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 역사 2 - 19세기 유럽의 역사적 상상력
헤이든 화이트 지음, 천형균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독일의 철학자이며 지성사가인 카를 뢰비트는 궁극적으로 ‘역사의 개념’이 신화, 그리고 중세 초에서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의 사학 사상을 지배해온 역사 지식과 신화 간의 혼동이 초래한 흉악한 ‘역사 철학’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은, 오직 부르크하르트와 더블어서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뢰비트는 부르크하르트가 발전시킨 우아함과 기지,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파악하려는 욕구인 ‘사실주의’와 순수한 ‘관조’로서의 지식에 내포된 반동적인 의미가 바로 특수한 형태의 신화적 의식의 요소였음을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부르크하르트는 역사적 사고를 신화가 아니라 당대의 상상력을 사로잡고 있던 역사의 신화, 즉 로맨스, 희극, 비극의 신화로부터 해방시켰을 뿐이었지요.

 

그의 스승인 랑케처럼, 부르크하르트도 역사를 당시의 정치적 분쟁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했으며, 적어도 역사 연구 - 사실은 보수주의의 명분에 기여할 따름인 역사연구 - 가 초래한 정치적 교리를 역사 연구가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부르크하르트는 랑케의 ‘역사철학’을 ‘역사의 ‘이론’이라고 불렀으며, 그것을 설명과 분석의 목적 때문에 사료를 ‘자의적으로’ 배열하는데 불과하다고 설명했지요. 그의 염세주의가 그로 하여금 사건에는 어떤 ‘성격’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설의 사치조차 용인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사건에 ‘실질적인 성격’을 부여하려는 기도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염세주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통해 부르크하르트의 정신 속에서 지적 근거를 찾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포이어바흐가 마르크스나 정치적 좌파에게 한 것과 같이, 쇼펜하우어는 부르크하르트와 정치적 우파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염세주의의 대부 쇼펜하우어를 만나보겠습니다. 얼마 전 얼핏 TV 프로그램에서 쇼펜하우어 운운하는 이야기가 들려서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패널들 5~6명이 나오고 MC가 괄호 넣기 문제를 내는 프로그램 이었지요. 문제는 “쇼펜하우어가 이야기하길 상대방의 논쟁에서 이기는 것은 ( )이다.” 이었습니다. 답이 궁금해서 잠시 지켜봤더니, 어처구니없게도, 아니 ‘쇼펜하우어답게’ 라고 해야 할까요? 괄호 안에 들어간 답은 (인신공격)이었습니다. 그냥 웃고 말았지요.

1840년대까지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1850년 이후에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전문적인 철학자들 사이에서보다 오히려 예술가, 작가, 역사가, 정치 평론가들 사이에서, 다시 말하면 철학적인 데 관심을 갖고 있거나 철학 체계에서 행동의 근거를 찾으려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럽의 지적 생활의 중심으로 떠올랐습니다. 세계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개념은, 1850~1875년 사이에 지식인들의 욕구에 특히 적합했다고 합니다. 또한 수많은 젊은 저술가들과 사상가들이 극복해야 할 출발점임과 동시에 장애물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니체, 바그너, 프로이트, 만, 부르크하르트 등은 모두 그 개념으로부터 배웠고, 또 창조적인 예술가와 인간의 고통에 대한 학습자로서 그들 각자가 느낀 삶의 불만을 설명한 스승을 쇼펜하우어에게서 발견했습니다. 이들 다섯 사람 가운데서 두 사람은 끝까지 쇼펜하우어의 신봉자로 남아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바그너와 부르크하르트입니다.

 

“그대가 살고 있는 동안에 가질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것만을 추구하도록 힘쓰라. 물질적인 사물은 변하고 있으므로 이 욕구는 비물질적인 것을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욕구가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하고 있다면 욕구도 소멸되어 버리기 때문에, 완전히 개인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 쇼펜하우어의 메시지입니다.

 

역사학자들과 역사 철학자들간의 예민한 신경다툼이 있었습니다. 역사철학은역사철학자가 전문적인 역사가의 저작에 내포되어 있는 설명적이며 설화적인 전략을 들추어내려고 하기 때문에, 역사학에 대한 하나의 위협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지요. 역사철학은 특히 학문적으로 인정된 전략을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전략으로 바꾸려는 욕구의 산물이므로, 역사학에 더 큰 위협이 되기도 했습니다.

 

마르크스니체는 고통과 갈등의 상태로부터 벗어난, 건전한 역사적인 삶의 탄생을 인식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두 사람은 사학(史學)상 그들과 유사한 인물이 없었다는 의미에서 다 같이 극단적인 낙관론자들이었습니다. 랑케의 낙관론은 개인의 악덕을 공익으로 전환 할 수 있다고 주장할 만한 이론적인 근거에서 주장된 것이 아니었지요. 미슐레의 낙관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은 미슐레가 심각하게 느끼고 역사적 합리화라는 방법을 통해서 시도한 모든 것을 가리키는 어떤 분위기나 욕구를 반영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토크빌과 부르크하르트에게도 낙관론의 근거는 없었지요. 마르크스와 니체는 낭만주의나 아카데믹한 사실주의자들로 자처한 사람들의 낙관론은 물론, 그들과 유사한 아마추어 사가들의 비관론까지도 비판했습니다. 19세기 후반의 ‘역사주의의 위기’에 대한 마르크스와 니체의 공헌은, 바로 객관성 그 자체에 대한 개념의 역사화에 있었다고 봅니다. 그들에게 역사적인 사고는, 단순히 역사의 장에 관한 자료에 ‘적용’할 수 있는 객관성의 기준이 가져다 준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문제시한 바로 객관성 그 자체의 본질이었습니다.

 

니체는 비합리주의로의 퇴각에 의해서만 벗어날 수 있었던 절망 상태에 빠지지 않고, 어떻게 인간이 아이러니 형식으로 설명되고 구성된 역사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해결하려고 한 역사철학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19세기의 모든 역사철학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탁월한 역사가였던 베네데토 크로체입니다. 크로체는 철학자로서는 물론 전문적인 학자로서도 출발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대학도 마치지 못했고, 대학에서의 지위도 얻지 못했지요. 실제로 당신의 대학 문화에 대한 그의 견해는 니체나 부르크하르트와 매우 유사한 경멸감을 내포한 것이었습니다. 그는-부르크하르트와 마찬가지로- 교양 있는 학자였으며, 개인의 고통과 공동생활의 권태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역사 연구로 방향을 돌린 아마추어였습니다. 그의 초기 저작은 엄밀한 의미의 용어로는 골동품 수집적이었고, 역사적이라기보다는 고고학적인 것이었으며, 구 나폴리의 민속생활, 건축에 관한 연구로 구성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893년에 이르러 크로체는 〈예술의 일반적 개념에 내포된 역사〉라는 제목의 에세이로 역사철학의 분야에 뛰어들게 됩니다. 사상에 대한 그의 집념과 노력은, 그로 하여금 철학자로서의 생애를 시작하도록 만든 이 에세이에 잘 드러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 메타 역사 』1, 2권을 통해서 많은 역사가와 역사철학자들을 만나봤습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깊이 있게 그들을 만나보는 길입니다. 이 헤이든 화이트의 시각을 통해 얻어진 밑그림 위에 역사서를 한 권 한 권 읽어 나갈 때마다 구체화된 형상이 빚어질 것입니다. 전적으로 저자의 의견이 옳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마음도 듭니다. 그러나 저자가 언급한 역사가와 역사철학자들의 저서들을 제대로 못 봤기 때문에 반박할 자료가 전무한 상태입니다. 앞으로 그들의 저서를 읽을 때 곁에 두고 참고 자료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역사서를 읽어보고자 하는 분들이나 기왕의 역사, 역사철학서들을 읽으신 분들이 참고로 하시면 큰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역사관련 서적으로만 보기에는 아까운 감도 듭니다. 19세기 사상과 철학의 흐름을 알 수 있는 명저(名著)로 추천 드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