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선비님네들은 이웃나라를 오가면서도 굳이 통역이 필요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한문으로
필담을 주고 받으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역사서에도 그 기록을 볼 수 있다.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
에서도 필담이 통했다.
2. 조선문인의 일본견문록인 신유한(申維翰)의 해유록(海遊錄)을 보면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일
본을 방문한 청천(靑泉) 신유한이 일본의 문사(文士) 또는 관리들과 붓, 벼루, 종이 두루마리를
펼쳐놓고 시(詩)를 지어 주고 받는 장면이 나온다. 詩뿐인가. 필담을 통해 우리나라의 과거제도가
어떠한지, 청천이 합격한 과거시험은 어느 해에 시행되었으며 어떤 문제가 출제되었는지, 시험을
주관한 관리의 이름은 무엇인지 등을 묻기에 곧 글로 써서 답해 주기도 했다.
3. 한문으로 詩를 지어내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이 책에 나오는 7언절구 詩들처럼 7자에
딱딱 맞춰서 시다운 시, 글다운 글을 만드는 일은 대단한 경지다. 한문 실력과 시를 그려내는 심
력(心力)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4. 이 책의 저자 정민 교수는 아침에 학교 연구실에 올라와 컴퓨터를 켜면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매일 한시 한 수씩을 우리말로 옮기고 감상을 적어나갔다고 한다. 재워둔 곶감처럼 든든해서 이따
금 하나씩 뽑아 혼자 맛보곤 했다. 이 책은 저자가 삼국부터 근대까지 명편 7언절구 3백수를 가려
뽑고 오늘날 독자들의 감상에 닿을 수 있게 풀이했다.
5. 雨歇長提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 정지상
비 갠 긴 둑에 풀빛이 어여쁜데
님 보내는 남포에서 슬픈 노래 부르네.
대동강 저 물은 언제나 마르려나
이별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 보태느니.
이별 그리고 해후를 기다리는 마음. 대동강 물이 마른다는 것은 거의 일어나기 힘든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대동강 물이 마르도록 그대가 보고 싶다.
저자는 이 시를 읽으며 고등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만났던 이수복 시인의 시를 상기한다.
"이 비 그치면 /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 /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
늘엔 /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 이 비 그치면 / 시새워 벙그러질 고운 꽃밭 속 / 처녀애
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과 같이 /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6. 산새. "노목이 우거진 옛 시내에 와 보니 / 집집마다 푸성귀로 배조차 못 불리네 / 산새는 근
심 겨운 백성 맘도 모른 채 / 다만 그저 숲 속 향해 마음껏 노래하네." - 김약수
사람이 살아가며 아파서 죽는 것보다 굶어 죽는 것처럼 비참하고 애통한 것이 없으리라. 위정자들
의 잘못이든 하늘이 잠시 한눈 팔 때(기근)이든 먹을 것이 없어서 피골이 상첩하다 결국 숨을 거
두는 모습을 바라보는 남은 이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안타깝다.
"이쪽은 배고파서 울 힘조차 없는데, 무슨 봄날이 저리도 신나는지 하루 종일 조잘댄다."
7. 군밤. "서리 뒤에 터진 밤톨 반짝반짝 빛나니 / 젖은 새벽 숲 사이엔 이슬 아니 말랐네. / 꼬
맹이들 불러와 묵은 불씨 헤집자 / 옥 껍질 다 타더니 황금 탄환 터지누나." - 이인로
옥껍질, 황금탄환 이라는 표현이 내 손에 밤 한톨이 쥐어진 듯 고맙다.
"황금빛 밤 알맹이가 총알 튀어나오듯 여기저기서 뻥뻥 터진다. 통쾌하다."
8. 부끄러움. "추운 새벽 빈 집에 맑은 바람 일더니 / 개인 저녁 긴 하늘 구름장이 걷히누나. /
문밖의 몇 사람들 손이 모두 얼었는데 / 나 홀로 비단 이불 덮은 것이 부끄럽네." - 이규보
때로 반복되는 일상. 수십년간 같은 일을 해오면서 진력이 날 때도 있다. 다른 것도 해보고 싶은
욕심도 간혹 생긴다. 그런데 딱히 지금하는 일보다 더 잘할만한 일이 없다. 매운 바람이 몹시 불
던 어느 겨울날 병원 창밖을 통해 보이던 과일장수를 보며 생각을 고쳐먹었다. 덥건 춥건 실내에
서 하루를 보내는 '복에 겨운'생각이었다.
"이 시는 이규보가 작목사(斫木使)가 되어 재목을 구하러 갔을 때, 추운 겨울 고생하는 아랫사람
들을 보며 안쓰러움을 못 이겨 지은 詩다.(...)윗사람이라고 따뜻한 비단 이불 속에 누워 그 소리
를 듣고 있는 내가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