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러와 미켈란젤로 - 주변과 중심 신준형의 르네상스 미술사 1
신준형 지음 / 사회평론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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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준형의 르네상스 미술사(1)

 

뒤러와 미켈란젤로신준형 / 사회평론

 

 

왜 뒤러와 미켈란젤로인가? 이 두 사람은 미술사에서 크게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서로 태어난 곳은 너무 멀리 떨어져있다. 북유럽과 이탈리아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두 화가의 그림을 소개하는 안내서에서 넘어 좀 더 인문학적인 질문을 다뤄보고 싶다고 한다.

 

 

우선 저자는 한국에서 서양 인문학을 한국어로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스스로 묻고 답한다. “학자들은 두 가지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한국어로 된 인문학 저술의 필요성을 부정할 수 없다면 최선을 다해서 한국어로 양질의 연구 저술을 써나가는 것이다. 물론 서양 언어로 쓰이는 논저들에 필적하는 수준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우리보다 더 유구한 서양학의 전통을 가진 일본의 학자들이 취하고 있는 바이다. 두 번째 방식은, 서양의 문학, 역사, 철학을 일반인이나 비전공자들이 접근하기 쉽게 소개하고 가르친다는 자세로 저술에 임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연구라기보다는 교육의 측면을 중시한 저술일 것이다. 어찌 보면 첫 번째 방향보다 훨씬 더 중요한 과제일 수 있지만, 현행 제도 하에서 국내 대학의 연구자들은 이러한 고급 교양서를 쓰는 것으로는 연구업적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이 책의 저자인 고고미술사학자 신준형 교수는 여기에 한 가지 방식을 더 보탠다. 뒤러와 미켈란젤로의 미술에 대한 책을 기획하며 잡은 방향은 조금 다른 각도라고 한다. 그것은 서구의 학자들이 하지 않은 질문을 던지는 것, 이방인의 시각으로, 즉 유럽 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사람의 시각으로 솔직한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의 책을, 옥시덴탈리즘을 인정하는 책을 써보자는 것이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는 책을 한번 써보자는 것이다.

 

 

@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 ;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났지만, 동일한 인식 구조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이 서양에 의해 구성되고 날조된 동양에 관한 인식이라면, 옥시덴탈리즘은 동양에 의해 구성되고 날조된 서양에 관한 인식이다.

 

 

 

 

이 책은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종교, 정치, 문화, 교역의 시대에 세계의 수도에서 최고의 조각가, 화가, 건축가로 추앙받았던 미켈란젤로와, 알프스 이북에서 로마에 버금가는 르네상스의 도시를 세우고자 일군의 지식인들과 투합했던 뒤러를 테마로 잡았다. 미술은 기본적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자신을 바라보고, 이것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해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두 도시의 예술가는 세계와 자신을 어떻게 그려냈을까? 이들이 바라보고 그려내는 방식에는 자신들이 살았던 두 도시의 다른 환경과 조건이 어떻게 작용했을까? 이것이 나의 질문이다.”

 

 

 우주의 중심 예수 

 

종교개혁과 가톨릭개혁(반종교개혁)으로 뒤흔들린 종교적 격변의 16세기. 과연 이 시기를 대표하는 두 미술가 뒤러와 미켈란젤로는 그토록 심오한 의미를 갖는 예수의 몸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뒤러는 매우 르네상스적인 예수의 몸을 그려냈다. 중세의 도상 전통을 이어받되 르네상스 미술이 제공한 여러 시각적 기법들을 사용해 메시지의 호소력을 극대화시켰다. 반면에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를 뛰어넘는 예수의 몸을 만들어냈다.”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미술가라고 단정하기엔 너무나 개성이 강한, 독특한 이미지를 남겼다. 일탈된 행동의 에피소드도 많다. 자연히 그의 작품에도 과도한 면이 담겨있다는 해석이다.  

 

 

 

책의 전반부의 주인공이 신과 성모 마리아였다면, 후반부의 주인공은 인간이다. 시작은 역시 몸, 하지만 이번에는 신이 아닌 인간의 몸이다. 저자의 관심은 양식적, 형태적 측면에서 바라보는 미술적인 몸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담고 있는 형상으로서의 몸, 더 정확하게는 인간상(人間像)이라고 해도 좋을 인간의 몸이다. 즉 화가들이 자신을 포함한 인간을 어떻게 인지하고 어떻게 표현했는가 하는 약간은 추상적인 이야기가 이어진다.

 

 

뒤러나 미켈란젤로가 지닌 인간에 대한 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선 뒤러는 르네상스적인간의 육신을 표현하고자 상당히 노력했다. 인체비례에 대한 책을 네 권이나 썼고, 베네치아로 두 번의 여행을 떠난 것도 고전적인 인체비례를 터득하려는 목적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그렇게 균형 잡힌, 혹은 의외로 균형을 벗어난 몸의 표현을 통해 뒤러가 어떤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느냐 하는 것이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당시의 규준적인 인체상을 끝없이 벗어나는 다소 기괴한 인체 이미지를 추구했다.(....) 두 미술가가 육신의 물적 요소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표현하는 미술 기법을 완성하는데 전념했다고는 볼 수 없다. 이들이 인간의 몸을 통해 그리고자 한 것은 인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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