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콩나물 다듬기

성 미 정

 

나는 콩나물 다듬는 일을 좋아한다

어디서든 이 일만은 내가 독차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대가리에 붙은 껍질을 벗겨내고

잔뿌리를 다듬는 게 고작인 이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단순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콩나물 다듬기가 좋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이 일을

내가 좋아한다는 게 좋고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이 일이

내게도 잘 맞는다는 게

때론 안심이 될 정도다

그러니까 콩나물 다듬기는 매우 단순하지만

이 일을 즐기는 나의 심리는

결코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콩나물을 다듬어야

나의 콩나물 다듬기도

남의 콩나물 다듬기처럼 될 수 있을까

아무래도 당분간 콩나물 다듬기는

내가 독차지해야 할 것 같다

-- 성미정 시집 <사랑은 야채 같은 것>( 민음사)

 

 

 

 

 

 

 

 

 

 

 

 

콩나물 다듬기와 같은 일상의 표나지 않는 노고들이 있다

누군가가 움직여 주지 않으면, 수고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 일상의 부분들...

나의 시월은 그런 시간들에 보내지고 있다

이 시간들이 無用하다고 느끼지 않기를 바란다

빨래를 개키면서, 걸레를 빨면서, 마루를 닦으면서, 냉장고 안의 시든 야채를 버리면서,  

락스 푼 물로 화장실을 청소하면서.....

투명한 바람처럼 나를 스쳐 지나가는  시간의 깃털을 느낀다 

문득 <천국보다 낯선>의 그녀처럼 커다란 사각 트렁크를 들고 먼 길을 떠나고 싶어지는 마음을

'나의 콩나물'을 다듬으며 애써 붙들어 앉힌다

창 밖으로 오늘 몫의 가을 햇살이 환하고 쓸쓸하게 저물어 간다

 

"그러니까 콩나물 다듬기는 매우 단순하지만

이 일을 즐기는 나의 심리는

결코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천국보다 낯선 (Stranger Than Paradise, 1984)

Directed by Jim Jarmus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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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10-14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콩나물에 그런 심오함이 있었다니...

내가없는 이 안 2004-10-14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콩나물을 다듬는 것과 같은 일이 사실 에너지를 많이 빼앗아요. 힘들어서라기보다는 열정을 조금씩 긁어내는 느낌이거든요. 그래서 손을 놀릴 때마다 하기 싫다는 생각이 늘 불쑥불쑥 들곤 했는데... 어차피 해야 할 일이면 마음이라도 고쳐먹자고 새삼 다질 때도 있죠. 음악이라도 들으면서, 딴 생각이라도 뭉개뭉개 하면서... ^^ 라일락와인님, 아직 하실 일 많이 남았죠? 힘내시얍!

에레혼 2004-10-14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의 표정이 더 심오합니다...

에레혼 2004-10-14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새 이 안님이 다녀가셨군요[전화 한 통 받고 오는 사이...]
어떤 결과, 그럴듯한 성과를 낳는 것보다도 지금 이 순간에 몰두해서 이 순간 자체를 온전히 느끼고 즐기는 게 '잘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런 삶을 살기란 참 어렵고도 오묘한 경지인 것 같아요.
자꾸 잊어버리곤 해서 자주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과 암시가 필요해요..... 잡생각 없이 차분한 손길로 정성스레 콩나물을 다듬으려면요......

선인장 2004-10-14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일매일 손이 가는 일들, 누군가 하지 않으면 표가 나지만 누군가 하고 나면 표도 나지 않는 일들, 가끔 그런 일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이렇게 님의 글을 읽는 순간처럼요... 그럴싸한 말들을 늘어놓고, 나는 일상에 채이며 살지 않을 꺼라고 장담하지만, 그런 장담조차 일상의 단단함을 꾸리는 누군가의 손길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가끔은 잊고 살아요. 차분하게 콩나물을 다듬는 님의 손길이 그런 걸 깨닫게 해 주지요...

hanicare 2004-10-15 0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구처녀의 고독은 둥글다였나요. 그녀의 시. 참 탱글탱글했다는 기억.

로드무비 2004-10-15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미정 시인의 이 시보다 라일락와인님의 글이 더 한 편의 시 같군요.
천국보다 낯선, 퍼갑니다.
여름옷 넣고 가을겨울옷 정리해야 하는데...
별것도 아닌 일이 엄두가 안 나네요.

에레혼 2004-10-15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계절이 바뀔 때 옷 정리하는 일... 그게 때마다 왜 그리도 엄두가 안 나서 생각이 나고도 며칠씩 미루고 미루다가 기온이 뚝 떨어지거나 수은주가 쑥 올라가야 쫓기듯 하게 되는지... 또 막상 시작하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는데 말이지요......

로드무비님, 님은 일찌감치 제가 쳐놓은 덫에 걸린 겁니다, 제 사탕발림에 넘어가 어느새 그 마수(?)에 길들여진 탓이지요, 시인의 '진짜' 시보다 제 끄적거림이 더 시 같다니요....[그래도 기분은 좋은걸요! 앞으로도 사탕 많이 준비해 놔야지...ㅋㅋㅋ]

에레혼 2004-10-15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위의 두 분 답글을 건너뛰다니, 이런...[영업 관리를 이렇게 해서야^^]

선인장님, 님은 일찌감치 목도리 챙겨 두셨군요. 바람이 갑자기 차가워졌지요?
선인장님은 일상도, 몽상도, 원대한 꿈도 모두모두 자기의 몫으로 다스리고 잘 가꿔 가고 있잖아요.... 난 님처럼 '혼자만의 일상'을 스스로 책임지며 살아가는 獨身의 시간을 잘 지내는 사람들이 부러워요. 나에겐 그런 시절이 없었어요......
혼자 살든, 가족 속에서 부대끼며 살든, 자기만의 '콩나물 다듬기'는 다 있는 거겠지요?

하니케어님, 그런 제목의 시가 있었나요? 궁금해서 검색해 보았더니 나타나는 다른 시 한 편... 이 시인은 생활 속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 재능이 있나 봐요, 겉멋을 부리지 않고 어깨에 힘을 뺀 어조라 쉽게 읽히면서 속이 개운해지는, 국물 뽀얀 설렁탕 같은 시......


 

 

 

 

 

 

 

 

 

 

눈물은 뼛속에 있다는 생각  / 성미정

                       

곰국을 끓이다 보면 더 이상 우려낼 게 없을 때

맑은 물이 우러나온다 그걸 보면

눈물은 뼛속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뽀얀 국물 다 우려내야 나오는

마시면 속이 개운해지는 저 눈물이

진짜 진주라는 생각이 든다

뼈에 숭숭 뚫린 구멍은

진주가 박혀 있던 자리라는 생각도

짠맛도 단맛도 나지 않고

시고 떫지도 않은 물 같은 저 눈물을 보면

눈물은 뼛속에 있다는 생각

나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

뭔가 시원하게 울어내지 않았다는 생각

이 뽀얗게 우러나온다.

 


hanicare 2004-10-15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구처녀의 고독은 둥글다 - 성미정

처음에 너는 고독은 날카로운 그 어떤 거라고 짐작했다 고독 때문에 자주 명치끝이 아팠다 너로선 그럴 만도 했다 나이와 더불어 너는 통증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통증을 감추기는 쉽지 않았다 친구들과 있을 때 넌 너무 말을 많이 하거나 아예 하지 않았다 고독이 드러나는 게 싫었던 거다 친구들은 그런 너를 떠났다 가족들은 너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탄식했다 고독은 자주 너의 귀를 막았다
고독에 잠긴 널 불편해 하지 않는 건 TV뿐이었다 방에 틀어 박혀 TV와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어느 날 방망이에 맞고 혼자 날아가는 공을 보았다 하얗게 질린 채 공기 속을 회전하는 공에서 넌 터질 듯한 외로움을 느꼈다 두터운 장갑 안으로 숨어 드는 공에선 감출 수 없는 두려움을 만났다 그런 게 야구라고 불린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넌 왠지 고독이라 부르고 싶었다 야구는 고독이라 불리는 편이 어울린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간 너는 야구 중계를 보는 가족들을 보았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야구광인 듯했다 지금껏 눈치채지 못한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공통관심사를 발견한 넌 몹시 기뻤다 가족들 틈에 슬쩍 끼어들어 야구 얘기를 했다 네가 가장 아끼는 고독은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날아간 공이라고 고백했다 그 공이 그렇게 사라진 건 그만큼 고독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가족들은 사라진 공의 행방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오직 눈앞의 공만 바라보았다 가족들은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다
넌 한동안 연락이 끊긴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구에 대해 말했다 친구들의 태도는 가족들과 다를 게 없었다 어떤 친구는 숫제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은 그건 야구가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자신이 본 야구에 대해 떠들었다 너는 그들이 말하는 야구를 본 적이 없었다 넌 친구들을 떠났다 하지만 인정해야 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야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야구에 잠겨 있을 뿐이라는 것도 이제 너는 고독이 둥글다고 생각한다 이후 고독은 너에게 더 이상 통증을 주지 않을 것이다 다만 끝도 시작도 알 수 없는 둥근 공처럼 지루할 것이다
-옛날에 세계사에서 대머리와의 사랑이란 시집을 냈지요. 참 드물고 숨가쁜 개성이어서 기억에 남았는데 올리신 시를 보니 이 사람도 각이 많이 깎였나봐요. 생활이란 게 뭔지.

에레혼 2004-10-15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각이요, 각!
그게 또 참...... 세월의 흐름에 맨질맨질하고 따뜻한 돌멩이처럼 각이 좀 깎이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기는 한데, 그래도 제 나름의 각을 세워 줘야 하는 때가 있단 말이지요.... 각이 있어야 스타일이라는 게 나오는 거 아니겠어요? 한때 어깨에 뽕을 넣던 유행도 다 그 '각을 통한 스타일'을 위한 것이었지요.

제가 올린 성미정의 시와 '야구 처녀...'를 한데 놓고 읽어 보니, 하니님의 지적처럼 너무 편안하고 각이 깎인 느낌이 들기는 하네요.
이런 눈썰미를 보면 하니케어님은 아직 각이 날카롭고 생생하게 살아 있단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