 대지 위로 몰아치는 바람처럼 육중한 클라이맥스들. 여러 가지 표정을 다채롭게 선보이는 1악장은 꼭 그녀, 자클린느 뒤 프레를 닮았다.

  병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복병처럼 살금살금 다가왔다. 피로, 감각 상실, 허약, 시력 변화 등에 이어 연주 도중 템포를 놓치는 일도 생겨났다. 자클린느를 비롯해 주위 사람들, 특히 남편 ‘다니엘 바렌보임’은 이를 가리켜 정신의 문제라 치부했다. 나태와 해이 때문이라고 말이다. 따라서 자클린느가 일주일에 5회씩 프로이트 학파의 정신분석가인 월터 조피에게 진찰을 받으러 다닌 것은 지극히 온당한 것처럼 여겨졌다. 남편에게 병의 증세들을 숨기고, 마침내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자 정신 장애가 아닌 것에 오히려 기뻐했다는 일화는 그녀의 행복과 친교가 얼마나 허위적이었는가를 말해주는 듯하다. 

  “연주는 삶의 방편 이상이고, 삶 그 자체”라고 말한 바 있는 자클린느에게 있어 더 이상 연주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절망적인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자클린느는 가족들에게서 위안을 받을 수 없었다. 진부한 말 같지만 가족은 모든 피로의 휴식처이며 안식의 근원이다. 그러나 전차의 맹렬함과 격정의 소유자인 바렌보임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부모들도 그녀에게 안락한 애정을 선사할 마음은 없었던 것 같다. 윌리엄 잉그레이가 자클린느의 가족들에 대해 “그녀와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라거나 “훈훈함이 없었”다거나, “그들 모두가 연기에 능숙했”다고 말한 것을 참조할 때, 그들의 능숙한 연기만큼이나 자클린느의 고립감과 상실의 부피는 컸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가장 친숙해야 할 이들의 외면을 감내하고, 정신과 의사와 간호사에게 자신의 정신과 육체 모두를 의탁할 수밖에 없었던 일상, 그 중점에 있는 것이 매력과 활기 넘치던 천재 자클린느 뒤 프레의 삶이다.  



Ⅱ. Lento - Allegro Molto


  사 분 삼십여 초의 이 짧은 악장은 격정과 서정을 아우르고 있다. 첼로의 레치타티보로 시작하는 열정은 수줍은 발랄함으로 이어지고 수줍음은 곧 광휘와 사랑의 충일함으로 채워진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연상케 하는, 더할 나위 없이 영국적인 자클린느가 바렌보임과 결혼하기 위해 유대교로 개종했을 때의 긴장과 흥분이 느껴지는 곡이다.

  바렌보임은 자클린느와 마찬가지로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으며 운동과 언어에 있어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는 자클린느와는 달리 논리적이고 분석적이었으며 장갑차와 같은 기세와 활력으로 빽빽한 연주 일정을 소화했다. 바쁜 와중에도 ‘바렌보임 일당(이작 펄만, 알프레드 브렌델, 핀커스 주커만,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등)’이라 불리는 이들과 만나 식사를 하고 실내악을 연주할 정도로 그는 대단한 정력가였다. 자클린느의 육체가 이상을 감지했을 때조차 그녀는 바렌보임을 향한 사랑으로 그의 일정에 맞춰 움직여야 했다. 자클린느의 피로와 근육의 경직이 바렌보임에게는 한낱 엄살이나 정신의 해이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위풍당당한 영국의 장미와 왜소한 이스라엘의 선인장은 외양으로는 가장 어울리지 않을 쌍으로 보였지만 그들의 차이점은 서로에 대한 애정을 더욱 공고히 할 뿐”이었으나 이는 자클린느의 건강이 악화되기 이전, 세간의 관심과 열광이 그들 부부를 향하고 있을 당시에 그치고 만다. “자클린느가 조페에게 의지할 때 다니엘은 친구들에게 눈길을 돌림으로써 가장 좋은 시절이라 해도 하기 어려운, 친밀감과 상처를 나누는 일을 차단시켰”던 것이다. 국경과 종교를 초월한 사랑이 한낱 질병에는 무참히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Ⅲ. Adagio


  자클린느 뒤 프레는 옥스퍼드 대학 교수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첼로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내고 싶다고 졸랐다는 사실은 자클린느와 첼로의 만남이 운명적이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신의 키보다 큰 첼로를 선물 받은 것은 네 살 때의 일이었으며 다섯 살이 되자 본격적으로 첼로를 공부한다. 카잘스와 토르틀리에, 그리고 로스트로포비치의 사사를 받았으나 자클린느에게 있어 평생에 걸쳐 가장 오래도록 사랑한 ‘첼로 아빠’는 윌리엄 플리스였다. 자클린느가 수지아 상의 기금을 받을 수 있도록 추천한 것도 플리스다.

  그러나 자클린느가 첼로와의 사랑을 본격적으로 키워나간 것의 반대급부도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자클린느 뒤 프레 예술보다 긴 삶』의 저자인 캐럴 이스턴은 “재키는 수지아 상을 계기로 또래의 친구들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멀어졌고 정상적인 어린시절 비슷한 것도 더 이상 가질 수 없었다. 아이들에게, 특히 사춘기에 이르는 아이들에게 ‘차이’란 모조리 파멸적”이라는 단언과 함께 “영재들도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우정이 필요하고 개인으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라고 말한다. 확실히 자클린느가 맺은 관계들은 하나의 ‘개인’으로서가 아닌 감탄의 대상으로서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자클린느의 학우였던 아드레아 배런은 “우리는 사실 그녀를 몰랐어요. 이어주는 끈이 없었으니까요. 그녀를 우리의 삶 속에 한번도 받아들인 적이 없는 셈이죠. 우리는 그녀가 자기 자리에 있도록 내버려 두었어요.”라고 말한다. 배런이 말한 “자기 자리”란 뛰어난 ‘첼리스트’란 명성일 것이다.

  자클린느의 유년을 기억하는 이들 거개가 그녀는 ‘충분히 행복해’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것이 자신의 뛰어난 재능과 찬사 속에 존재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행복은 ‘관계’ 안에서 싹트는 것이며 신실하고 온화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삶 속에 뛰어들고 받아들이는 행위가 수반되어야 한다. 자기 자리에 있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배려가 아니라 방치이다. 감탄스러우리만치 정돈되고 완벽하게 평화로워 보이는 가족들, 특히 어머니의 이미지는 자클린느 말년에 보였던 냉담함을 어느 정도 예고하고 있는 듯하다. 삶은 재단된 것도 아니고 계획되어 있는 것도 아닌 바, 서로 부대끼고 투덜대는 불협화음 없이 완전한 평화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클린느가 투병 중 왕왕 “어머니가 자신을 방에 가두고 연습을 하게 했다든지 부모님이 충격적일 정도로 자신을 심하게 다루었다든지”, 학창시절의 불행에 대해 토로했던 것은 “다른 아이들로부터의 고립은 후에 치명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자클린느의 외로움과 고통을 단적으로 반영한 예라 할 수 있다.

  엘가의 첼로 협주곡 제 3악장 아다지오는 전원에 내리는 석양처럼 낭만적이고 서정적이며 목가적이다. 음색은 풍요로우며 활은 느긋하고 애잔하게 첼로 현을 어루만진다. “악기를 연주하다보면 영혼이 몸 바깥으로 빠져나와 저 높은 곳의 자유롭고 행복한 황홀경 속으로 들어간다.”는 자클린느 자신의 말처럼, 보우잉을 하는 자클린느의 육체가 점점 투명해져 세계를 향해, 세계의 바깥을 향해 분사되고 있는 듯하다. 이름 모를 풀꽃들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전하고 있는 듯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마냥 투명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마냥 쾌청하고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내면의 고독과 우수를 함께 지닌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가장 사랑하는 첼로를 연주하면서 행복했던 반면, 첼로 때문에 포기하고 제외되어야만 했던 부분들로 인해 우울했던 그녀처럼 말이다.



Ⅳ. Allegro - Moderato - Allegro, ma non troppo


  “그녀는 연주회에 나가야 하고 그녀의 몸통에는 이 우스꽝스럽고 짜증나는 울 조끼가, 연주할 때 그녀의 우아한 가운 위로 땀이 흐르지 않도록 땀을 흡수할 수 있는 구멍을 낸 조끼가 꽉 달라붙어 있었지요. (중략) 아주 상징적이라는 생각이 순간 들었습니다. 옷을 한껏 차려입고 멋진 곡들을 연주하는데 옷 밑에는 이 낯익은 것이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한 인간임을 증명하듯 말이죠.”

  작곡가 알렉산더 괴르는 자클린느가 드레스 젖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안에 껴입는 남루한 조끼에 대해 이처럼 말한 바 있다.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스마일리”한 천재 첼리스트도 땀이 흐르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라고 말이다. 사람들은 간혹 ‘보여지는’ 모습에 더해 자신이 ‘보고자 하는’ 모습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 자클린느의 고립감과 우울은 많은 부분 사람들의 이러한 습성 탓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많은 이들의 찬사와 상찬의 뒤에 한 인간으로서 느껴야만 하는 고독과 욕망과 감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종종 간과되고 만다.

  휠체어에 앉아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는 한 발짝도 뗄 수 없는 데서 오는 자괴감, 언제나 반가운 탈출구였던 연주가 어느 순간 불안의 근원으로 전락하고 만 데서 오는 상실감, 최선을 다해 사랑한 사람의 외면, 가족들의 비난, 한쪽으로만 치우쳤기 때문에 차단되어버린 일상적 우정에 대한 갈망, 근사하고 황홀한 연주. 엘가의 첼로 협주곡 4악장에는 자클린느의 짧은 생애가 모두 녹아있는 듯하다. 격정, 사랑, 우수, 비애, 절망, 고독, 쉼 없이 몰아치다 잔잔해지고 한없이 낮아지다가 돌연 솟구친다. 파도처럼 넘실대다 슬픔으로 흐느끼면서 1악장부터 3악장까지를 다시 아우른다. 자클린느의 말처럼 “어김없이 가슴을 찢어놓”는다. “마치 눈물을 말려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자클린느 뒤 프레, 찬탄과 비탄의 경계를 오가는 그녀의 삶을 접으며 천재이기 때문에 느끼는 외로움과 파괴의 가열찬 속도에 공감한다, 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지닌 ‘천재성’에 질시와 부러움 담긴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은 범박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범박하면서도 욕망은, 탐욕스럽기까지 한 욕망은 결코 저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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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8-10-30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랫만이에요.
이 댓글을 읽으실까?
Camel의 stationary traveller가 듣고 싶은 날입니다. 이 글 퍼갈게요.
어떻게 지내시나...오래된 알라딘의 사람들.
 
걷기의 역사
레베카 솔닛 지음, 김정아 옮김 / 민음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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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은 수심이 깊어 위험하오니 접근을 금합니다.’
    지난 여름 내가 이사한 곳은 건국대학교 근방이다. 더위의 정점에서 손 빌리지 않고 이사를 한 탓인지 첫날부터 열병에 시달렸다. 동백처럼 터진 열꽃을 핥으며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낸 것은 강아지 한 마리뿐이었다. 혼곤한 잠에서 깨어나면 베갯잇은 눈물과 땀으로 뒤범벅된 채 또다시 나를 끌어당겼다. 끊임없이 목이 말랐고 갈라진 입술 사이에는 피가 고였다. 나는 낯선 곳, 낯선 집에서 이물감과 외로움에 시달리며 더위와 열을 참아냈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눅신한 어둠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 이틀 밤낮을 문단속도 하지 않은 채 박혀 있었다는 것을 깨닫자 뒤늦게 공포가 밀려 왔다. 습습한 공기가 필요했다.
 
    산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수심 20M의 경고 푯말이 곳곳에 서 있는 호수 주변을 걷는 일은 야릇한 환각을 일으켰다. 죽은 자들이 쉼 없이 내게 말을 걸어왔고 때로는 나 스스로 호수 안으로 발을 내딛기도 했다. 나는 호수 바닥에 편안히 누워 그들의 한숨이 기포로 떠오르는 것을 보기도 하고 더할 나위 없이 무료한 물고기들이 깃털 고르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별빛이 내리꽂혀 심장에 깊숙이 박히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그럴 때면 죽음은 내 살처럼 익숙하고 편안한 것이라는 안도감과 함께 휴식이 찾아왔다. 더불어 낯선 고장의 익명성이 주는 느슨함으로 인해 주변의 모든 것들이 오히려 살갑게 느껴졌다. 호루라기를 불며 지나가는 경비원 아저씨,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노파, 땀복으로 온몸을 가린 채 속보를 하는 뚱보 아주머니, 술에 절어 벤치에 널부러져 있는 청년도 어느 순간 나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하고 다가왔다. 나는 그들의 몸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숨 쉬며 그들의 목소리로 말을 하고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다. 그것은 신비롭고도 슬픈 정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더 이상 타인이 아니었다.

 
    걷기의 미학

    『걷기의 역사』는 이렇듯 사적인 걷기에서부터 출발하여 공적인 걷기의 역사를 밟아 나간다. 「서론」에서 레베카 솔닛은 걷기를 ‘몸의 역사’로 파악한다. ‘직립 보행의 역사이고 인체 해부의 역사’인 보편적인 행동에 특수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 ‘걷기의 역사는 상상력의 역사와 문화의 역사에 포함’되기 시작한다. 걸으면서 느끼는 기쁨과 숙고는 사람마다 다르고, 걷기에 부여하는 의미도 제각각이다. 바슐라르가 촛불을 보며 몽상의 세계를 구축했듯 어떤 사람은 걷는 행위를 통하여 사유와 성찰의 리듬을 발견하고, 또 다른 사람은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걷기를 이용하기도 한다. 레베카 솔닛은 금문교 북쪽에 있는 곶으로부터 태평양 쪽으로, 그곳에서 다시 산기슭으로 이어지는 길들을 걸으며 500페이지에 달하는 『걷기의 역사』를 탐사한다.
 
    솔닛이 최초로 탐사한 곳은 사유로서의 걷기이다. “나는 걸을 때만 명상에 잠길 수 있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나의 마음은 언제나 나의 다리와 함께 작동한다.”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론』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하는, 「마음은 한 시간에 3마일을 걷는다」에서, 그는 걷기가 문화적 이데올로기로 정착하는데 시초를 제공한 인물로 루소를 든다. ‘걷기는 루소가 선택한 존재의 방식’이었던 것 같다는 솔닛의 말은 온당하다. 루소는 위대하고도 대담한 사상가로서 당시 프랑스 귀족들의 심한 박해에 시달려야 했다. 몰이해와 비난 속에서 사교를 박탈당한 루소에게 자연은, 자연을 배경으로 또는 자연의 하나가 되어 걷는 행위는, 하나의 반란이자 도피였을 테니 말이다. 도시가 활기와 열정으로 충만할 때 자연은 장식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도시가 경쟁의 속도로 혼란스럽거나 패배의 조짐을 드러낼 때 자연은 모태의 안락으로 인간을 부른다. 초록의 경쾌함과 안온함은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하고, 소외감에서 인간을 구원한다. 자연의 치유 능력은 걸을 때 증폭한다. 걸음은 공기를 움직이게 하고 움직이는 공기는 자연의 숨을 인간의 허파에 이입시킨다. 녹색의 호흡을 흡입하면서 심장과 두뇌는 비로소 잔잔한 명상에 잠긴다.
 
    걷기와 사유를 연결시킨 철학자 중의 하나로 솔닛은 또 키에르케고르를 호명한다. 솔닛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키에르케고르 같은 사람에게는 ‘거리를 걷는 일이 사람들 틈에 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은 키에르케고르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듯하다. 루소가 자연을 벗 삼아 걸었다면 키에르케고르는 도시의 산만함과 왁자지껄함을 벗 삼아 걸은 사람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주위가 산만할 때 정신이 가장 활발’했다고 한다. 인식 능력이 뛰어나거나 자기 몰입에 유연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가 아닌가 싶다. 도시를 벗어나지 않고 도시와 함께 숨 쉬며 명상과 다작을 향유할 수 있다니!
 
    이밖에도 솔닛은 ‘걷기를 자신의 핵심적인 연구 과제로 명시한 철학자’로 에드문트 후설을 꼽는다. 후설은 이전의 사상가들과는 다르게 감각과 정신에 비해서 걷는 행위 자체를 강조한 학자라고 하는데 후설의 저서를 읽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한 페이지 분량으로 할애한  서술이 감질나게만 느껴진다. 걷는 행위 자체를 강조했다는 것은 몸에 대한 탐구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에서 비롯한 몸에 대한 담론은 20세기 후반에 들뢰즈나 푸코, 메를로 퐁티와 같은 걸출한 몸철학자들을 배출했다. 그동안 정신세계의 고색창연한 빛으로 인해 위축되고 도외시되었던 몸이 비로소 제대로 된 ‘몸’을 지니게 된 것이다. 걷기를 강조한 후설에 대해 좀더 많은 탐색이 이루어졌다면 후설과 몸철학을 연결해볼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무식한 자의 용감한 호기심일 뿐이다.


    길찾기로서의 걷기

    ‘순례는 걷기의 기초적인 유형, 즉 잡을 수 없는 것을 찾아가는 행위이다.’
    솔닛은 ‘성금요일’에 치마요 성지로 향하며 은총에 이르는 순례길에 대한 지도를 만든다. 명상으로서의 걷기가 특별한 목적의식 없이 출발하여 깊은 사색의 흔적을 양산한 것과는 달리 순례자의 걷기는 처음부터 뚜렷한 목적을 갖고 출발한다. 오체투지로 순례길에 오르는 사람이나 거대한 십자가를 지고 신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은 감사와 경배, 구원에 대한 약속을 희원한다. 순례는 ‘영혼의 경제 활동’으로서 ‘고된 노동이 보상받고 빼앗긴 것은 되돌아’올 것을 갈구하는 행위이다. 또 순례는 ‘영적 여행의 수단’이며 ‘금욕과 육신의 고통을 영혼 성숙의 수단’으로 이해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나는 도시에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지만 장거리 여행을 할 때는 자가용을 선호하는 편이다. 고속버스나 기차의 정형화된 움직임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고속버스나 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말 그대로 풍경일 뿐 살아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벽에 걸린 고흐의 ‘삼나무가 있는 보리밭’일 뿐이며 모네의 향기 없는 ‘수련’일 따름이다. 시각에만 의존해야 하는 풍경은 슬프다. 눈에 걸리는 대로 땅을 밟으며 느끼는 풍경만이 정신과, 육체와 소통한다. 내 마음을 끌어당기는 풍경 중의 하나는 ‘산사’이다. 국도 곁가지로 소박하게 열린 소로(小路) 입구에는 대부분 사찰의 이정표가 붙어 있다. 마음 동하면 차를 세우고 이정표를 따라 길을 걷는다. 사바세계와 불국정토를 나누는 일주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세상과 무연해진다. 일주문에 걸린 편액이 깊이 몸을 숙여 나를 어루만지는 듯하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일주문 안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금욕의 자세와 진리를 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이러한 평정심은 또다시 길을 달리고 어스름과 박명을 거치고 도시의 소음 속으로 귀가한 뒤에도 오래도록 지속된다, 구원이다. 순례자가 모두 신자(信者)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성취지향적인 걷기   

    목적의식을 배태하고 있다는 것은 공통적이나 순례자의 걷기와는 또 다른 걷기의 방식도 존재한다. 인간의 욕망을 투영하는 것으로서의 걷기가 그것인데, 이것은 공적인 명예나 사회적인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의지의 발로이자 성취를 목표로 한다. 등반가들은 단순히 산에 오르는 과정에서 느끼는 개인적인 기쁨 외에 험난한 산을 정복했다는 성취감과 함께 세인의 찬사를 희구한다. ‘최초의 등정, 최초의 북사면 등정, 최초의 미국인, 최초의 일본인, 최초의 여성, 최단 시간, 이런저런 장비를 쓰지 않은 최초의 등정 같은 모든 신기록’들은 그러한 인간의 욕망을 대변하는 기록들이다. 그리고  ‘최초’의 사람들은 산에 자신의 이름이나 국적을 드러내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자긍심을 증폭시킨다. 이러한 등산 숭배와 명성에 대한 욕구는 급기야 ‘발마’로 하여금 등산로를 개척하고 원정을 주도한 파카르의 공로를 가로채게 만들기도 하였다.
 
    걷기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땅 전쟁에 나선 사람들도 있었다. 바야흐로 ‘땅 위를 걷는 것’이 ‘계급 전쟁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땅을 소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소유지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울타리를 치고 말뚝을 박았다. 따라서 ‘전통적인 통행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원의 개방을 부르짖으며 ‘옛날식 소로 보존회’나 ‘스코틀랜드 통행권 협회’, ‘개방 공간 협회’ 등을 만들어 통행의 자유를 위해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대학들이 근래 들어 벽을 허물고 개방 정원을 만드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서구에 비하면 이백 년이나 뒤늦은 시도이다. 그것도 지역 주민들의 권리 찾기에서 시발한 것이 아니라 서구의 환경을 모방하려는 정부 시책의 결과일 뿐인 것은 어쩐지 씁쓸하다.
 
    통행권의 보장이라는 소박한 전쟁에 비해 보다 치열하고 확대된 전쟁은 바로 종교적 신념과 민족적 자부심, 민주주의를 쟁취하려는 시민들의 대대적인 행렬이다. 솔닛은 미국에서 열리는 게이 축제 행진이나 성 파트리키우스의 날 행진, 프랑스 혁명과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벳 혁명 등을 모두 걷기의 역사에 포함시킨다. 이렇게 본다면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으로 시작된 촛불시위는 물리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게다가 시각적으로까지 걷기의 역사 중 더없이 아름다운 한부분을 장식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주의를 지나쳐 이기주의가 팽배한 시민들이 하나로 뭉쳐 촛농 같은 눈물을 흘리던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러한 저력이라면 독도 사수쯤은 문제도 아니다. 


   관능으로서의 걷기와 걷기에서 소외당한 여성들

    솔닛은 캐롤린 와이버의 ‘오래전부터 구애 행위’였던 걷기를 수용한다. 솔닛은 보조를 맞추면서 함께 걷는다는 섬세한 행위는 두 사람을 감정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결속시킨다고 말한다. 함께 걷는 두 사람은 대화를 중단하면 안 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대화를 이어나가기 힘들 만큼 다른 일에 몰두할 필요도 없다. 걷기 자체가 스스로 매혹의 언어를 구사하고 스킨십을 주도하며 육체적인 결속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여성의 걷기는 성적인 타락과 매춘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혀 여성의 걷기는 통제 당하고 억압당해야 했다. 여성은 길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남자들을 유혹하는 밤거리의 여자로 낙인 찍혔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검사관 앞에서 두 다리를 벌린 채 순결을 검증 받아야 했다. 남성에게 자유로운 영혼을 선물한 걷기가 여성에게는 치욕의 주홍글씨가 된 셈이다. ‘여성의 걷기는 이동이 아닌 공연으로, 둘러보기 위한 걷기가 아닌 보여주기 위한 걷기로, 자신의 체험을 위한 걷기가 아니라 남성 관객의 체험을 위한 걷기로 해석될 때가 많으며, 이는 여성이 의도적으로 관심을 자기에게 쏠리게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아연실색할 노릇이다. 이러한 남성 위주의 사고방식은 현재에도 여전하다. 강간당한 여성이 오히려 ‘취조’와 조롱을 당하고 그녀를 강간한 것은 남성이 아니라 그녀의 미니스커트가 되어 버리는 것이 현실이다. 
    남성에 비해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협소하고 문화적 혜택에서 소외되었었다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인간이면 당연히 누려야 할, 아니 생명 가진 것의 당연한 권리인 ‘걷기’에서조차 차별과 억압을 감내해야 했다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걷기의 역사』, 인간의 보편적 행위인 ‘걷기’를 주제별로 세목화하여 정리한 레베카 솔닛에게 우선, 소박한 박수를 보낸다. 흥미롭기도 했고, ‘도시는 영원히 증식하는 목록이다.’나 ‘걷기와 에세이는 둘 다 즐거움, 나아가 황홀함을 주기 위한 것이며, 따라서 아무도 길을 잃지도 않고, 인적 없는 숲에서 벌레와 빗물로 연명하지도 않고, 낯선 사람과 무덤에서 섹스를 하지도 않고, 전투에 말려들지도 않고, 피안을 맛보지도 않는다.’,  ‘도시 산책에 열심인 사람이면 으레 경험하는 미묘한 상태가 있다. 고독을 즐기는 상태라고 할까. 밤별들이 하늘에 마침표를 찍듯이, 우연한 만남이 어두운 고독에 마침표를 찍는다.’ 따위의 반짝이는 문장들은 꽤나 매혹적이다. 하지만 의욕의 과잉 탓이었는지 각 챕터마다 너무 많은 에피소드들을 삽입한 탓에 산만하고 분주하다는 느낌을 준다.
 
    영화 『토탈 이클립스』에서 랭보로 분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걸음걸이는 활달하고 거침없다. 걸음걸이는 성격을 드러내는 요소 중 하나이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사람이 성큼성큼 걷는 것을 보지 못했고 혈기왕성하고 의욕적인 사람이 어깨를 늘어뜨린 채 좁은 보폭으로 걷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반대로 걸음걸이를 통해 성격을 보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양장을 할 때보다 한복을 입었을 때 더욱 몸가짐이 조신해지듯이 말이다. 그러나 닫힌 공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현대인으로서는 자신만의 걸음새를 만들기란 요원한 일이다. 도심의 정원화는 그래서 더욱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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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03 15: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9-06 0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9-08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맨발 창비시선 238
문태준 지음 / 창비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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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 하면 할머니가 떠오른다. 아버지의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의 어머니이다. 자글자글한 주름도, 흙무덤 같은 젖가슴도, 마르고 얼기설기한 손등도, 치맛자락 아래 빼꼼히 드러난 버선발도, 여름날 대청마루에서 구시렁대는 모깃불이나 화롯불에 곰삭아 있는 고구마 냄새도 친할머니의 것이 아니라 외할머니의 것이다. 하여, ‘고향’이라는 낱말은 ‘외갓집’과 맞닿아 있다. 더불어 ‘고향’ 속에 녹아있는 ‘자연’ 또한 외할머니의 것이며 여성의 것이다.

  그가 노래하는 고향은 외할머니의 여성성으로 표출된다. 그의 고향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얻으러 간’(어두워지는 순간) 고향이며, ‘다 쓴 여인네의 분첩’(뜨락 위 한 켤레 신발) 같은 고향이며, ‘흰 찔레꽃처럼 웃는 여자’(봄날 지나쳐간 산집)를 만나는 고향이다. 그의 고향은 붉은 동백으로 피어나 배꽃 고운 길로 이어지며 맷돌 돌리는 소리가 동구 밖 너머까지 아슴푸레한 곳이다. 그래서 그의 시집은 읽는 내내 태초와 같은 편안함을 느끼게 하고 그 편안함은 잘 여문 언어들로 인해 풍경으로 펼쳐진다. 그러나 도시에서 나아 도시에서 성장한 이들에게는 언뜻 읽히지 않는 풍경들도 눈에 띤다. ‘누에의 눈 같기만 했던 빛’(반딧불이에게)이 그러하며 ‘무논에 써레가 지나간 다음’(황새의 멈추어진 발걸음)이 그러하며 ‘가죽나무’를 모르므로 가죽나무를 사랑하였다는 시인의 심상을 짚어내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그의 시에는 직유가 많다. 시 한편에 직유가 세 번 이상 쓰이면 실패한 시라고 한다지만 그는 외려 직유를 갖고 노는 듯하다. 직유를 단순하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적절한 언어로 포장을 한 후 내보이기 때문이리라. 가령,
‘내 숨결이 꺼져가는 화톳불같이 아플 때’(화령고모)라거나, ‘봄은 배꽃 고운 들길을 가던 기다란 냄새의 넌출 같기만 한 것’(배꽃 고운 길)이라거나, ‘죽은 돌들끼리 쌓아올린 서러운 돌탑 같다’(맷돌)는 것들이 그렇다. 단순히 화톳불같이 아프다고 했더라면, 봄은 넌출 같기만 하다고 했더라면, 맷돌은 돌탑 같다라고 했더라면 얼마나 맨송맨송하고 심심했을까. 게다가 그는 직유를 아예 드러내놓고 사용함으로 해서 시에 리듬을 실어주기도 한다.

팔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
을 거두어갔다
- <맨발> 일부

  그의 시는 아름답고 자궁 속을 유영하듯 포근하다. 세상의 그 어떤 소리보다 감미롭고 그 어떤 그림보다 세세하며 은근하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아쉬운 것은 오래도록 마음을 두드리는 울림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풍경을 묘사하고 형상화하는 솜씨는 돋보이지만 그것을 통해 독자에게 질문거리를 던져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시집을 덮고도 아주 오래도록, 시인의 목소리를 기억해내고 그가 던진 질문을 곱씹으며 대답을 궁리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첫 시집과는 달리 시인이 고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번 시집에는 군데군데 시인의 깊이가 엿보인다. 그 깊이는 많은 부분 불교에 빚지고 있다.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 한 호흡이라 부르자 / 제 몸을 울려 꽃을 피워내고 / 피어난 꽃은 한번 더 울려 / 꽃잎을 떨어뜨려버리는 그 사이를 / 한 호흡이라 부르자 / 꽃나무에게도 뻘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 썰물이 왔다가 가버리는 한 호흡 /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번 흔들어 보이는 한 호흡 /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처럼 / 그 홍역 같은 삶을 한 호흡이라 부르자
- <한 호흡> 전문

  한 호흡은 불교에서 이르는 찰나일 것이다. 찰나생멸(刹那生滅)과 찰나무상(刹那無常)이 잘 드러난 구절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찰나를 이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일 뿐(윤회)이므로 어떠한 것도 영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아버지의 삶이 아무리 홍역 같이 뜨거운 것이라 할지라도 찰나에 스러질 뿐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위로를 담고 있는 말일 터이다. 또 그는 봄빛에 울렁이는 자신의 속내를 ‘봄마음 이리 설레 환속’한 신라의 여승 설요에 빗대기도 한다. 환속을 꿈꿀 만큼 자지러지는 일렁임의 속살이 만져질 것만 같다.
  이뿐만이 아니다. 각주에서 밝혔듯, 피붙이의 영면 앞에서 ‘죽음은 달그림자가 못에 잠기는 것’(당신이 죽어나가는 길을 내가 떠메고)이라고 노래함으로써 열반에 들기를 간절히 염원하기도 하고,

칠석이면 / 두 손으로 곱게 빌던 / 그 돌부처가 / 이제는 당신의 눈동자로 / 들어앉아서 // 어느 생애에 / 내가 당신에게 / 목숨을 받지 않아서 / 무정한 참빗이라도 될까 // 어느 생애에야 / 내 혀가 / 그 돌 같은 / 눈동자를 다 쓸어낼까 // 목을 빼고 천천히 / 울고, 울어서 / 젖은 아침
- <혀> 일부

  윤회를 빌어도 부처 같은 어머니의 사랑은 갚아갈 수 없음을, 그래서 그 정한으로 울고 울 수밖에 없음을 노래하기도 한다. ‘공적(空寂)과 파란(波瀾)을 동시에 읽어낼 줄 안 이 누구였을까’(대나무숲이 있는 뒤란)라는 의문구는 제 잘난 맛에 사는 속세에 대한 반성이라도 구하는 것일까, 마는 모쪼록 서정시인 ‘문태준’이 종교경전도 인문서도 많이많이 읽어 보다 깊은 질문들을 쉬잖고 던져주었으면 참말이지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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