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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두사 - 하
비연 지음 / 신영미디어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읽는 내내 헉, 이런..류의 진부하지만 솔직한 비명들이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한숨에 나를 점령해버린 이 책을 눈 하나 떼지 않고 다 읽었다. 이런 사랑이 존재한다면.. 나는 사양할테다. 나는 진중하지만 애틋하면서 하늘하늘한 사랑을 하고 싶다. 류신과 유채처럼 치명적인 독에 허덕이며 자신을 갉아먹는 증오를 키우는 사랑은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내가 이런 사랑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이 나에게는 파격적으로 다가왔다. 이런 전개는 어디에나 널려 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보고 소유욕에 사로잡혀 그녀를 자신의 영역으로 납치한다. 남자는 여자를 납치하고도 자신이 왜 그랬는지 내면의 갈등을 일으키고, 여자는 남겨두고 온 연인이나 가족, 고향을 그리워하며 남자를 거부한다. 남자는 자신의 영역에서 여자 때문에 일어나는 소란을 처리한다. 그러다가 남자 혹은 여자가 심각한 상처를 입으며 이야기는 두 사람의 사랑으로 전환된다... 보통 로설의 전개이지 않은가. 그러나 이 책은 이런 보통의 전개를 파격적으로 바꿨다. 유채에 대한 류신의 무서우리만치 집요한 집착, 그런 류신을 증오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유채. 둘은 결코 좁아지지 않는 평행선을 걷고 있었다. 유채가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새장에 가두어두고 놓아주지 않는 이기심, 그 이기심이 자신의 심장을 중독시키는 것을 도리어 사랑의 대가라고 치부해버리는 류신. 자신이 마안을 가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한 류신을, 약혼자로부터 떨어트려놓은 류신을, 고향과 가족의 품에서 억지로 떼어내버린 류신을, 자신의 날개를 꺾어버린 류신을, 자신을 위험에 몰아넣는 류신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 매순간 다짐하고 결심하고 각오하는 유채. 그들의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사랑은 정말 달콤하고 행복한 걸까? 그렇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그들에게 달콤하고 행복한 감정은 허락되지 않았다. 일본 야쿠자인 류신의 약점이 되어버린 유채는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게다가 검사 히로미는 시시각각 류신의 목을 죄어왔고, 거기에 동조해버린 유채의 전 약혼자 준호와 준호의 친구 태우. 유채를 알아보지도 못한 주제에 준호는 유채의 손을 잡아보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을 체념한 그녀에게 류신의 강한 애착은 힘이 되어갔다. 어떤 일이 있어도, 누가 뭐라해도 그는 그녀를 놓지 않았다. 차라리 같이 죽더라도 그는 그녀를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사랑은 유채를 조금씩 움직였다.
뼛속이 시리도록 미워하고 뇌수가 불타버릴 정도로 당신을 원해....
사랑은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류신은 유채에게 선택권을 쥐어주었다. 일생에 그가 낸 최고의 용기였다. 여기에, 자신의 곁에 남든지 아니면 준호를 따라 한국으로 돌아가든지 유채더러 선택할 수 있게 했다. 새장을 박살내버린 것이다. 유채에게 자신을 용서하느냐는 질문을 던진 류신은 대답을 들었다.
당신을 용서하는 게 아냐. 내가 나를 용서했어.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용서했어.
그녀에게는 죄책감이 있었다. 류신을 사랑한다는 데 대한 죄책감. 그녀는 정말 강한 여자였다. 달콤한 사랑이 내미는 손을 자존심으로 냉정히 뿌리칠 줄도 알고, 받아들일 줄도 알았다. 나라도 저런 상황에 놓인다면 그랬을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뽑아 내던진 그를 사랑한다는 건 내 존재를 부정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자신만을 사랑하는 그 눈을, 그 손을 거부하는 것도 힘든 일이겠지. 결국 유채는 사랑도, 복수도 손에 넣었다. 멋진 여자다. 류신도 멋졌지만, 유채는 정말 멋있었다. 그런 그녀의 용기에 박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