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목요일 저녁, 도장에서 열심히 운동하고 샤워를 하려고 보니 따뜻한 물이 안 나오는 거다. 잠깐 고민한 후 찬물로 샤워하기로 했다. 운동 후 찬물 샤워는 운동으로 인해 생긴 염증을 줄여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 않은가. 나는 재빠르게 찬물로 샤워를 하고 몸을 닦는데, 몸에서 열이 나서 놀랐다. 찬물로 샤워를 하니 몸에서 열이 나네? 덕분에 집에 올 때까지 그다지 춥지 않았다. 


찬물 샤워를 하면서 떠올린 건 두 권의 책.
















우연히도 <리센코의 망령>을 읽고 얼마 뒤 <악의 유전학>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최근 러시아 유전학계에 나타난 일련의 사건을 탐구하는데, 첫 번째는 획득 형질의 유전이란 무엇인지와 획득 형질의 유전이 정치와 어떠한 관계를 맺었는지이다. 두 번째는 후성유전학에 대해 살펴보고, 후성유전학이 획득 형질의 유전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분석한다. 세 번째는 획득 형질의 유전이 러시아의 역사에 끼친 영향 때문에 현재 후성유전학이 어떤 영향력을 가지는지 다룬다. 


획득 형질의 유전은 부모 세대에 일어난 형질 변화가 자손에게 유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라마르크(1744~1829)의 <동물철학>의 서문에 이 이론이 자세히 제시되어 있어서인지 당시 거의 모든 사람이 획득 형질의 유전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라마르크주의가 곧 획득 형질의 유전을 뜻한다고 이해하는 방식이 생물학계의 표준이 되었다고 한다.(p.43/334) 라마르크는 환경이 진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다. 


1920년대 러시아에서는 인간 유전 대논쟁이 있었다. 콜초프를 비롯한 소수의 비(非)마르크스주의적 멘델주의 유전학자들은 획득 형질의 유전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당시 서유럽과 미국에서 회자되던 우생학이 러시아에서 실현되기를 소망했다. 콜초프는 인간 유전자의 독립성과 중요성을 강조했고, 사회적, 정치적 환경은 인간의 유전과 무관하다 주장했다. 


마르크스를 신봉하는 고전유전학자들 역시 우생학을 지지했는데, 이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만 우생학이 올바르게 적용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우생학적 선택 앞에서 무엇이 우월하고 열등한지를 누가 결정할 것인가였다. 


그 외 소련의 마르크스주의 생명사회적 우생학자들은 새로운 형태의 라마르크주의적 생명사회 우생학이 실현되어야 하며 획득 형질의 유전이 그 중심에 놓여야 한다고 믿었다. 이들은 소련 시민의 후손들은 그들 부모 세대가 사회주의 사회에서 살면서 획득한 형질을 물려받게 될 것이며 이로써 '새로운 소비에트형 인간'을 창출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마지막으로 바실리 슬렙코프 등 유전학자가 아닌 인사들로 구성된 그룹은 어떤 형태의 유전학이든 유전학이 소비에트 사회 발전의 핵심과는 관계없으며 마르크스주의에 위배된다고 믿었다.


이럴 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리센코였다. 


트로핌 데니소비치 리센코는 1898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다. 도시 외곽의 농민 가정에서 나고 자란 그는 폴타바 원예연구소에서 실용적인 농업 교육을 받았고, 1925년부터 아제르바이잔의 간자 식물육종장에서 농작물의 생장 기간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생물의 발달에 대한 리센코의 견해는 '영양분 이론'으로 정리된다. 그는 '영양분'이라는 단어를 매우 넓은 의미로 사용했고, 유전자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세포를 구성하는 특정한 일부분이 아니라 세포 전체가 유전을 매개한다고 믿었다. 리센코는 코오페라토르카 겨울밀 실험에 가장 오랫동안 매달렸는데, 이 겨울밀 종자를 3월 초에 온실 속에 파종하여 4월 말까지 온실 온도를 매우 낮게 유지했다. 이렇게 식물을 저온에 노출시켜 개화를 촉진하는 과정을 '춘화 처리'라고 하는데, 이 춘화 처리를 거친 후 온도를 높였다. 이 실험을 계속해서 9월 9일에 살아남은 밀 한포기가 이삭을 팼다. 리센코는 이 식물에서 채취한 곡식을 다시 온실에 파종했고, 다음 해 1월 말에 이삭이 팼다. 3세대는 8월에 이삭이 팼다. 리센코는 코오페라토르카 밀이 봄에 자라는 식물인데, 춘화 처리를 통해 이 식물의 습관이 변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실험은 오류투성이였다. 대조군도 없었으며 통계를 이용하지도 않았다.


리센코는 생물의 유전이란 여러 세대에 걸쳐 외부 환경의 조건으로부터 구성되는 것으로 외부 환경 조건에 변화를 가하면 유전에도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전 과정을 물질적으로 매개하는 어떠한 운반자가 존재한다는 개념에 도달했으나 이 운반자가 유전자를 뜻하지는 않았다. 이 내부 입자는 내자화된 환경 조건으로서, 그 표현의 측면에서나 가장 기본적인 구조의 측면에서나 굉장히 쉽게 변할 수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p.154/334) 그리고 선천적으로 우성 유전자나 열성 유전자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감춰진 내재적 잠재력'이 '발전하는 데에 필요한 외부 조건을 만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즉 인간의 힘으로 우성형질을 열성으로, 열성형질을 우성으로 바꿀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론이 유전을 원하는 방향으로 통제하는 데에 더 나은 수단을 제공한다고 보았다.(p.161/334)


리센코는 자신의 이론이 러시아의 기근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스탈린과 후르쇼프는 현대유전학에 대해 몰랐고, 리센코의 과학적 견해에 어떠한 오류가 있는지 판단할 능력이 없었다. 리센코와 그들은 초라한 가문 출신이었고, 서방 세계와 맞서 싸웠다. 리센코는 그들의 지지 아래 러시아 유전학계를 군림했고, 바빌로프 등 저명한 유전학자들을 추방하고 죽음으로 내몰았다.    


리센코의 실험은 실패했고, 대기근이 찾아왔다. 리센코가 축출된 이후 러시아 유전학계는 획득 형질의 유전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고, 그래서 후성유전학의 발달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리센코의 이론과 후성유전학은 연관이 있어보이지만 전혀 같지 않았다. 리센코는 심지어 통계를 조작하기까지 했다. 그가 옳았던 부분에 있어서 그는 독창적이지 않았다. 그가 독창적인 부분에 있어서 그는 옳지 않았다.(p.236/334) 


저자는 리센코의 이름이 언급될 때 우리가 떠올려야 할 것은 '폭압적인 국가 덕분에 자신의 견해를 타인들에게 정치적으로 강요할 수 있었던 무능한 과학자'의 모습이라고 이야기 한다. 지금 러시아는 푸틴이 통치하고 있다. 신리센코주의가 나타나는 것이 정치와 무관한 것일까.


 이 책은 서론을 지나고 리센코 후작이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짐작이 가능해진다. 시대는 다르지만, 작가가 홀로드나야 실험의 수장을 리센코 후작으로 이름지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다만, 대조군을 둔 점은 좀 달랐다고나 할까. 리센코 후작은 1858년 알렉산드르 2세와 독대한 후 추위를 타지 않는 위대한 러시아 백성을 만드는 실험에 착수했다. 


그 실험은 너무 잔혹했다. 추위를 타지 않는 사람을 만들 수 있다니, 그것도 유전자 조작이 아니라 환경을 조작해서 말이다. 시베리아에서도 외곽이자 가장 추운 곳에 홀로드나야란 마을을 만들고 그 곳에서 다양한 나이대의 고아들을 살게 했다. 250명씩 남녀를 각각 동쪽과 서쪽 마을에 분리한 후 그들에게 얇은 옷을 입혀 생활하게 하고 아침 저녁으로 차가운 연못에 입수시켰다. 이렇게 하면 '한랭 내성' 입자가 생겨서 그들의 자손은 추위를 타지 않게 된다는 이론을 위한 실험이었다. 


처음으로 결혼하는 나타샤가 긴팔인 혼례복을 입자 한 말이 "따뜻하다..."였으니 이 아이들이 얼마나 추위에 떨었을지 참담했다. 아이들은 다른 상황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이 상황이 어떤지 알지 못한 것이 다행이라고나 할까. 주인공인 케케는 그저 굶지 않고 다같이 살아 행복했다고 말한다. 아마 그 말은 맞을 것이다. 자신을 보살펴 주는 언니 나타샤가 있고, 마음 속에 품은 베소가 있고, 다정한 후작이 있고, 늘 먹을 것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 사이의 아이들이 죽어나가고 황제가 준 기한이 다가오자 리센코 후작은 광기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결국 자신의 이론에 함몰되어 자신 이외의 모든 이를 망쳐버린 리센코 후작은 어떻게 되었을까. 살아남아 다른 곳에서 이 무시무시한 실험을 계속할까?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도구로 보고 학대를 일삼은 후작, 그리고 그 악을 품은 유전자는 어디로 갔을까.   


후성유전학에 따르면 없는 형질을 만들 수는 없다고 한다. 이미 있는 형질이 온오프 되는 것이지, 이미 발현된 형질을 더 많이 만든다거나 내용을 바꿀 수는 없다고. 그렇다면 저 학살의 유전자는 얼마나 충분히 발현된 것인가.



잠시 잠깐 찬물로 씻을 때 너무 춥다는 생각을 했다. 이러다 심장마비 걸릴까봐 오래 씻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케케와 아이들을 떠올렸다. 얆은 속옷 같은 옷을 입고 아침 저녁으로 얼음을 깨고 연못에 들어간 아이들은 얼마나 추웠을까. 어떻게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세상의 이치를 밝히고자 하는 학문이 어쩌다 인간에게 이리저리 이용당하게 된 것일까. 그것도 유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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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1-26 0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 목요일 저녁….부터 추워지지 않았나요?! 찬물 샤워라니!! 폭포 밑에 가신 건 아니죠?! ㅋㅋㅋㅋㅋㅋ

꼬마요정 2023-11-26 11:39   좋아요 1 | URL
ㅋㅋㅋ 부산은 그렇게 안 추웠어요. 워낙 온도가 높았었거든요. 날씨 너무 이상해요. 19도까지 올랐다가 9도 정도로 떨어지니까 한파 경보 오고... 온도 차가 10도인가 이상이면 한파 경보라고 하던데... 근데 또 주말은 너무 춥네요ㅠㅠ 날씨 적응이 안돼요ㅠㅠ
찬물 샤워라지만 추워서 물칠만 했어요 ㅋㅋㅋㅋ 폭포라니요 ㅋㅋㅋ 30초컷이었어요 ㅋㅋㅋㅋ

호시우행 2023-11-26 1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면 인간은 참으로 잔인한 동물이란 생각이 들어요,ㅠㅠ

꼬마요정 2023-11-26 13:15   좋아요 0 | URL
맞아요... 참으로 선하기도 하고 참으로 잔인하기도 하죠...
뭐든 꼭 자기 이익에 부합하게 인간을 조종하고 싶은 인간들이 무섭습니다.ㅠㅠ

새파랑 2023-11-26 16: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찬물 샤워 덕분에 유전학을 떠올리시다니 대단합니다. 이게 바로 독서의 힘~!!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하는걸 보면 인간이 제일 무섭긴 한거 같습니다.

아 오늘 너무 춥네요 ㅜㅜ

꼬마요정 2023-11-26 22:58   좋아요 1 | URL
마침 유전학 관련 책들을 읽어서 그런가봐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악의 유전학>은 소설인데 마치 실제인 것처럼 써 놓은 것 같아요. 제가ㅠㅠ 소설인데 실제로 저런 일이 있었을 것 같긴 하지만요ㅠㅠ

춥죠ㅠㅠ 겨울 되니까 저 소설 너무 와닿아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