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휴전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0년 9월
평점 :
|
|
|
|
"하지만 전쟁은 끝났잖아요." 나는 반박했다. 그 몇 개월간의 휴전 기간을 살았던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는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보편적인 의미에서 전쟁은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은 늘 있는거야." 모르도 나훔의 잊을 수 없는 대답이었다.(77-78면)
|
|
|
|
|
<휴전(La tregua)>은 아우슈비츠에서 구조된 프리모 레비가 이탈리아 집으로까지 돌아오는 과정을 그린 수기이다. 서경식은 이 책의 말미에 있는 해설에서 <휴전>을 '자전적 소설'이라 말하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휴전>과 비슷한 시기에 번역된 <지금이 아니면 언제?(Se non ora quando?)>를 함께 읽었는데 뒤의 책은 소설이 맞겠다. 소설이 워낙 잡식성이긴 하지만 <휴전>은 기록에 대한 작가의 의지가 더 강한 듯 하고, 아우슈비츠 기록인 <이것이 인간인가(Se Questo e' un Uomo)>의 속편이라는 점을 보더라도 산문으로 보는 게 맞다는 생각이다.
위에 인용한 대목은 작가가 책의 제목을 가져온 부분이기도 하고 이 책의 주제가 담긴 부분이기도 하다. 레비와 대화를 나누는 모르도 나훔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그리스인이다. 이 리뷰를 쓰기 전 읽었던 블로거 'bari_che'님의 서평은 나훔이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에 대해 탁견을 보여주고 있다. 그 의견에 몇 마디를 보태본다. 나훔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로 <나훔서>의 저자이다. 그는 당대의 강대국인 아시리아와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괴롭힌 대가로 멸망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의 신에게, 그는 이스라엘에겐 구원을 적국엔 벌을 내려줄 것을 기도하고 있기도 하다. 나훔이란 이름은 '위로하는 자'란 뜻이다.
레비는 왜 이 그리스인에게 나훔이란 이름을 붙였을까? 내 생각에 <휴전>의 나훔 역시 선지자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났"다는 레비의 말에 "전쟁은 늘 있는거야."라고 말하는 그는 분명 선지자이다. 미래를 먼저 보고 아는(先知) 이가 선지자라면 분명 그의 예언은 정확하다. 전쟁은 진정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지자 역할보다 중요한 것은 레비의 비극적 세계관이 나훔에게 덧씌워지는 걸 확인하는 대목이다. <구약성경>의 나훔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야훼의 말씀이시다. "유다야, 적의 병력이 아무리 많고 강하여도 내가 낫질하듯 없애버리리라. 이제까지 나는 너를 너무 괴롭혔다. 이제 다시는 너희를 괴롭히지 아니하리라. ... 야곱의 포도덩굴. 그 이스라엘의 자랑을 적들은 짓밟고 털어갔었다. 그러나 야훼께서 그 포도원을 다시 일으키시리라."(<나훔서> 1장 12절, 2장 3절) 악의 화신인 아시리아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는 야훼인데 <휴전>의 나훔은 전혀 그렇질 않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
|
|
|
나는 라거-강제 수용소-를 세계의 역사와 나의 역사의 어떤 추악한 변형으로, 괴물스러운 뒤틀림으로 인식한 반면, 그-모르도 나훔-는 이미 알려진 사실들의 슬픈 확인으로 인식했다. '전쟁은 늘 있다', '인간을 잡아먹는 늑대는 바로 인간이다'라는 오래된 이야기였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보낸 2년에 대해서는 나에게 결코 말하지 않았다.(78-79면)
|
|
|
|
|
전쟁은 늘 있다. 악의 화신 역시 심판받지 않고 늘 있을 뿐이다. 괴물도 늘 있다. 레비는 다른 자리에서 이런 말도 남긴다. “괴물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 수가 많지 않아 그리 위험하지 않다. 실제로 위험한 것은 의문을 품지 않고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평범한 기계적 인간들이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 늑대인 한 전쟁은 늘 있다. 나훔이 레비에게 아우슈비츠의 2년에 대해 말하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아우슈비츠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종전이 아니다. 휴전일 뿐이다.
악의 도시 니느웨를 향해 선지자 나훔은 저주한다. "피로 절은 이 저주받을 도시야. 협잡이나 해먹고 약탈을 일삼고 노략질을 그치지 않더니. ... '나 이제 너를 치리라' 만군의 야훼께서 하시는 말씀이시다. ... 네 상처는 나을 길이 없고 얻어터진 자리는 아물 길이 없다. 내내 너의 행패를 당하던 사람들이 네가 망했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손뼉을 치며 고소해하리라." (<나훔서> 3장 1절, 5절, 19절) 레비는 자신에게 지옥을 보여준 독일이란 나라의 한 도시 뮌헨-그에겐 현대판 니느웨가 아니었을까?-를 보고 무어라 말할까?
|
|
|
|
독일의 한 자락을 느낀다는 사실은 피곤함에 더하여, 견딜 수 없는 초조함과 좌절과 긴장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심정을 가중시켰다. 우리는 독일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엄청난 것들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독일인 각각은 우리에게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 아우슈비츠에 대해, 자기 집 문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일상적으로 자행된 조용한 대학살에 대해 '그들'은 알고 있었던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길을 가고 집으로 돌아와 자기 자식들을 바라보고 교회의 문턱을 넘어 들어갈 수 있었단 말인가? 만약 아니라면 그들은 경건하게 우리에게서, 나에게서 모든 것을 당장 들어야 하고 배워야 한다. 그래야 한다. 나는 내 팔에 문신으로 새겨진 숫자가 쓰라린 상처처럼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을 들었다.(322-323면)
|
|
|
|
|
니느웨를 향하여 심판을 말하며 저주를 퍼붓던 나훔은 행복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처럼 진정 위로하는 자였다. 우리의 모르도 나훔과 프리모 레비는 위로하는 자일 수 없다. 위로의 내용은 거짓이고, 하여 그 위로는 기만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레비는 그저 수인번호 174517의 비명을 듣고만 있다. 비명은 독일인이 질러야 하는데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과묵하고 깔끔한 독일인들은 침묵을 지키고 레비의 팔에 새겨진 지옥의 번호는 비명을 지르고 있다. "나는 지옥을 보았고,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지옥과 괴물은 없고, 전쟁은 끝났다는 저들의 완고한 침묵 앞에 레비는 자살로 몸소 외쳤다. 지옥에서 돌아온 지 40년이 지난 후였다.
Primo Michele Levi(1919-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