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아침 서울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여동생이 수술을 하는데 간병인이 없어서였다. 다행히도 내가 시간을 낼 수 있어 가기로 했는데, 수술을 해보고 가벼우면 당일만 간병하다 밤 비행기로 내려오고 아니면 다음날까지 있기로 했다. 이런 때 엄마 찬스를 쓰는 건데, 우리 집은 엄마 찬스는 쓸 수 없으니. 나와 동생에게는 엄마이자 조카에게는 할머니인 엄마한테 말할까봐 동생은 조카한테 수술하러 간다고 말을 하지 않았기에 제부는 간병하러 서울로 갈 수 없었고, 나는 조카를 돌보는 것보다는 간병하는 게 더 나았으니까.
뭐 꼴랑 하루 짜리니까 아주 편하게 갔다. 병원은 더우니까 반팔에 재킷만 걸치고 책 한 권 들고 갔다가 금요일까지 있었다. 모즈미세술이 생각보다 여러 번 시술을 해야하는 터라 목요일은 내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시술을 한 번 했고, 내가 도착하니 약 먹고 좀 있다 조직검사 결과 보고 또 시술하고, 병실로 올라갔다가 또 내려가서 시술하고 또 올라갔다가 저녁 6시에 또 시술을 했다. 허벅지 쪽이라 걸으면 시술 부위가 터질까봐 휠체어로 이동했는데, 내가 그동안 열심히 운동한 보람이 있구나 느꼈다. 예전에 휠체어 밀 때는 많이 버거웠는데... 이제는 팔 힘이 많이 세져서 아무렇지 않게 휠체어를 미는데, 이렇게 뿌듯할 수가.
오랜만에 동생이랑 둘만 있다보니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간병이란 그런 것이지. 병원에 있으면 신기하게 옛날 이야기를 많이 한다. 예전엔 그랬었지... 시술을 기다리며 킥킥대고 웃으니 옆에 있던 환자 한 분이 멀찍이로 이동했다. 엄숙한 병원에서 웃으니 좀 그랬던걸까?
예전에 시어머니 계시던 아산병원도 참 미로 같았는데, 동생이 있는 서울대병원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이나 길을 잃으면서도 나랑 동생은 킥킥대며 다녔다. 많이 불안해했는데 나의 길치 능력(?)이 동생에게 웃음을 준 것 같아 좋았다. 그래, 역시 모든 건 다 장점과 단점이 있다니까. 심지어 남동생은 오지 못하는 대신에 '카드'를 줬다. 그래서 우린 편의점을 털었지. 광고를 보고 써보고 싶었던 '테라브레스'인지 하는 가그린도 샀다. ㅋㅋㅋ 남동생은 아니 무슨 병원에서 가그린을 사!! 라며 웃었다.
병원에 있다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삶과 죽음이란 한끗 차이라는 생각. 죽는 순간 마지막 그 한숨이 뱉어지고 나면.... 끝이다. 분명 살아있었는데 더 이상 살아있지 않는 것이다. 살아있던 그 순간들, 그 때 그럴걸 하고 후회하던 순간들, 내가 꿈꾸던 순간들을 모두 살아본다면 그 삶들의 끝이 좀 쉬울까? 아니면 여전히 발버둥치며 죽는 순간을 유예하려 할까.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는 모든 순간을 경험해버린 조부 투바키가 모든 토핑을 올린 베이글을 통해 모든 순간의 허무함을 보여준다. 모든 삶을 알아버린다면 그 삶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지도 모른다. 난 반대로 그 삶들을 살아내야 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셍각이 들었다. 드라마 <열혈사제>에서 지옥이란 지금의 삶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지 않고 행동이 바뀌지 않으면 당연히 삶은 바뀌지 않으니까. 하지만 조부 투바키는 그 바뀐 선택들까지 다 봤으니 허무하지 않을까.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삶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아는데 얼마나 허무할까.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정해진 삶을 고스란히 살아야 하잖는가.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렇다해도 지금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가 내 동생의 간병을 하지 않은 선택을 한 삶을 산다면, 그 삶은 마음이 아주 불편했겠지. 지금의 나는 마음이 불편한 것보다 몸이 불편한 게 낫다고 생각하니까 내 선택에 만족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선택을 한 나는 이 삶의 내가 아니니까 그 삶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지 않을까. 모든 순간에 다 있을 수 있는 건 그래서 불행할 것 같다. 그래서 허무해지고 '없음'의 상태로 가고 싶을지도. 다만, 자신이 그렇다고 해서 모든 순간에 있지 못한 이들을 그렇게 만드는 건 문제가 있지 않을까. 차라리 모두에게 모든 순간을 경험하게 하지 그랬어... 하긴, 그것도 선택받은 자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니까, 에블린처럼.
결국 거대한 선도, 거대한 악도 삶과 죽음처럼 한끗 차이인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삶과 죽음은 선택할 수 없지만 선과 악은 선택할 여지가 있다는 정도일까. 모든 삶을 경험한 에블린과 조이의 선택이 달랐던 것처럼 말이다. 강압적인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배우자, 엄마에게 인정받지 못한 여자친구를 가진 건 둘 다 같았지만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 선택에 영향을 주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가족'이겠지. 결국 모든 것은 '가족'으로 돌아오는 것 같다. 그 '가족'이라는 건 핏줄로 이어진 가족일 수도 있고, 내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삶과 죽음을 선택할 수 없듯이 피로 이어진 가족은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가족으로 인해 선악을 선택할 수는 있다. 이 무슨 장난 같은 일일까. 생각이 많아지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