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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여, 걸어라 - 걷는다는 것 혹은 나를 만난다는 것
조은 지음 / 푸른숲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어떤 공간을 화두삼아 걷는 행위는 구도와 맞닿아 있을까? 구도가 거창하다면 혼란한 마음을 다스리기 정도?
이 책은 경주 남산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쓴 조은의 산문집이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인데 그냥 빌려보기 아까운 책이다. 시인의 책은 빌리는 게 아니라 구매해야 한다는 걸 기억하고자 한다.
촘촘하고 내밀한 글이다. 그저 몇 문장 옮겨쓰고 마음에 되새길 뿐이다.
삼체불 앞에 앉아 언젠가 한 성직자로부터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사람은 어떤 경우든 불쌍해 보여야 한다"던 말. 불쌍해 보인다는 것은 힘의 피라미드에서 자신이 가장 아랬부분에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한 자세이다. 불쌍한 척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것은 그가 정말로 겸손하지 않기 때문이며, 남을 불쌍히 여기는 타인의 선한 마음을 이용하여 더 '큰 것'을 낚아채려는 계산을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처음 그 말을 듣던 순간, 나는 한동안 멍해졌다. -109쪽
어디선가 읽은 글이 떠오른다. 중국의 누구였더라. 유명한 학자인 이 분이 대학 총장으로 있을 때, 어느 날 대학 교정을 걷고 있었다. 마침 갓 입학한 신입생 한 녀석이 짐을 한 꾸러미 끌고 가다가 갑자기 어떤 볼 일이 생겨서 짐을 맡겨야 할 상황이 되었다. 마침 옆을 지나가는 허름한 할아버지에게 그 짐을 맡아달라고 하고는 몇 시간 후에야 나타났다고 한다. 짐을 맡아준 할아버지는 말없이 짐을 그 청년에게 주고는 유유히 사라졌다는데 나중에서야 그 할아버지가 그 대학의 총장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매우 놀랐다고 한다. (이 분이 누군지 아시는 분은 말씀해주시길...)
..해야 할 공부와 밀려드는 일이 많아 멈춰야 할 시점을 놓치는 건 아닐까 불안하다고 젊은 그가 진지하게 걱정하자, 더 힘차게 활개를 펴라는 뜻으로 피디인 그가 말했다.
"넓어져야 더 깊어질 수 있어."
더 넓은 세계를 확보해야 더 깊이 내려갈 수 있다는 그의 말에 나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스스로 순수성을 지켜낼 수 있는 세계, 이를테면 한 우물만 파고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좁은 세계에 갇혀버린 내게 그의 말은 아포리즘이 되어 메아리쳤다. 왜 그걸 몰랐을까. 우물을 파도 넓게 터를 잡고 파야 깊은 물을 끌어올릴 수 있고, 세계관이 넓을수록 더 깊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넓은 세계관을 갖고 큰 우물을 팔 수도 있었는데, 이 나이가 되도록 그러지 못했다는 뒤늦은 후회로 가슴이 아팠다. -202쪽
한 권의 책에서 가슴을 치는 한마디만 건져도 만족스럽고 책 읽은 보람을 느끼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 책을 매우 잘 읽었다. 고마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