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뒷방은 어디에......
알라딘 마을에 오래 터를 잡고 지내다 보면 '여기'가 하나의 '공동체'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런 느낌을 글로 한참이나 끄적거리다가 관 둔 적도 있다. 이제 와서 그 글을 다시 끄집어 내어 마무리지을 생각은 별로 없다. 글을 쓰는 것도 '때'가 맞아야 계속 이어서 쓸 수 있는데, 그 글은 어느새 '철'이 너무 지나면서 시들해져 버렸다.
그 글을 쓰면서 내가 그 속에 담고 싶었던 주된 감정은 '옛날 옛적에 알라딘 마을은 이래서 좋았었지' 하는 느낌이었다. '고향 마을' 같은 안온함이 넘치는 그런 곳이 아직도 사이버 공간 어느 한 켠에 여전히 존재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언제나 시간이 흐르고 나면 누구든지 '옛날'을 그리워 하며 '그때가 좋았지' 하는 탄식 밖에 내놓지 못한다. 그게 세상 이치이기도 하고.
오래 전부터 가깝게 지내던 '알라딘 마을 사람들'이 어느새 홀연히 자취를 감춘 채 좀처럼 다시 나타나지 않거나, 어쩌다 한 번씩 '희미한 발자국'만 남긴 채 알라딘 마을을 다녀간 흔적만 겨우 알아볼 수밖에 없을 때도 있다. 오래 전에 떠난 분들 가운데는 아마 '알라딘 마을'보다 훨씬 더 새롭고 즐거운 '새 동네'에 가서 잘 살고 계시는 분들도 계시리라. 그 분들이 새로운 동네로 가서 잘 살고 있다면 그걸로 이미 충분하다. 혹은 '알라딘 마을'보다 훨씬 더 한적한 곳으로 떠나 여기보다 훨씬 더 조용한 삶을 살고 있는 분들도 계시리라. 그 또한 좋은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알라딘 마을'에서 여러 모로 신망을 받으며 꽤 열심히 '마을'을 위해 애쓰고 노력하면서도 '알라딘 마을 생활'을 즐기시던 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어떤 말 못할 사정 때문에 다시는 '고향 마을'을 찾지 않는 경우다. 설사 그런 분들이 다른 마을에 가서 살더라도 '알라딘 마을'을 잠깐씩이나마 '고향에 다녀 오듯이' 들를 수도 있을 텐데, 그러기조차 마땅찮은 사정에 처해 있는 경우가 있다면 그건 또 얼마나 안타까운 일일까.
그런데 가끔씩은 전혀 뜻밖에 '환향'하시는 분들도 더러 있는 것 같다. 그런 분들의 건강한 모습을 '알라딘 마을'에서 어느날 갑자기 다시 발견하는 일은 몹시 즐겁다. 정든 고향도 이러저러한 사정 때문에 한 번 떠나면 영영 되돌아가기가 힘든 경우가 참 많다. 언짢은 일 때문에 고향을 등진 사람들이야 더 말해 뭐하랴. 그래도 고향의 안온함은 늘 그리운 법이다. 옛날의 불편한 기억들을 잊고 다시 고향 마을로 돌아오는 분들을 보면 가끔 늘그막에 안간힘을 다해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암튼 어렵사리 마음 먹은 '귀향'은 늘 따뜻하게 받아줄 일이다. 사는 게 참 별 게 아닌 것 같아도, 늘 마음 같지가 않으니 말이다.
* * *
삶의 온기
이처럼 내용 없는 '우리라는 느낌(we-feeling)'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것이 바람직한 상태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상태에 있기를 원한다. 수단의 소설가 타옙 살리(Tayeb Salih)는 7년 만에 고향 마을로 돌아와 그러한 감정에 사로잡힌 한 남자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마치 내 안에서 한 덩이의 얼음이 녹아내리는 기분, 마치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 있는 꽁꽁 언 물체가 된 기분이었다." 자신이 되찾은 것은 "부족이 주는 삶의 온기"라고 남자는 말한다.
삶의 온기, 우리라는 느낌은 음식이나 거리의 소음, 어린 시절 창 밖으로 보이던 불빛들이 주는 친숙함과 쉽게 결부된다. 그러나 냄새와 광경은 느낌의 '표현'일 뿐,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우리라는 느낌은 사람들에 관한 것이지 사물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라는 느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당신이 아는 것이 적절하며, 따라서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고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하며 당신의 행동이 그들에게 어떻게 이해되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우리 부류 속에 있다는 느낌이며, 버지니아 울프의 묘사에 따르면 "남의 이목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고, 함께한다는 편안한 느낌이며, 친밀함과 온전함과 신속한 상호협력을 지향하는 공통 가치를 느끼는 것"이다.
- 데이비드 베레비,『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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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한 달쯤 전에 끄적거렸던 '미완성 글'을 기어이 덧붙여 본다. 다시 이어 쓸 힘도 딸리니 마침 잘 됐다 싶다.
오래 살다 보니 내가 내 자신의 글을 인용할 날도 다 있구나 싶다.
아, 옛날이여~
까마득한 옛날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을까. 그들에겐 라디오도 TV도 없었고, 그 흔한 컴퓨터도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었는데 말이다. 까페니 블로그니 카톡방이니 밴드니 하는 온갖 SNS 서비스도 하나 없었는데 말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나도 그런 '순수의 시대'를 잠깐이나마 살았다. 아니 적잖이 살았던 듯하다. 내가 어릴 때 살았던 시골에선 '전기'가 중학교 2학년 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들어왔다. 그 전까지는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라고 해봐야 라디오가 유일했다. 숱하게 뜯어 보기도 하고 쥐어박기도 했던 그 라디오는 늘 등어리에 큼지막한 건전지를 동여매고 있었다. 그래도 그 라디오는 무려 '휴대용'이었다.
그 라디오는 사람들 손에 이리 저리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끌려 다니면서도 온갖 세상일을 시시콜콜 다 들려줬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으로 시작되는 흥분에 가득 찬 목소리와 함께 스포츠 선수들의 눈에 보이지도 않은 '눈부신' 활약상을 생생하게 전해 줄 때도 있었고, 독서만담보다 백 배는 더 재미있는 '장소팔과 고춘자의 만담'도 들려줬다. 당대 최고의 여가수라 불리웠지만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는 가수 문주란이 불렀던 '백치 아다다' '동숙의 노래' '공항의 이별' 같은 노래들을 오로지 라디오로만 들으며 즐거워 했다. 생전 '공항' 한 번 구경도 못했고, '동숙'이 무슨 뜻인지도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전기가 들어오니 TV도 잽싸게 따라 들어왔다. 백여 호 남짓한 조용한 시골 마을에 테레비가 들어 오니 세상이 너무 빠른 속도로 뒤바뀌기 시작했다. 긴긴 여름 낮을 달구던 뜨거운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나면 전봇대조차 없는 으슥한 골목길이 무서워 고작 방에서 호롱불이나 켜 놓고 하릴없이 먹이나 갈아 대며 신문지에 붓글씨나 써내리던 낭만적인 '초여름밤'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라시찬 주연의 '전우'도 봐야 했고, 최불암 주연의 '수사반장'도 꼭 봐야 했다. 몇 대 밖에 없는 TV 앞자리는 조금만 늦어도 완전한 사각지대까지 밀려나기 일쑤여서 방영시간이 가까워 오면 늘 마음이 조급했다. 이따금씩 열리는 WBA나 WBC 타이틀전 권투 시합은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지상 최고의 스포츠 중계방송이었다. 주말마다 밤늦게나 볼 수 있는 '주말의 명화'와 '명화 극장'은 촌동네 중학생에겐 멋진 별천지로 들어갈 수 있는 마술같은 '연결통로'였다. 그토록 멋진 배우들이 주말마다 나와서 씽긋 웃으며 멋지게 총을 한 방에 명중시켜 악당을 쓰러뜨리거나, 평생에 구경조차 하기 힘들 것 같은 절세의 미녀 여배우와 키스씬을 보여 주면 어느새 촌동네 중딩의 가슴도 덩달아 벌렁거렸다.
내가 어렸을 땐 <전국노래자랑>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 대신에 일 년에 한 번씩 분교에 다들 모여서 거창한 '음악 콩쿠르'가 열렸다. 거기서 입상하면 부상으로 커다란 '양은솥'이나 '양은남비'를 받았다. 멋진 유행가를 뽐낸 끝에 수상자로 호명된 동네의 젊은 처녀 총각들은 그 솥이나 남비가 진심으로 살림에 보탬이 된다는 생각으로 기뻐했다. 솥이나 남비를 머리에 뒤집어쓰며 앵콜송을 부르던 그 때 그 감격에 겨운 모습이 아직도 눈 앞에 선하다.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니던 마을 분교에 어쩌다 총각 선생님이라도 새로 부임할라치면 동네에서 힘깨나 쓰는 어른들은 남보다 서로 먼저 선생님을 농가로 초대해서 '시골 밥상' 앞에 모시기 위해 야단 법석을 떨었다. 마침내 선생님께서 '저녁 식사'를 위해 홀로 조심스럽게 돌담장을 돌아 우리 집 안마당으로 들어서던 순간의 그 짜릿한 흥분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차려낼 것도 별로 없는 변변찮은 시골 살림이었지만 그래도 온갖 재료들로 갖은 반찬들을 기가 막힌 솜씨로 만들어 내셨던 어머니의 요리 솜씨 또한 결코 잊을 수 없다. 어디서 그런 레시피를 얻었는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종가집 할매한테 몇 차례나 걸음을 했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런 원시적이고 사뭇 낭만적이기까지 했던 생활을 지극히 당연시했던 까마득한 옛 시절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된 것 같지도 않지만 그래도 족히 몇십 년은 거슬러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풍경이니 옛날이 맞긴 맞다.
돌이켜 보면 알라딘 마을도 한 때는 그런 '시골 마을 풍경'을 닮은 때가 있었다.
그 때만 하더라도 알라딘이라는 마을 밖에선 어떤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지조차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을 듯한 분위기마저 느껴졌었다. 누군가 바깥 세상의 일들을 뉴미디어로 소개하는 일조차 드물었다. 알라딘 마을 사람들은 오로지 책만 일고 글만 쓰는 사람들로만 보였다. 사진이나 동영상을 글과 함께 올리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다. 그저 해가 뜨나 해가 저무나 '책 이야기'만 가득했다. 알라딘에 글을 쓰는 건 곧바로 리뷰를 쓰는 일과 거의 동일시될 정도였다. 페이퍼에 신변잡기를 올리는 일 자체가 이단시될 정도였으니까.
조용하던 알라딘 마을에 거센 변화가 밀어닥친 때는 아마도 블로그와 카페가 활성화된 이후였던 듯하다. 마치 어느날 갑자기 세상을 구석구석 빠르게 연결해 주는 동시에 밤낮없이 여기저기를 환하게 밝히는 '전기'가 들어온 셈이라고나 할까.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빠르게 전파하는 일에 정신을 팔기 시작했다. 온갖 신기한 뉴스들을 빠르게 퍼나르는 일로 바쁜 사람들조차 적지 않았다. 알게 모르게 사진과 동영상이 '글' 사이로 빠르게 파고 들기 시작했다. 놀랄만큼 새로운 이야기 전달 방식이 등장했는데 어느 누가 케케묵은 옛날 방식만 고집하겠는가.
그와 동시에 알라딘 마을을 오랫동안 지켜왔던 느티나무와 같은 존재들도 말라 죽기 시작했다. 동네 터줏대감 같은 분도, 학식이 늘 남달랐던 마을 훈장어른 같은 분도 차츰 시야에서 멀어졌다. 새로 부임하신 총각 선생님을 차마 마주칠까 두려워 몰래 사립문 뒤에 몸을 숨긴 채 앙가슴을 떨던 짜릿한 흥분들도 차츰 사라졌다. 동네 콩쿠르에서 온 마을 사람들을 감동의 도가니에 빠트렸던 나이찬 처녀총각들의 기막힌 노래솜씨도 더이상 보기 어렵게 되었다. 온갖 궂은 일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두루 다 찾아다니며 언제나 정다운 말을 건네고 등을 토닥여 주던 정다운 고모님 같은 분들도 더는 찾기 힘들어졌다. 언제나 쭈삣거리기만 하던 수줍은 떠꺼머리 총각도, 걸핏하면 뺨부터 붉히던 곱디 고운 새악시 같던 분들도 어느새 다 사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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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동안에 문득 니체가 말한 '잊을 수 있는 능력'에 관한 글이 떠올랐다. 물론 여기서 '잊어야 할 대상'은 '과거에 일어난 일들 가운데 우리의 행복을 여전히 방해하는 나쁜 기억들'이다. 알라딘 마을에서 과거에 있었던 언짢았던 일들도 가급적이면 빨리 잊는 게 좋겠다 싶다. 니체의 말대로, '망각 없이 산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행복을 방해할 뿐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것이 현재의 것의 무덤을 파지 않으려면
가장 작은 행복이라도 항상 거기 있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면, 그것은 불쾌함과 욕망과 결핍이 가득한 가운데에서 변덕스러운 기분이나 기발한 착상처럼 단지 에피소드로 잠깐 등장하는 가장 큰 행복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행복이다. 가장 작은 행복에서도, 또 가장 큰 행복에서도 행복을 행복으로 만드는 것은 언제나 하나다. 잊을 수 있다는 것, 또는 학문적으로 표현한다면, 자신이 지속되는 동안 비역사적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순간의 문턱에서 모든 과거를 잊으면서 정착할 수 없는 사람은, 또 승리의 여신처럼 현기증이나 두려움 없이 한 지점에 서 있을 수 없는 사람은 행복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더 나쁜 것은, 그가 결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한번 생각해보라. 망각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인간이 어디에서나 생성만을 봐야 할 형벌을 받았다면, 그런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믿지 못할 것이고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할 것이며, 모든 것이 움직이는 점으로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만을 볼 것이며 이 생성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진정한 제자처럼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도 없을 것이다. 모든 행위에는 망각이 내재한다. 모든 유기체의 생명에는 빛뿐만 아니라 어두움도 속하듯이. 철저하게 역사적으로 느끼려는 사람은 잠을 자지 못하도록 강요당하는 사람이나 되새김질로만, 반복되는 되새김질로만 살아가야 하는 동물과 비슷할 것이다. 다시 말해, 동물이 보여주듯이 기억 없이 살아가는 것,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망각 없이 산다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또는 좀더 단순하게 내 주제를 설명한다면, 불면과 되새김질, 역사적 의미에도 어떤 한도가 있는데, 이 한도에 이르면 인간이든 민족이든 문화든 살아 있는 것은 모두 해를 입고 마침내 파멸한다.
과거의 것이 현재의 것의 무덤을 파지 않으려면, 과거의 것이 잊혀야 할 한도와 한계를 결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한 인간, 한 민족과 한 문화의 조형력이 얼마나 큰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조형력이란 스스로 고유한 방식으로 성장하고, 과거의 것과 낯선 것을 변형시켜 자기 것으로 만들며, 상처를 치유하고 상실한 것을 대체하고 부서진 형식을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이 힘을 거의 소유하고 있지 않아 단 한 번의 체험으로도, 단 하나의 고통으로도, 종종 단 하나의 연약한 불의로도, 단 하나의 조그만 상처로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피를 흘리는 사람이 있다. (중략)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단지 지평 안에서만 건강하고 강하고 생산적일 수 있다는 것은 보편적 법칙이다. 하나의 지평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길 능력이 없거나, 낯선 지평 안에 자신의 관점을 포함시키기에는 너무 이기적이라면, 그것은 지치거나 급격한 몰락으로 시들어갈 것이다. 명랑함, 양심, 즐거운 행위, 다가올 것에 대한 신뢰 ㅡ 이 모든 것은, 개인이나 민족에게서, 한눈에 개괄할 수 있는 것과 밝은 것을 밝힐 수 없는 것과 어두운 것으로부터 구분하는 하나의 선이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또한 우리가 제때에 기억하는 것처럼 제때에 잊을 줄 아느냐, 우리가 힘찬 본능을 가지고 언제 역사적으로 느껴야 하고 언제 비역사적으로 느껴야 할지 감지해내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바로 이것이 독자들에게 한번 고찰해보라고 권하고 싶은 명제다. 즉 비역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은 한 개인이나 한 민족 그리고 한 문화의 건강에 똑같이 필요하다.(292∼294쪽)
- 니체, 『비극의 탄생 · 반시대적 고찰』, <반시대적 고찰 Ⅱ_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 강조한 부분은 원문 그대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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