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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얼굴 - 총을 들지 않을 자유와 양심의 명령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7년 6월
평점 :
김두식이란 사람을 좋아하고, 그의 주장에 공감하지만 <평화의 얼굴>을 읽는 데는 적잖은 망설임이 있었다. 한국에선 소위 '이단'이라 불리는 종파의 교인들이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를 하고, 그들을 옹호하는 게 이 책의 큰 줄기이니 이 책 읽기만큼은 미루고, 미뤄뒀다. 나는 김두식과 같은 장로교에 속한 교회를 다닌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이 책의 주장인 반전(反戰)에 대한 내 자신의 생각이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기독교 작가 C.S.루이스가 <영광의 무게>에서 '나는 왜 반전론자가 아닌가? _ 전쟁에 대한 태도'란 꼭지를 빌어 반전론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치는데 사실 난 그의 주장에 많이 공감하고 있다. 어쩌나? 그래도 읽고 싶은 마음이 승하여 책을 읽어간다.
이단에 대한 기억은 둘 있다. 동생이 어느 교회를 잠깐 다녀왔다는데 어딘지 말을 하지 않길래 궁금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여호와의 증인'이었다. 화들짝 놀라 이유를 말하며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평소의 동생은 그렇지 않는데 고집부리며 계속 나가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고집스레 말하는 동생이 평소완 너무 달라 무서웠다. 동생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내게 말을 하는 듯 했다. 가족이 총동원해 말리니 이후 동생은 더 이상 그 단체에 나가질 않았다. 대학 때는 선교회에 있었는데 한창 세를 확장하던 이단 종파와 싸운 적이 있다. 쫓고 쫓기며 몸싸움도 했는데, 지금도 그들의 무서운 눈이 기억난다.
C.S.루이스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에 옥스퍼드 반전론자 협회에서 '나는 왜 반전론자가 아닌가?'란 제목으로 강연을 한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루이스는 자신의 경험과 성경을 근거로 주장을 펼친다. 주장의 대종은 이렇다. "반전론자들은 전쟁이 언제나 유익보다 해를 더 많이 끼친다는 그들의 주된 주장을 사실로 내세울 것입니다. 전쟁이 아무 유익을 끼치지 못한다는 말은 사실과 너무 거리가 먼 주장이라서 역사적 견해로 볼 수도 없습니다. 1914년, 유럽이 독일의 수중에 들어가는 상황을 '악'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악을 방지한 전쟁은 그 부분에서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예수의 언행을 제외하곤 베드로나 바울 같은 예수의 제자들은 폭력 사용을 승인한다는 것이다. 루이스도 문제는 예수의 언행이라는 것을 인정하는데, 반전론자들의 주장처럼 예수가 폭력 사용을 강고하게 거부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란 구절을 해석하며 이 말이 '위해 일반'에 대한 무저항의 의무를 부과하고 있지만, 향후 나타날 '특정한 위해'에 대해서까지 무조건 금지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책을 읽으며 우선 고마웠던 건 정통과 이단을 말하기에 앞서 평화를 먼저 말하는 게 기독교의 정신에 맞다는 사실을 알게 해줘서이다. 싸우는 사람들을 향해 싸움을 멈추라는 말을 건네기보다 외려 더 부추기고 싸움에 뛰어드는 기독교는 비종교인들 앞에서 정통과 이단을 말할 자격도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실제 참전 중에 대학 친구를 잃고 남겨진 친구의 가족들을 평생 거뒀던 루이스다. 그는 반전주의가 곧 평화주의가 아님을 말한다. 전쟁 안에 가로놓인 명분과 이익도 잘 살펴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의 주장이 평화주의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용서는 말하고 있음을 난 발견한다. 이 것만으로도 난 그에게 고마움을 갖는다. 물론 김두식에겐 더한 고마움을 갖지만 말이다.
着語 : 책 가운데 이스라엘의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 제도를 다루는 장이 있다. 병역 거부를 지지하던 인사들 중 한 사람이 <나와 너>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이다. 결국 부버가 전쟁을 반대했다는 말일텐데 이 얘기가 쓸쓸히 다가왔다. 이유는 그가 1948년 팔레스타인으로 귀국할 수 있었던 것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의 전투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사이드 가족이 살던 집을 전쟁을 통해 차지한 그가 '병역 거부'와 '사랑', '나와 너'를 말함이 난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