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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어느 작가의 오후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22
페터 한트케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1월
평점 :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를 읽다가 다 읽지 못하고 던져 두었더랬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이 짧길래, 아주 짧길래 읽어보자 싶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짧으니 망정이지, 긴 이별 저 책도 그냥 읽지 말까 싶기도 하다.
솔직히 유명한 작가가 쓴 글이니 줄거리의 해체니, 선입견에 대한 도전이니 하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그는 몸을 바로 일으켜 세웠지만, 가끔씩 와인으로 목을 축이며 잔 앞에 혼자 않아 있었다. 이렇게, 무언가를 받아들이거나 생각할 능력이 없는 몽롱한 상태로도, 그는 그 장소에서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점점 더 많아지는 사람들의 다리와 몸통만 보였을 뿐 그들의 얼굴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pp.31-34/94) 이 문장을 읽자 나는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나도 이런 현상을 겪은 적이 많으니까. 저런 몽롱한 상태는 수업 중에 실컷 졸다가 일어나면 느낄 수 있으니까. 순간 내 영혼이 몸을 떠났다가 온 듯한 느낌... 작가도 졸다가 일어났나...
이 이야기는 말 그대로 12월의 어느 날, 어느 작가의 오후에 일어난 일들이다. 정서적으로 외딴 집에 사는 작가는 아침에 일어나서 글을 쓰고 오후에는 글 쓰는 작업을 마치고 외출을 한다. 그런데 이 외출이라는 게 진짜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작가는 현실이 소설인지, 소설이 현실인지 구분하기 싫어하는 듯 보인다.
'걸을수록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이 자신을 따라다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서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여전히 작품 활동을 하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p.24/94) 이 문장을 읽을때는 정말 작가가 환상 속에 살거나 미쳤거나 강박에 사로잡혔거나 애정을 심하게 갈구하거나 그렇다고 생각했다. 사실 작가가 산책을 나온 곳은 현실이 아니라 그의 소설 속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여름에 겨울이 배경인 이야기를 상상하며 고양이에게 장난삼아 눈덩이를 던지려고 했다는 대목에서는 아, 작가가 미쳤구나! 싶었고.
이 작가의 오후를 따라가다보면 뭔가 이상한 일들이 많다. 사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작가만의 상상으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고나 할까. 여기다 조금만 덧붙이면 훌륭한 첩보물이 될지도. 왜냐면 당신은 유명한 작가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넷을 준 이유는 나도 모르게 작가에게 막 말을 하게 된 것과 마지막 때문이었다. 무슨 문장만 나오면, 작가가 미쳤나?, 작가가 졸았나?, 작가가 어디 아프나?, 작가 정말 유명하구나? 이런 말들을 막 내뱉었다. 그게 좋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작가가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이후의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 여전히 망상에 시달리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집이 주는 편안함을 느꼈고, 다음 날에는 다를 수 있다는 희망을 느꼈으니까.
하지만 너무 어렵다!!
그러니까 너희는 내가 지금까지 유일하게 깨달은 것이 느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p.45/94)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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