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 이야기 5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5
김명호 지음 / 한길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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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인 이야기 】  (5) 김명호 / 한길사

 

 

중국 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연안을 찾은 캐나다 의사 노먼 베쑨은 한 여학생에 대한 찬사를 잊지 않았다. “몇 개월 전만 해도, 이 학생은 사치와 향락의 늪에 빠져 있던 뭇 남성들의 애완물이었다. 지금은 묽은 좁쌀죽과 호박으로 끼니를 때우는 게 고작이지만 소나무를 오르는 다람쥐처럼 활발하고 패기가 넘친다.” 노먼 베쑨은 이 여학생이 마오쩌둥의 부인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이듬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중국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여인이 되는 것도 보지 못했다.

 

 

1976년 10월 6일 밤, 중공 원로들이 4인방(4人幇)을 체포했다. 명목은 격리심사였다. 거사의 주역들은 네 사람을 중앙경위단이 관할하는 지하실에 감금했다.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도 엉뚱한 곳에서 첫 밤을 보냈다. 남편 사망 20여 일 후였다. 장칭은 나름대로 대우를 받았다. 26년 후, 감시 책임자였던 군 간부가 구술을 남겼다.

 

 

“장칭은 왕흥원(王洪文)이나 장춘차오, 야오원위안과는 신분이 달랐다. 누가 뭐래도 마오 주석의 부인이었다. 4인방의 수괴라 할지라도 신경을 썼다. 양탄자가 깔린 커다란 방에 제대로 된 침상과 손잡이가 있는 안락의자를 준비했다. 입식 세면대와 좌식 변기, 커다란 욕조 등 위생시설도 완벽했다. 조사실에 갈 때도 평소 입던 의복을 착용케 하고 수갑도 채우지 않았다. 하루 세 끼는 중난하이의 간부식당에서 자동차로 공급했다.”

 

 

마오가 살아있을 때 그 후에도 그의 주변 인물 중 사람들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사람이 장칭 일 것이다. 4인방 체포 소식이 알려지자 장칭에 관한 온갖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문혁 시작 얼마 후부터 주석은 장칭을 꼴도 보기 싫어했다.” 반면 장칭의 비서들은 그와 같은 소문을 한결같이 부인했다고 한다.

 

 

“말 같지 않은 소리다. 장칭은 중앙문혁 소조의 제1부조장이었다. 주석의 비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문혁 초기 장칭은 댜오위타이에 머물렀다. 오후에 회의가 없는 날엔 거의 매일 주석이 있는 곳으로 갔다. 장칭이 주석의 숙소로 가는 것은 일마치고 집으로 가는 것이지 특별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주석이 장칭을 멀리한 것은 사망 몇 년 전부터였다.”

 

 

1930년대 중반, 상하이에서 연기자 생활을 할 때 장칭은 자기 관리에 소홀했다. 유명세를 타기 위해 일부러 그랬다는 말도 있지만, 가는 곳마다 남자 문제로 사고를 쳤다. 마오쩌둥과 결혼하면서 쑥 들어갔던 전설들이 몰락과 동시에 다시 튀어나와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대표적인 것이 세 가지 가짜였다. “장칭의 두발은 가짜다. 가슴과 엉덩이도 마찬가지다. 가짜가 아니라면 여자를 좋아했던 주석이 멀리했을 리가 없다.” 이 외에도 19금 이야기가 여럿 보태진다. 어쨌거나 장칭은 중국 인민들의 민심을 많이 잃었었다는 추측을 하게 된다.

 

 

장칭의 간호사를 겸했던 여비서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복잡한 시대에 태어나 마오 주석을 만나는 바람에 중국예술사는 몇 장이 잘려나갔다고 봐도 된다. 사나웠다고 비난들을 하지만, 바보 멍청이가 아닌 다음에야 나이 들어서 그 정도 사납지 않은 여자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 문혁 시절 장칭에게 밉보여 감옥까지 갔다 온 비서들의 증언이다 보니 믿을만한 이야기로 들리기도 한다.

 

 

마오쩌둥이 장칭과 결혼한 것은 ‘실패한 선택’이라는 설이 한동안 지배적이었다. 마오 주석이 장칭의 과거를 몰랐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여부는 미확인으로 남는다. 1938년 가을, 마오쩌둥은 장칭과 결혼을 결심했다. 장칭을 못마땅해 하는 정치국원이 한둘이 아니었다. 상하이 지하당에 지시를 내렸다. “구 사회의 건달들과 어울린 배우 출신이다. 남녀관계도 지저분할 정도로 복잡하다. 주석은 이 점을 잘 모른다. 행적을 상세히 파악해 보고해라.” 못된 소문만 골라서 보고 하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상하이 지하당은 장칭에 관한 소문 수집에 나섰다. 연예계 인사를 찾아다니며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부정적인 평이 대부분이었다. 훗날 줄초상을 몰고 올 보고서가 옌안에 도착했다. 보고서는 마오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마오와 장칭의 결혼식은 단촐 했다. 식탁 두 개에 사탕과 돼지고기 차려놓고 친구 몇 사람만 초대했다. 두 사람의 결혼을 적극 반대했던 사람들은 아예 부르지도 않았고, 알고 찾아왔어도 문전박대를 당했다. 특히 장칭이 더 심했다고 한다.

 

1949년 10월, 마오쩌둥이 신중국을 선포했다. 문화부의 한직(閑職)을 차지한 장칭은 말로만 퍼스트레이디였다. 전면에 나설 기회가 없었다. 문혁을 계기로 장칭은 다시 무대 전면에 나섰다. 이번에는 연극무대가 아닌 역사의 무대였다. 마오의 후광을 업고 하루아침에 ‘당과 국가의 중요한 영도자’로 등장하자 자신의 빛나는 역사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다. 거대한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과거를 알고 뒤 담화를 했던 당 간부와 문화인, 왕년의 정보 공작 책임자들에게 철퇴를 가했다. 도망간 사람은 끝까지 추적해 감옥으로 보냈다. 환락을 함께 했던 남자들도 성치 못했다. 동성들에게 가한 보복은 더 가혹했다. 한때 절친이였다가 경쟁 상대가 된 배우 왕잉은 죽는 날까지 감옥 문을 나서지 못했다. 시신도 사망과 동시에 소각해버렸다. 저우언라이의 수양딸인 쑨웨이스는 발가벗겨 놓고 죽을 때까지 두들겨 팼다고 한다. 장칭의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어 문혁 기간 중 박해받다 죽은 예술가 중 나이가 제일 어렸다고 한다.

 

장칭은 그렇게 중국 역사 상 가장 지독한 여인으로 자리매김했다.

 

 

 

 

 

 

 

"구 사회의 건달들과 어울린 배우 출신이다. 남녀관계도 지저분할 정도로 복잡하다. 주석은 이 점을 잘 모른다. 행적을 상세히 파악해 보고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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