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 이야기 1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1
김명호 지음 / 한길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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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이야기 1 _김명호(지은이) / 한길사

    

 

백화(白花)가 만발하자 전국의 언론기관들이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베이징의 신화서점이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의 사진과 책들을 쌓아놓고 불태웠다. 전국의 분점들도 뒤를 따랐다. 류샤오치는 죽음을 예감했던지 자녀들을 불러 유언을 남겼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가 죽으면 엥겔스처럼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라. 5대양을 떠돌며 전 세계를 보고 싶다. 나는 평생을 무산계급으로 살았다. 너희들에게 남겨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마오쩌둥(이하 마오)과 류샤오치의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중국 공산당의 창당 초기 기층세력은 거의가 도시 노동자였다. 도시를 포기하고 농촌을 근거지로 삼자(인민들의 마음을 끌어당기기 위해) 농민과 수공업자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그 색채가 변했다. 토호들의 땅을 몰수하고 토지를 재분배하다보니 뭐든지 평등해야 한다며 평균주의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류샤오치는 마오가 농촌에서 게릴라전을 치루는 동안 도시에서 활동한 노동운동과 지하공작 전문가였다. 마오가 1인자, 류샤오치는 누가 봐도 2인자였다. 두 사람은 동향(同鄕)이었다. 평지에 우뚝 솟은 산봉우리 남쪽이 마오의 고향이고 류샤오치는 서쪽 마을에서 태어났다. 거리는 9킬로미터 남짓했지만, 땅덩어리가 큰 나라이다 보니 이 정도면 한 동네나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동향의 혁명동지인 셈이다.

 

 

마오심()을 잘 못 읽은 류샤오치

 

19491, 인민해방군이 톈진과 베이핑을 장악했다. 자본가들과 부딪힘이 발생한다. 마오는 류샤오치에게 지금 우리는 자본가들과 단결해야 한다. 동지들이 감히 말을 못하지만 자본가가 없으면 되는 일이 없다며 자본가들의 공황상태 수습을 위임한다. 류샤오치는 나름대로 잘 처리했다. 문제는 마오다. 마오는 감정과 생각의 기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울러 중국공산당원들과 자본가들, 인민들의 마음이 류샤오치에게 기울자 마오가 시샘이 났던 모양이다. 서서히 류샤오치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함정에 빠뜨리기까지 했다. 마오는 중국인민들에게 태양이 둘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중국공산당 역사상 완벽하게 실패한 정책으로 기록되는 대약진운동(19588~)후 문화대혁명기간 동안 류샤오치는 곤욕을 치른다. 마오는 류샤오치를 향해 철저히 등을 돌린다. 결국 류샤오치는 격리 수감 중 숨을 거둔다. 그의 아내 왕광메이는 사형선고까지 받는다. (마오는 좀 심하다 싶었던지 왕광메이의 목숨은 해치지 않았다). 대약진운동에 대해선 소련의 흐루쇼프가 마오쩌둥이 방구 한 번 시원하게 갈기려다 바지에 똥 쌌다며 빈정거릴 정도였다.

 

 

  

전쟁을 하면서도 학문과 자유를 키운 시난연합대학

 

이 책에서 가장 관심 있게 읽은 부분이다. “상아탑을 나온 우리는 조국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193777, 동북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이 베이징 교외에서 중국군과 무력 충돌했다. 일본군이 순식간에 톈진과 베이징을 압박하자 중국군은 베이징에서 철수했다. 고도(古都)는 하루아침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시민들은 일본군과 싸우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다며 피난 보따리를 꾸렸다. 잠만 자고 일어나면 하루가 다르게 도시가 썰렁했다.

 

 

개학을 준비하느라 한참 분주하던 대학들도 자구책을 찾느라 교직원, 학생 할 것 없이 머리를 싸맸다. 중국 최초의 사립대학인 톈진의 난카이(南開)대학을 비롯해 국립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이 후난성 창사로 이전했지만, 일본군의 공습이 심해지자 다시 보따리를 쌌다. 보다 깊숙이 쿤밍으로 옮긴다. 전란 속에 태어나 8년간 존속한, 비록 유랑대학이었지만 중국 역사상 최고의 학부였다. 상아탑이라고 표현했지만 때로는 일본군의 공습을 피해 산속으로 피신해서 굴속에서도 수업이 이어졌다고 한다.

 

 

대학은 큰 건물이 있는 곳이 아니다. 큰 학자가 있는 곳이다.” 올곧고 실력 있는 교수들이 많았다. 이 대학에서 무수히 많은 인재들이 양성된다. 중국의 핵무기 개발에 불멸의 업적을 남긴 화학과 교수 자오중야오, 198810월 사후에 노벨문학상 수상을 받은 선충원도 이 대학 교수였다. 학생들 중엔 1957년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한 양전닝과 리정다오가 있다.

 

 

이외에도 격동의 세월을 보낸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 중에는 좋은 흔적을 남긴 사람들도 많고, 그리 향기로운 흔적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많다. 역사는 숫자(년도)로 정리되지만,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과 사람으로 이어지는 많은 이야기들이 남을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저자 김명호 교수에게 중국은 연구 대상이 아닌 그저 놀이터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일간지(중앙일보/ 중앙선데이)6년 동안 중국, 중국인들에 관한 글을 연재했다. 이 시리즈는 그 글들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20여 년간 그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준 중국의 문화노인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이제는 베이징이나 홍콩, 타이페이를 가도 만날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 그들의 영혼을 달랠 수 있을지 답답한 마음뿐이라고 한다.

 

 

이 책의 장점은 많은 사료(史料)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지루할 틈이 없다는 것이다. 문장이 간결하기 때문에 마치 신문기사를 읽는 듯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은 저자의 주관적인 견해보다는 객관성이 많이 녹아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인 이야기두 번째 이야기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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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

#한길사

"대학은 큰 건물이 있는 곳이 아니다. 큰 학자가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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