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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의 종교를 넘어
달라이 라마 지음, 이현 옮김 / 김영사 / 2013년 2월
평점 :
철학자 대니얼 데닛은 이런 말을 통해 종교인들을 긴장시키고 있군요. "이제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런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스스로의 종교에 대해 심사숙고해서 종교가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자신들의 생각이 옳은가를 검증해야 합니다." 덧붙여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의 현상으로서의 종교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현상에 속하는데도 인간은 부끄러울 정도로 여기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사실 종교를 설명하는 것은 종교인을 설명하는 것보다 간단할 수도 있습니다. 인류에게는 종교가 참으로 많습니다. 종교의 본질이 종교인들에게 제대로 심어지지 않고 있는 탓이라는 추측을 해봅니다. 그렇기에 종교인들은 대니얼 데닛의 말대로 종교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입증을 해야하는 숙제가 남습니다. 과연 개개인의 삶속에서 믿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를 끊임없이 돌아 봐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에선 저 역시 자유롭지 못합니다.
달라이 라마 - 몽골어로 '달라이'는 바다를 뜻합니다. 티베트어 '라마'는 산스크리트말로 '구주'에 해당하여 '영적인 스승'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바다와 같은 지혜를 가진 스승'이라는 뜻이 됩니다. 달라이 라마는 중국의 티베트 통치에 반대하여 인도로 망명합니다. 인도에 티베트 망명정부를 수립하여 지도자가 된 것은 1959년입니다. 그 후 지금까지 불교의 자비를 내세운 세계평화를 주창하여 왔기에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평화와 자비의 상징으로 여겨져서 노벨 평화상이 주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상이 주어졌지만, 달라이 라마는 그러한 상들에 연연하지 않으리라고 믿고 싶습니다. 티베트 사람들은 달라이 라마가 자비의 보살인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고 믿고 있다고 합니다. 또 달라이 라마가 죽은 뒤에는 차기의 달라이 라마가 다시 환생할 것이라고 믿고 있지요. 그러나 지금의 14대 달라이 라마(텐진 갸초)는 자신이 '깨달은 자'라는 것을 아직까지 천명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2011년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망명 정부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난 달라이 라마는 종교 지도자로 살아온 일생을 돌아보며 종교의 역할에 대해서 깊이 고민을 합니다. 이 책에선 그런 달라이 라마의 생각이 차분하면서도 힘있게 독자의 잠든 의식을 일깨워줍니다. "여기에 쓴 내용이 좀 더 자비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진심 어린 소망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방식일지라도 상관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룻밤 새 이 세상을 바꾸지는 않을 것입니다. 변화는 늘어나는 자각을 통해 서서히 다가올 것이고, 자각은 교육을 통해서 올 것입니다. 만약 이 책을 읽는 사람이 여기 쓰인 내용 중 어느 한 부분이라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노력은 보상받은 것입니다. 그런 도움을 받지 못한 독자라면 이 책을 다른 데로 치워놓는 것을 불편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노 종교지도자의 진심과 겸손이 담긴 글 입니다.
저자는 지난 수십 년을 되돌아보니 기뻐할 이유가 많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동감하는 부분입니다. 의학의 발전으로 치명적인 병들을 치료하는 길이 열렸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가난에서 구제되어 현대교육과 의료혜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인권문제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고,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이상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긍정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반면에 여전히 인류의 고통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생존의 위협, 인권 사각지대, 테러, 전쟁에 대한 불안, 불평등, 부정부패, 불공정 등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협은 더 큰 두려움을 만들지요. 스트레스와 불안, 우울, 고독감 등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떼어놓으려고 해도 안 떨어지는 찰거머리 같은 존재들입니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점들이 삶의 외적 측면과 물질적 측면에는 너무 많은 주의를 기울이는 반면, 도덕 윤리나 내적 가치는 무시한다는 점에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도움을 어디서 받아야 할까요?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해온 것처럼 각기의 종교에서 내적 가치를 찾아야 할까요?
종교는 과거에도 그러했고, 미래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 땅을 살아감에 어떻게든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도덕적 지침과 삶의 의미를 제공한다는 그 모든 혜택을 제외하고는 오늘날의 세속적인 세상에서 종교 하나만으로는 도덕의 토대가 충분치 못하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하나의 종교를 기반으로 한 도덕은 일부에게만 다가 갈 수 있고 모든 사람에게 의미가 있진 않다는 것입니다.
"무관심은 그 자체로 이기심의 한 가지 형태입니다. 우리가 도덕에 접근하는 방식이 진정으로 의미 있으려면 당연히 세상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만 합니다. 이것이 전 지구적 책임감의 원리이며, 현세적 도덕에 접근하는 내 가르침의 핵심 부분입니다."
저자는 '현세적 도덕'이라는 표현이 종교나 종교인을 향한 적대감이 결코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모든 종교에 대한 깊은 존경과 관용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또한 종교가 없는 사람을 아우르는 포용적이고 차별 없는 태도를 뜻하기도 한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종교를 주된 주제로 삼은 책이 아니라고 합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이해하고 존경하도록 만들기 위해, 얼마간의 시간을 내어 종교와 도덕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가치있는 일이라고 권유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현세적 도덕에 대한 포괄적인 접근을 위해선 두 가지의 기본 원리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 존재라는 우리의 공통성'과 '상호의존성'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살아가며 필요한 덕목 중에 분별력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분별력은 개인 차원에서의 도덕적 자각에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지성을 이용하는 것이 우리가 이해애 도달하는 방식이며, 이해는 자각의 토대입니다. 저자는 도덕적 자각, 다시 말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은 마법처럼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이성을 사용하여 생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점에서 도덕적 자각에 대한 교육은 다른 종류의 교육과 다르지 않다는 이야깁니다.
"파괴적인 감정을 조절하기 위한 내면 계발을 위해 두 가지 접근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파괴적 잠재력의 영향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 안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긍정적 특성을 키우는 방법을 찾아야만 합니다."
보통 우리가 종교적 논리에 휘말려서 대화의 중심을 잃게 될 때 쓰는 말이 있습니다. "종교를 떠나서.." 그러나 이 노 종교인은 우리의 삶을 평화롭게 공유하는 세상이 되기 위해선 "종교를 넘어서.." 라는 마인드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종교가 있던 아니던 간에 도덕적 삶을 통해 남도 살고 나도 사는 평안의 일상이 되길 소원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 서로 살아가면서 낙심과 좌절의 시간이 줄어 들겠지요.
8세기 인도 사상가 산티데바의 글로 리뷰를 마무리 합니다.
해답이 있다면
낙담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해답이 없다면
낙담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