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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수 이야기 - 역사를 바꾼 은밀한 무역 ㅣ 예문아카이브 역사 사리즈
사이먼 하비 지음, 김후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 밀수 이야기 】 : 역사를 바꾼 은밀한 무역
_사이먼 하비 저/김후 역 | 예문아카이브
원서 : Smuggling: Seven Centuries of Contraband
1.
1568년 봄,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남아메리카의 외곽에 위치한 식민지마을 리오아차를 향해 출항했다. 그의 임무는 스페인이 독점하고 있는 상품의 ‘밀수’였다. 오늘날의 리오아차는 콜롬비아 최대 소금 생산지로서 수세기 동안 밀수꾼들의 영역으로 알려진 넓은 사막 가장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밀수는 이 지역의 주요 교역 수단이었다. 10년 전만 해도 비공식적인 항구에서 세금을 물지 않은 불법 수입품을 전반적으로 취급했는데, 특히 하이파이 오디오나 전자제품, 유명 브랜드 의류, 고급 주류 등이 거래됐다. 현재에도 이곳은 코카인 밀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지역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작은 항구에서 선박을 통하거나 수많은 비밀 활주로에서 항공편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2.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몰래 물건을 사들여 오거나 내다 파는’ 비공식적이고 불법적인 매매 행위인 ‘밀수(密輸, smuggling)’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노르웨이 트론헤임대학교 역사학, 미술사학 교수로 재직 중인 사이먼 하비이다. 학부 시절부터 역사적 유물과 골동품 예술 작품에 관심이 많아 주의 깊게 살피던 중 세계 유수 박물관에 전시된 대다수의 유물이 약탈과 밀수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사실에 주목하고 본격적으로 밀수를 연구하게 되었다.
3.
15세기 대항해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밀수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밀수’라는 키워드로 세계의 흐름을 바라보고 있다. 세계 무역의 흐름과 문명의 확산, 패권의 향방을 추적해간다. ‘밀수’라는 단어 자체는 매우 부정적이다. 지하 경제, 권력 장악을 위한 전쟁. 오늘날 전 세계에서 이뤄지는 밀수품의 교역 규모는 약 10조 달러 정도의 규모로 추산하고 있다. 전 세계 밀수꾼들이 힘을 합쳐 국가를 세우면 미국이나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제 대국이 되는 셈이다.
4.
실크로드는 어떻게 거대 ‘밀수 통로’가 되었는가? 나폴레옹이 ‘영국 금화’를 몰래 사들인 이유는? 왜 미국은 ‘마약 밀수’ 항공사를 40년 동안 운영했는가? 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가 피로 물든 보석이 된 까닭은? 등의 각 이슈마다 살을 붙인다면, 책 한 권의 분량도 나올법하다.
5.
리뷰 서두에 등장하는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사실 엘리자베스 1세의 특사나 다름없었다. 세계 일주 항해를 시작하려는 프랜시스 드레이크에게 하달된 명령은 “나의 해적은 들으시오, 그대의 함선을 가득 채워서 돌아오시오.”였다. 스페인이 독점하고 있던 ‘향신료’의 밀수가 그의 미션이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탐험가이자 밀수꾼이었다. 나라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은 ‘공인 밀수꾼’.
6.
‘밀수’를 세 개의 키워드로 풀어나간다. 낭만, 반역, 권력 등이다. 밀수업이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직업은 아니겠지만, 매우 오래된 전문직이었음에 틀림없다는 언급에 공감한다. 현재처럼 국가와 국가 간에, 개인과 개인 간에 합법적인 거래가 되도록 교역의 틀이 잡힌 시점에도 밀수는 진행형인데, 하물며 과거에는 어땠을까? 충분히 짐작이 가는 부분이다.
7.
밀수품목 중에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지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밀수가 전한 사상(思想)도 있다.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는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중국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이 마르코 폴로에게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네가 무엇을 밀수하는지 고하라. 분위기, 신의 가호, 애달픈 노래들을.” 밀수는 실제로 고귀한 사상을 실어 날랐다. 그 배후에 영웅적이고 사상적인 동기가 존재하기도 했다. 밀수꾼들이 볼테르가 쓴 《철학사전》을 갖고 제네바를 출발해 주라 산맥을 넘어 아직 혁명 전인 혼란의 프랑스로 들어왔을 때, 당시에는 포르노에 불과했던 《깡디드》도 함께 가져올 수도 있었다.
8.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밀수의 거의 모든 형태와 밀수에 관여한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개인을 넘어 국가가 직접 밀수에 관여한 경우도 많다. 그러다보니 밀수 강국이 경제 대국이 되기도 했다. 영국은 밀수를 토대로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을 세웠다. 미국은 ‘마약과 무기’ 밀수에 대해 엄청 예민하고 강력한 제재를 가하면서도, 미국 군부와 백악관 참모들, CIA까지 조직적으로 관여한 ‘이란-콘트라 스캔들’도 일으킨 적이 있다.
9.
저자인 하비 교수는, 밀수가 없었다면 문명의 확산도 없었고 지금의 세계화도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한다. 오해소지가 있는 말이지만, 15세기에서 16세기 대항해 시대 때 신흥 식민지 개척 세력에 의해 밀수와 탐험이 복잡하게 서로 얽혀가는 과정과 그 이후 이뤄진 밀수 문화 과정의 흔적, 제국의 건설 과정을 들여다보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어쨌든 ‘밀수’는 영화나 소설에서는 다뤄진 바가 있지만, 이렇게 한 권의 텍스트로 정리된 것은 이 책이 처음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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