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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 여섯 개의 세계
김초엽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9월
평점 :
세상은 급격하게 변했다. 전염병이 창궐하고 사람들은 격리 되었으며 세계적으로 경제 구조나 문화 양상이 재편되었다. 세계적으로 감염병이 유행하는 것을 뜻하는 팬데믹과 전염병으로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아포칼립스와 접촉으로 전염병을 전파한다는 뜻인 컨테이전과 팬데믹 이후의 새로운 질서 또는 문화 등이 나타난 현상이나 상황을 뜻하는 뉴노멀이란 단어가 더 이상 어색하지 않다.
이 책은 이런 상황 속에 놓인 우리를 저 세 가지의 주제로 여섯 개의 세계 속으로 초대한다. 종말로 치닫는 것 같은 혼란한 세상, 접촉 감염 때문에 서로에게 닿기를 꺼리는 세상, 전염병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보여줄 수 있는 세상으로 말이다.
아포칼립스, 끝과 시작이라는 주제로 김초엽 작가의 <최후의 라이오니>와 듀나 작가의 <죽은 고래에서 온 사람들>이 있다. 이 두 이야기는 모두 미래의 이야기이다. 현 세계의 공포를 저 먼 미래로 옮겨 놓은 것이다. 아마 팬데믹이든 그 무엇이든 지구는 멸망한 이후의 세계다. 끝인 줄 알았던 세계는 라이오니를 기다리는 셀에게 이어지고, 셀의 믿음은 로몬족 회수인인 '나'에게 이어진다. 3420ED는 무너진 것 같지만 라이오니의 염원을 통해서, '나'의 기억을 통해서 새로운 시작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염병으로 인해 거대한 군체를 이루던 고래들이 죽어나가자 고래 군체 위해 마을을 이루고 살던 사람들은 두 대륙 사이를 떠돌게 된다. 뜨거운 대륙과 차가운 대륙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를 젓는 사람들... 지구를 떠나 이 곳으로 왔는데 이 곳 역시 무너지고 있었다. 고래들은 사람을 바이러스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녹아내리는 빙산에서 과거 조상들의 종이에 희망을 노래하는 '나'는 과연 새로운 시작을 맞이할 수 있을까.
컨테이전, 전염의 충격이라는 주제로는 정소연 작가의 <미정의 상자>와 김이환 작가의 <그 상자>가 있다. <미정의 상자>는 접촉으로 인해 전염되어 병에 걸린 소중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미정은 전염병이 휩쓸고 지나간 도시를 지나 시골로 간다. 하지만 시골 역시 텅 비어버렸다. 그 곳에서 발견한 상자 하나. 미정은 혼자라는 외로움보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감이 더 아팠던가 보다. 마찬가지로 상자라는 표현이 들어가는 <그 상자> 역시 접촉 감염 때문에 사람들이 격리된 채 살아가는 세상의 이야기이다. 병에 걸려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면 안락사를 시행하는 법이 있고, 병에 걸렸어도 깨어나 면역력을 가진 자원봉사자들이 있고, 병에 걸리지 않은 채 계속 자가격리 중인 사람들이 있는 세계. 그런 곳에서도 사람들은 서로를 챙기고 돌보며 정을 나눈다. 백신이 개발되지 않을지라도 서로에게 의지해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 그렇게 전염의 충격은 다음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뉴 노멀, 다시 만난 세계라는 주제는 배명훈 작가의 <차카타파의 열망으로>와 이종산 작가의 <벌레 폭풍>이 이야기 한다. <차카타파의 열망으로>는 매우 신기한 이야기인데, 내가 경상도 사람이라 그런지 읽는 내내 갑갑함을 감추기 어려웠다. 기.필.코 그 파열음을 입 밖으로 내뱉고 싶다고나 할까. 아니, 뮤지컬 <드라큘라>의 '신선한 피'를 이렇게 눈으로 읽어야 하는가. 전염의 충격을 이겨낸 세계는 침을 튀기는 발성 자체를 어색하게 만들어 버린 것일까. 시간을 격리한다는 생각 역시 신기했다. 그리고 배우 서한지를 계속 서한'치'로 읽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벌레 폭풍>은 생각보다 잔잔했다. 어쩌면 이 이야기야말로 팬데믹을 넘어선 세계의 잔잔한 일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빙하가 녹고 무시무시한 벌레가 나무를 파먹고 사람들에게 병을 옮기지만 사람들은 살아간다. 기상 악화가 비행기 지연의 이유가 되듯 벌레 폭풍 역시 비행기를 멈추게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공항에서 기다린다. 목적지에 가기 위해서. 2인용 집이라는 개념도 어색하지 않았다. '접촉'이 무서운 세상. 사람은 직접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일 줄 알았는데, 어떻게든 다른 방식으로 '접촉'하며 온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세상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