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스푸트니크의 연인]은 예기치 못한 상태에서 읽게 된 책이다. 오래 전에 들어는 봤던 것 같지만, 그날 우연히 발견할 때까지는 전혀 인식에 없던 책이었다. 그렇게 손에 들고서는 자기 전에 겨우 한 두 페이지 들여다보면서 며칠을 보냈다. 마음 속에 계속 책이 웅웅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금요일 저녁부터 오늘 오전까지에 걸쳐 본격적으로 읽어갔다. 덕분에 끝내야 할 일을 아직도 못 끝내고 일요일 오후를 마무리 짓는 데 바쳐야 할 것 같다. 아, 그 생각하면 우울하기도 하고 걱정도 된다.

하루키의 책을 읽을 때, 맥주를 마시는 장면에서는 맥주를 마시고 싶고, 섹스 장면에서는 섹스를 하고 싶다는 독자들의 반응에 대해, 하루키는 '그런 식으로 쓴다'고 답했다. '피지컬하게 읽는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다'고, '육체적인 반응을 일으킬 수 있도록' 쓰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한다.  

그런 작가의 의도는 [스푸트니크...]의 스미레를 통해 확인된다. 소설가를 꿈꾸는 스미레가 쓰는 문장이 그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기에 그녀가 언젠가는 소설가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1Q84]에서 안톤 체호프의 [사할린섬]을 인용하면서 주인공 덴고가 느꼈던 그 삭막한 고독은 이 [스푸트니크..]에서도 변함없다. 고독하다는 것, 심드렁하게 사치스런 감정이라고 치부하는 게 아니라 실제 그 감정을 느껴야 하는 사람이 하루키의 문장을 만나면 가슴이 뭉클한다. 그 '피지컬'한 반응은 하루키의 의도가 성공한 예다. 

 1999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언뜻 [상실의 시대]와도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고, 가장 최근작 [1Q84]와도 관계 있다. [상실의 시대]에서 '나' 와타나베가 마침내 미도리에게 전화했을 때, 미도리가 '지금 어디냐?'고 물었듯이 이제는 반대로 사라졌던 스미레에게 걸려온 전화에 대고 '나'는 '지금 어디냐?'고 묻는다.   

(사실, 하루키는 아주 오래전부터 소설을 쓰면서 다음에 얘기하고 싶은 소재나 주제를 발견하고 키워나가는 식으로 작품을 써왔던 것 같다. 어떤 소설에서 나왔던 인물이나 얘기를 확대하여 다른 작품으로 만들다든지 하는 식은 하루키에게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하다.)

'나', 스미레, 그리고 스미레가 사랑했던 뮤가 물고 물리는 사랑의, 존재의 환을 형성한다.  

지금 어디냐고 물으며 서로를 향해 달려갈 준비가 돼 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결코 완전히 동화하지 못한다. 언제나 간격을 두고 서로의 주위를 돌 수밖에 없는 '고독한 금속 덩어리'와 같다.  

소설 마지막에 나는 스미레의 전화를 받은 후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본다. 같은 세계의 같은 달을 보고 있다고, 자신들이 분명히 하나의 선으로현실과 연결돼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바라본 손, 그 손에 흘러야 할 피의 흔적이 없다, 어딘가로 깊이 스며들어 가버렸다는 걸 알게 된다.  

이쪽과 저쪽에 있는 나와 '나', 어느 쪽이 진짜 나인지, 나 일 수 있는지, 그 혼돈을 피하기 위해 뮤는 스미레의 사랑 고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여전히 각자로, 이쪽의 나이지만 저쪽의 그녀 혹은 그인 채로 인정하고 그대로 둔다.  

하루키에게 우물, 이쪽과 저쪽의 존재, 이 세계와 저 세계에 서로 각자 존재하는 존재들의 세계는 스스로가 인식하고 의도하는건지 원래 작가의 세계인지는 모르지만 이 소설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p.s. 하루키 소설을 읽으며 알지 못했던 작가를 소개받곤 한다. 이 소설에서는 잭 케루악Jack Kerouac(1922~1969)이 나온다. 비트제너레이션에 속하는 작가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번역 소개된 책이 없는 것 같다.  [on the road]는 교보문고에 재고가 있는 모양인데... 언제 읽겠냐 싶어 호기심을 닫았다.  

[1Q84]에 소개된 안톤 체호프의 [사할린섬]도 읽어 보고 싶지만, .... 이 역시 과도한 욕심이다.  

레이몬드 챈들러나 스콧 피츠제럴드는 다시 읽게 되고, 레이몬드 커버도 손에 들어보고, 몰랐던 작가 존 어빙의 소설도 찾아 읽어봤다. 하루키 때문에 너무나 오랫동안 소설을 읽지 않았던 세월을 반성하고 소설을 읽기 시작했으니까. 한국작가들의 소설에 좀체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여전하다. 아예 마음이 끌리지 않거나 '의무'처럼 읽어보려 해도 냉큼 던져 버리는 일이 계속된다.  

p.s.  아이 때 아무래도 잠투정이 심하지 않았나 싶다. 잠이 들기 전까지 심하게 보챘던 일이 어슴프레 기억 나기도 한다. 왜 그랬을까. 일 할 때마다 마치 잠투정 하듯이 막상 일에 집중하기 전까지 심하게 실행 증후를 앓는 것 같다. 착수하면 어차피 해 내고 마는 것을, 거기에 도달하기 전까지 이리 저리 방황하며 걱정만 하며 보낸다. 마음이 방황한다. 

오늘도 일 마무리 짓는 데 따지고 보면 3시간이 채 안된 듯 한데 점심 이후 내내 '해야 하는데'만 연발하며 전전긍긍했다. 자신이 없어서인가, 확신 하지 못해서인가? 이 버릇 고쳐야 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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