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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 조선을 관통하다 -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정민 지음 / 김영사 / 2022년 7월
평점 :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 -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_정민 / 김영사
을사년(1785) 봄, 이승훈과 정약전, 정약용 등이 장례원(掌禮院)앞 중인(中人) 김범우의 집에서 설법하였다. 이벽이란 자가 푸른 두건을 머리에 쓰고 어깨에 드리운 채 정 가운데 앉아 있었고, 이승훈과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삼형제와 권일신 부자가 모두 제자를 일컬으며 책을 낀 채 모시고 앉아 있었다. 이벽이 설법하며 가르치는 것이 우리 유가에서의 사제의 예법에 비하더라도 더욱 엄격하였다. 날짜를 약속해서 모인 것이 거의 몇 달이 지났으므로, 사대부와 중인으로 참석한 자가 수십 인이었다. 추조(秋曹)의 금리(禁吏)가 그 모임을 도박판으로 의심해서 들어가 보니, 대부분 낯에 분을 바르고 푸른 두건을 썼는데, 손가락을 드는 것이 해괴하고 이상했다.
_《벽위편》에 실린 이만채(李晩采)의 글
이 모임에 다산 삼형제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설법’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를테면 미사의 집전과 강론을 말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 모임은 ‘을사추조적발’ 사건으로 기록된다. 명례방 집회 적발 현장에서 정작 당황한 것은 형조의 포졸들이었다. 얼굴에 분까지 바른 양반가의 자제들이 푸른 두건을 쓴 채, 푸른 제건을 한 키 큰 사내를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 있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십자가가 놓였고, 벽에는 이상한 서양 사내의 화상이 걸려 있었다. 포졸들은 노름판인줄 알고 덮쳤다가 싸한 현장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허둥댔다. 뭐지? 방 안의 사내들은 당황한 포졸들과 달리 도리어 침착했다. 수십 명을 줄줄이 묶어 체포하고, 현장의 이상한 물건들을 압수한 뒤 보고가 올라갔다. 이제 막 형조판서로 부임한지 며칠 되지 않았던 김화진(金華鎭, 1728~1803)은 이 일로 몹시 난감한 처지가 되었다. 실로 미묘한 타이밍에 난감한 사건이 터진 것이다. 붙들려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한다하는 남인 명문가의 자손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평생 처음 포승줄에 묶여 와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미묘한 타이밍이라는 것은 이 무렵 《정감록(鄭鑑錄)》역모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조정은 역모 관련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던 상황에서, 전혀 다른 심각한 문제 하나를 더 얹을 여력이 없었다. 판서 김화진은 다산 삼형제를 포함한 수십 명의 명례방 집회 참석자들을 훈방 조치했다. 단, 장소 제공자인 김범우만 감옥에 가두는 것으로 이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러나 사건은 이상하게 흘러갔다. 숨을 죽이고 근신해야 마땅할 당사자들이, 압수해간 예수 성상과 십자가 및 책자를 돌려달라고 집단으로 형조까지 항의 방문을 한 것이다.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 중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을 주목한다. 백서(帛書)의 황사영이다. 정민 교수는 황사영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보석처럼 빛났던 소년 황사영’이라고 소개한다. 황사영의 소년 시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790년 9월 12일로 돌아간다. 이 날은 증광시(增廣試)가 열려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국왕 정조는 이문원(摛文院)에 납시어 합격자를 소견했다. 임금은 그들 중 70세 이상 고령 합격자 5인과 20세 이하 합격자 5명을 따로 불렀다. 그들은 임금이 지켜보는 앞에서 한 차례 더 시험을 치렀다. 노인은 ‘노인성(老人星)’을 제목 삼아 부(賦)를 짓고, 소년들은 ‘소년행(少年行)’을 제목으로 시를 지었다. 임금은 이들이 제출한 답안지를 직접 채점했다. 황사영은 이날 16세의 최연소 합격자로 이 자리에 참석했고, 임금이 손수 점수를 매긴 두 번째 답안지로 다시 1등의 영예를 안았다. 정조는 황사영에게 “네 나이가 스무살이 넘으면 바로 벼슬길에 나와 나를 섬기도록 하라”고 명했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주요순교자약전》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국왕은 그를 각별히 아껴 환대의 표시로 그의 손을 잡기까지 했다. 그런 일은 이 나라에서는 이례적인 총애였다. 그 일이 있은 뒤 알렉시오(황사영)는 항상 손목에 띠를 두르고 있어야 했고, 그때부터 사람들은 더 이상 함부로 그의 손을 만질 수 없었다.” 임금은 그를 아껴 각별한 총애를 내렸고, 그는 감격해서 평생 어수(御手)가 닿았던 그 손목에 비단을 감았다. 하지만 그 일이 있고 몇 해 뒤 그는 임금 대신 천주의 길을 택했다.
황사영은 스무 살이 되던 1794년 천주교에 입교했다. 20대 초반, 그는 이미 조선 교회를 대표하는 중심인물로 자리 잡는다. 1795년 이후 천주교의 확산세가 가팔랐지만, 탄압도 만만치 않았다. 황사영이 블랙리스트에 오른다. 의금부의 집요한 추적에도 황사영의 행방은 묘연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다 체포된 충북 제천의 배론 토굴은 현재 천주교 성지로 남아있다. 그는 이곳에서 백서(帛書)를 작성했다. 그가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백서를 본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글의 말미, 황사영이 북경 주교에게 요청한 사항 중, 교황이 중국 황제에게 편지를 써서 조선 국왕을 협박하고, 청나라가 조선을 부마의 나라로 삼아 내정을 감호(監護), 즉 감독, 보호해달라면서, 수백 척의 서양 선박에 수만 명의 군대를 끌고 와 조선에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도록 강박해달라고 요청한 내용이 문제가 되었다. 이 편지로 인해 천주교도는 이전 무부무군(無父無君), 패륜멸상(敗倫滅常)의 무리에서 순식간에 나라를 전복시키려는 역모집단으로 변했다. 그리고 이것은 두고두고 천주교 박해의 근거가 되었다. 황사영은 이 백서로 인해 대역죄인(大逆罪人)이 되어 1801년에 능지처참을 당한다.
초기 교회사 연구에 매진했던 이 책의 저자 정민 교수는 1770년대 중반 이후 조선 천주교회 태동기부터 1801년 신유박해까지 길지 않은 시기를 치밀한 고증과 자료 수집으로 정리했다. 조선을 관통한 서학(천주교 또는 천주학)이 일으킨 소용돌이와 그 와중에 벌어졌던 일들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들을 찾아서 살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꾼 서학의 실험은 정치사의 힘겨루기와 맞물린 톱니바퀴에 끼여 모두에게 깊은 상처만 안겼다. 서학과의 접촉과 접속은 내부의 긍정적 변화를 이끄는 동력이 되지 못했다. 위정척사의 명분 아래 세도정치에 날개만 달아주었다. 그 결과 수많은 ‘서학죄인’의 순교의 피가 산하를 붉게 적셨다. 이 책을 한국 교회사에 관심 있는 독자들과 천주교인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 받아 작성한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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