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여유가 생겨서인지(사실 여유부릴 때가 아니긴 하지만, 이러다 나중에 댓가를 치르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을 달고 사는 게 병인듯도 싶고... 어쨌든 틈만 나면 하고 싶은 게 있지 않은가) 계절이 계절이라서인지, 그냥 지금 이맘 때쯤이라서인지 고전이 그립다.     

 

1994년에 개봉했었던 영화였다. 15년 전이 돼버렸나? 그런데 왜 요즘 새삼스럽게 이 영화가 다시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원작을 이제야 보려 한다. 마틴 스콜세지의 몇 편 영화 각본을 맡았던 제이 콕스와 함께 스콜세지 자신도 각색에 참여했다고 정보에 나온다. 당시 볼 때도 좋았다고 기억하는데 소설 읽은 후 다시 볼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작가 이디스워튼의 [이선프롬]도 인상적이었다. 반전이라면 반전이랄 수 있는 결말 대목은 이 작가에 대한 기대를 더욱 높인다.  

 

 

 

 

 

 

 

조셉 콘래드의 [로드짐]은 민음사판으로, [어둠의 심연]은 을유문화사판으로 구입했다.   

 

   

 

 

  

 

 

 

조셉 콘래드와 조지프 콘래드, 그리고[암흑의 핵심]이 아니라 [어둠의 심연]이다. (p.s.[로드짐] 민음사편은 '민음사'에 걸맞지 않은 책 만듦새를 보여준다. 번역의 수준도 글쎄... 무슨 번역기에 넣고 번역한 모양, 투박하기 그지 없고, 오탈자도 심심찮게 찾을 수 있는 지경이다. 그리고 가끔 난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판형을 왜 굳이 이렇게 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이 유명한 책들을 아직 읽어보지 못한터라 이번에 꼭 조셉 콘래드를 만나보려 한다.  

[어둠의 심연]은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 모티브를 준 소설이기도 하다. 역시 영화는 오래 전에 먼저 봤고 이제야 그 아이디어의 핵심인 책을 보려 한다.  

   

고전에 속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오컬트 스릴러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윌리엄 요르츠버그의 [폴링엔젤]. 

 

 

 

 

 

 

 

 아, 이 역시 영화 <엔젤하트>를 먼저 봤다. 알란파커 감독의 89년 영화였으니, 나는 아마 90년대 때쯤 봤을 건데, 당시 이런 류의 영화를 처음 보고 정말 놀라워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젠 뭐, 새롭진 않겠지만, 다시 봐도 여전히 매력적일 듯 하다. (p.s.알란파커 감독의 원작을 다루는 솜씨가 돋보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영화의 매력이 더 압도적이다.) 

 

 다시 보기를 싫어하는 나지만, 책도 영화도 좋은 건 다시 보고, 또 보고 할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다시 보게 하는 책이나 영화가 좋은 거 아닐까? 책읽느라 도끼자루 썩는줄 모르겠지. 사는 게 이러다보니, 책 읽는 행위가 자꾸 눈치보인다. 이런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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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로부터 영원한 격리.저자 마이클 길모어의 둘째 형이자, 냉혹한 살인을 저지른 개리 길모어를 사형, 총살형에 처한 미국 유타주의 형법과 여론이 원했던 것. 개리 자신이 총살형을 원했다. 사형을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죽음만이 자신을 자유롭게 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이미 수없이 자살기도를 했고, 가석방돼 나왔을 때 그에게 주어진 낯선 세계에서 살아갈 그 어떤 의지도 가질 수 없었다.  

피해자 가족들은, 정말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아무 이유없이 개리에게 살해당한 그 피해자의 가족들은 개리가 사형을 선고받고, 개리 자신이 죽여달라는 적극적인 언론 플레이를 할 때, 그리고 결국 개리가 원하는 대로 사형이 집행되었을 때, 즉, 개리가 자신의 방식으로 사형을 끌어들이고 받아들였을 때, 속절없이 견뎌내는 것 외 달리 방법이 있었을까?

폭력이 점철된 인간사 때문이든, 좁게는 정착기 미국의 역사, 더 좁게는 길모어 가족사의 저열함과 폭력성 때문이든, 큰 형인 프랭크2세와 저자 마이클은 다른 길을 갔고, 개리와 게일런은 연속적인 범죄를 저지르다, 한 명은 총살 당했고 또 한명 게일런은 살해에 가까운 상처를 입고 후유증으로 죽었다.  

개리가 어린 시절부터 보호소와 감옥을 드나들며 거기에서 가해지는 교화라는 허구, 폭력적 감금의 영향으로 점점 더 걷잡을 수 없는 범죄와 타락의 심연으로 빠져들었다 해도, 개리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악의 성향을 변호하기는 어렵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어찌해볼 수 없는 폭력의 근질대며 끓어오르는 분출 때문에 안타까운 것이다. 마이클의 분노, 안타까움, 죄책감과 두려움 등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건, 개리의 그 비뚤어져만 가는 행위가 그 어떤 것으로도 막지 못할 듯해 보이기 때문이다. 개리 자신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죽음을 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지적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오블라디 오블라다 인생은 브래지어 위를 흐른다]를 보다가 알게 된 책이 마이클 길모어의 [내 심장을 향해 쏴라]이다.   

 

 

 

 

 

 

 

[오블라디 오블라다...]는 채 다 읽지 못했는데, 하루키가 신문에 연재했던 에세이 모음집이다. 어떤 글은 좋았고, 어떤 글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다. 하루키는 이 책의 일어 번역을 했다. 그래서 집사재에서 나온 이 책에는 하루키의 일본어 번역판에서 옮긴 하루키의 해설('후기')이 맨 앞에 실렸다. [태엽감는 새] 집필을 하는 도중에 번역에 손대기 시작했으니까 아마도 이 책을 번역할 때 '고배대지진', '옴진리교 지하철 독가스 사건'을 접하며 인간과 사회에 대해 한 걸음 더 바짝 관심을 가지고 있던 때였을 것이다.  

책을 번역하면서 하루키는 '인간으로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고 썼다. 

소설가로서 하루키는 강렬한 현실의 인간 이야기 앞에서 소설가로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다시 한 번 생각했던 듯하다.  

   
 

"'현 시대는 사실이 픽션보다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런 말투가 유행이라 해도 나는 하고 싶지 않다. 세상사는 그렇게 단순명쾌하지 않다. 사실에는 사실 고유의 다이너미즘이 있으며 픽션에는 픽션 고유의 다이너미즘이 있다. 사실과 픽션과는 박자의 길이가 다르고 살을 붙이는 방법이 다르고 책임 소재도 다르다......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실과 픽션이라는 두 다이너미즘은(물론 그것이 각각 양질의 것일 경우지만), 특성의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 점점 가까워진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실에는 픽션적인 요소가 첨가되고 픽션은 사실적인 요소를 더욱 늘려갈 것이다." 

 
   

하루키는 이 책을 '정신적 상처의 연대기'라고 칭했다. 동시에 미국이라는 나라의 역사를 생각했다. 길모어, 그 중 외가의 뿌리에 흡착돼있는 모르몬교가 보여준 것처럼, 미국이 "격렬한 폭력에 의해 승리를 쟁취한 국가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 저주가 지금 어떤 사람들을 격렬하게 규정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이치'"라고 하루키는 적었다.  

하루키는 '황폐'와 '유령'을 마이클 길모어가 자신의 뼈아픈 가족사를  쓰면서 쥔 키워드라고 생각하는듯했다. "먼 과거의 깊은 어두움으로부터 나타나, 그들의 목덜미를 붙잡고 지옥으로 끌고가는 무섭고 영원한 죽음의 영혼, 그것은 도망갈 수 없는 전승이며 유산이다." 

하루키 세계와도 닿아 있는 말처럼 보인다.  

우리의 '유령'도 이처럼 강렬하게 보여주는 이야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줬음 좋겠다.     

p.s. 예전에 읽었던 천명관의 [고래]가 얼핏 떠오른다. 주인공 여인의 얘기를 통해 악몽과 현대사를 관통해 보여줬던 것 같은데 ... ..  


 

 

 

 

 

 

 

p.s. 모르몬교(몰몬교,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교회)의 창시자 조셉 스미스(조지프 스미스?)가 '모로니'신의 천사로부터 받은 고대의 황금접시에 새겨진 것을 옮긴 것이라고 하는 경전, 모르몬교의 '성경'과 같은 모양인데, 우리나라엔 아주 '귀한' 책이 돼버렸다. 마이클 길모어에 의하면 '성서적인 의미를 제거하고 남는 것은 다름 아닌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주제로 가득한 이야기, 즉 가족과 살인에 관한 이야기'라고 한다.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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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많이 알려져 있는 듯 한데, 나는 최근에야 봤다.  
2006년 유종호 연세대 석좌교수가 학생들이 가장 감명깊게 읽고  흥미밌게 읽은 책으로 하루키 소설을 들고 있다는 점을 염려하면서,  
 
하루키 소설은 '문학의 죽음을 재촉하는 자기 파괴적 허드렛문학'이라고 규정했다. "[상실의 시대]에 중독된 독자는 그 작품의 화자가 읽고 있는 형성소설[마의 산]을 끝내 읽어내지 못하고 말 것이다. 마음의 귀족되기는 틀렸지만 그렇다고 흉될 것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론] 중, '닫힌 역사와 열린 텍스트로서의 작품 읽기'(옮긴이의 글, 김춘미) 인용) 
  
재밌는 말은 또 있다.  
한국 칸트학회장인 강영인 교수는 <<포스트모던 칸트>>라는 글에서 하루키의 [1973년의 핀볼] 에서의 한 단락을 인용하면서  
 
"핀볼의 주인공들은 노닥거리는 데 칸트를 사용한다" 고 개탄(?)했다.   

"......칸트는 오늘날 세상의 바닥을 기어다닌다. 아무 여자 아이들하고 잠자리에서 깨어나는 젊은이의 아파트 구석에 굴러다니며 할 일 없이 무료할 때 한마디 인용되기 위한 칸트. 이제 칸트는 바닥생활이라는 새로운 운명을 살아 나가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는 진실에 대한 우울한 교훈이 아닌가? 흔히 말하는 모더니즘의 기획이 흙바닥에 떨어진 시대에 근대 계몽주의의 완성자 칸트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그냥 하루키 읽게 해주세요, 네?  

[1Q84] 때문인지, 아니, 뭐, 그저 전부터 솔솔 불어넣어진 하루키의 '사회참여'에 대한 기대(?)또는 마케팅 효과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지 않았음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루키만의, 또는 하루키 같은 소설가도 있는 것이지, 자기 스스로가 그런 뉘앙스를 풍기곤 한다해도, 하루키는 하루키지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상실의 시대]와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의 [벌꿀파이]가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지 잘 모르겠다. 아, 물론 [벌꿀파이]에서의 '결심'이 대단해 보인다면 뭐, 그렇게 봐줘도 되겠지.   

[태엽감는 새]에 나왔나, [양을 쫓는 모험]에도 나온 듯한데, '노몬한사건'에 대한 하루키의 관심과 연구가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로 인식하는 일본인들의 보편적 정서이자 인식'을 느끼게 해주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인인 나는 읽으면서 걸리더라. 그게 하루키다(하루키였나?). 그의 한계라면 한계고, 그의 세계 인식이다. 이해하든지, 거부하든지. 지극히 하루키스러운가?

[1Q84] 2부의 손발이 오그라드는 아오마메와 덴고의 놀이터 엇갈림 씬은... 실망스러웠다.  

지난 6월 요미우리와의 인터뷰에서, 1995년 옴진리교의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 사건의 이후 일들에 관심을 가졌던 일에 대해서도, 하루키는 피해자들보다는 평범한 인간성을 가졌던 사람이 세뇌를 받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언제 생명을 빼앗길지 모르는 사형수가 된 상황, 그 상황에 대해 몇 년 동안 생각해왔고, 그것이 [1Q84] 이야기의 출발점이 됐다고 말했다.   

그의 그런 대략적인 생각을 따라가보면, [1Q84]에서 '선구'의 리더에 대한 묘사를 왜 그렇게 했는지 이해가 가기도 했다.   

지하철 독가스 살포사건의 피해자들의 인터뷰를 정리한 책 [언더그라운드]는 우리 나라에 출판됐으나, 옴진리교 신자들의 인터뷰인 [약속된 장소에서]는 출판되지 않은 모양이다. [언더그라운드]의 저조한 판매실적이 [약속된 장소에서]에 여파를 미쳤을까? 

約束された場所で―underground〈2〉

하루키의 이야기 솜씨는 언제나 경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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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스푸트니크의 연인]은 예기치 못한 상태에서 읽게 된 책이다. 오래 전에 들어는 봤던 것 같지만, 그날 우연히 발견할 때까지는 전혀 인식에 없던 책이었다. 그렇게 손에 들고서는 자기 전에 겨우 한 두 페이지 들여다보면서 며칠을 보냈다. 마음 속에 계속 책이 웅웅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금요일 저녁부터 오늘 오전까지에 걸쳐 본격적으로 읽어갔다. 덕분에 끝내야 할 일을 아직도 못 끝내고 일요일 오후를 마무리 짓는 데 바쳐야 할 것 같다. 아, 그 생각하면 우울하기도 하고 걱정도 된다.

하루키의 책을 읽을 때, 맥주를 마시는 장면에서는 맥주를 마시고 싶고, 섹스 장면에서는 섹스를 하고 싶다는 독자들의 반응에 대해, 하루키는 '그런 식으로 쓴다'고 답했다. '피지컬하게 읽는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다'고, '육체적인 반응을 일으킬 수 있도록' 쓰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한다.  

그런 작가의 의도는 [스푸트니크...]의 스미레를 통해 확인된다. 소설가를 꿈꾸는 스미레가 쓰는 문장이 그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기에 그녀가 언젠가는 소설가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1Q84]에서 안톤 체호프의 [사할린섬]을 인용하면서 주인공 덴고가 느꼈던 그 삭막한 고독은 이 [스푸트니크..]에서도 변함없다. 고독하다는 것, 심드렁하게 사치스런 감정이라고 치부하는 게 아니라 실제 그 감정을 느껴야 하는 사람이 하루키의 문장을 만나면 가슴이 뭉클한다. 그 '피지컬'한 반응은 하루키의 의도가 성공한 예다. 

 1999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언뜻 [상실의 시대]와도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고, 가장 최근작 [1Q84]와도 관계 있다. [상실의 시대]에서 '나' 와타나베가 마침내 미도리에게 전화했을 때, 미도리가 '지금 어디냐?'고 물었듯이 이제는 반대로 사라졌던 스미레에게 걸려온 전화에 대고 '나'는 '지금 어디냐?'고 묻는다.   

(사실, 하루키는 아주 오래전부터 소설을 쓰면서 다음에 얘기하고 싶은 소재나 주제를 발견하고 키워나가는 식으로 작품을 써왔던 것 같다. 어떤 소설에서 나왔던 인물이나 얘기를 확대하여 다른 작품으로 만들다든지 하는 식은 하루키에게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하다.)

'나', 스미레, 그리고 스미레가 사랑했던 뮤가 물고 물리는 사랑의, 존재의 환을 형성한다.  

지금 어디냐고 물으며 서로를 향해 달려갈 준비가 돼 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결코 완전히 동화하지 못한다. 언제나 간격을 두고 서로의 주위를 돌 수밖에 없는 '고독한 금속 덩어리'와 같다.  

소설 마지막에 나는 스미레의 전화를 받은 후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본다. 같은 세계의 같은 달을 보고 있다고, 자신들이 분명히 하나의 선으로현실과 연결돼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바라본 손, 그 손에 흘러야 할 피의 흔적이 없다, 어딘가로 깊이 스며들어 가버렸다는 걸 알게 된다.  

이쪽과 저쪽에 있는 나와 '나', 어느 쪽이 진짜 나인지, 나 일 수 있는지, 그 혼돈을 피하기 위해 뮤는 스미레의 사랑 고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여전히 각자로, 이쪽의 나이지만 저쪽의 그녀 혹은 그인 채로 인정하고 그대로 둔다.  

하루키에게 우물, 이쪽과 저쪽의 존재, 이 세계와 저 세계에 서로 각자 존재하는 존재들의 세계는 스스로가 인식하고 의도하는건지 원래 작가의 세계인지는 모르지만 이 소설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p.s. 하루키 소설을 읽으며 알지 못했던 작가를 소개받곤 한다. 이 소설에서는 잭 케루악Jack Kerouac(1922~1969)이 나온다. 비트제너레이션에 속하는 작가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번역 소개된 책이 없는 것 같다.  [on the road]는 교보문고에 재고가 있는 모양인데... 언제 읽겠냐 싶어 호기심을 닫았다.  

[1Q84]에 소개된 안톤 체호프의 [사할린섬]도 읽어 보고 싶지만, .... 이 역시 과도한 욕심이다.  

레이몬드 챈들러나 스콧 피츠제럴드는 다시 읽게 되고, 레이몬드 커버도 손에 들어보고, 몰랐던 작가 존 어빙의 소설도 찾아 읽어봤다. 하루키 때문에 너무나 오랫동안 소설을 읽지 않았던 세월을 반성하고 소설을 읽기 시작했으니까. 한국작가들의 소설에 좀체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여전하다. 아예 마음이 끌리지 않거나 '의무'처럼 읽어보려 해도 냉큼 던져 버리는 일이 계속된다.  

p.s.  아이 때 아무래도 잠투정이 심하지 않았나 싶다. 잠이 들기 전까지 심하게 보챘던 일이 어슴프레 기억 나기도 한다. 왜 그랬을까. 일 할 때마다 마치 잠투정 하듯이 막상 일에 집중하기 전까지 심하게 실행 증후를 앓는 것 같다. 착수하면 어차피 해 내고 마는 것을, 거기에 도달하기 전까지 이리 저리 방황하며 걱정만 하며 보낸다. 마음이 방황한다. 

오늘도 일 마무리 짓는 데 따지고 보면 3시간이 채 안된 듯 한데 점심 이후 내내 '해야 하는데'만 연발하며 전전긍긍했다. 자신이 없어서인가, 확신 하지 못해서인가? 이 버릇 고쳐야 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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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유증이 좀 있다. 조정이 될지 폐기될지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책에 집중하는 게 상당히 힘들지만...(소심함과 예민함이란 살아가는 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엊그제간에 바쁘고 정신 없는 틈틈이 재미있게 읽은 책은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이다.  

 

 

 

 

 

 

 

이 사람 상당히 흥미로운 사람이더군. 촘스키와 맞짱뜬 사람인데다, 촘스키가 말도 안섞는다는 사람.... 촘선생의 이런 면을 드러내게 한 사람이라니 재밌지 않는가.  

"사람들은 경제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자기의 가치와 정체성에 투표한다는 것". 

이 책에서 핵심적으로 떠올릴 문장이라면 이 문장을 선택하겠다. 지난 2006년, 2007년의 총선, 대선에서 사람들이 지향한 가치와 선택이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는지 궁금하다. 최근 유시민은 김혜리와의 인터뷰에서(씨네21) '국민들 스스로가 내가 뭘 원하는지 알고 거대한 흐름으로 형성해 내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본'다고 했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었다. 큼직큼직한 일들이 팡팡 터져도 좀체 속내를 파악하기 힘들정도로 무표정한 모습이 지금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년 지방선거라든지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정치인들도 확신을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프레임에 대해 사고할 수 있게 해줘서 실용적인 책이었다.  

프레임적 사고와 정치적 수사학은 다르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와 함께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70년대는 잘 모르겠고, 80년대의 DJ는 대중연설로 인상적인 기억에 남는 사람이다. 요즘은 대통령 선거나 여러 선거에서 잡다한 유세가 펼쳐지고, 기회만 있으면 어디서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정치적 활동이 자유롭지 못했던 그 때만해도 대중 집회가 한 번이라도 마련된다면 정말이지 그 펄펄 끓어오르던 사람들의 관심과 열기란 대단했었다.(정치적 연금이 풀리고 광주를 찾았던 DJ 의 전남 도청 앞에서의 연설은 ... ) DJ를 보고 타고난 연설가라고 사람들이 말했다. 독특한 면모가 있었다.  

가끔 정치인들의 수사에 대해 분석한 글들을 보곤 하는데,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이 정치인들을 분석한 글, 강만준이 특유의 문헌학적 글쓰기에 따라, 정치인이 한 말, 글을 모두 인용하여 분석한 글 정도?  정치학, 심리학, 수사학적 분석들이 잘 버무려진 재미있는 글이 보고 싶다.  

 

 

 

 

 

 

 

연설을 찾았더니 영어학습 카테고리에 맞춘 책들이 너무나 많았다. 요즘 학생들은 진짜 대단하다니까!   

[위대한 연설]이 당기긴 한데, ... 실물을 보고 판단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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