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많이 알려져 있는 듯 한데, 나는 최근에야 봤다.  
2006년 유종호 연세대 석좌교수가 학생들이 가장 감명깊게 읽고  흥미밌게 읽은 책으로 하루키 소설을 들고 있다는 점을 염려하면서,  
 
하루키 소설은 '문학의 죽음을 재촉하는 자기 파괴적 허드렛문학'이라고 규정했다. "[상실의 시대]에 중독된 독자는 그 작품의 화자가 읽고 있는 형성소설[마의 산]을 끝내 읽어내지 못하고 말 것이다. 마음의 귀족되기는 틀렸지만 그렇다고 흉될 것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론] 중, '닫힌 역사와 열린 텍스트로서의 작품 읽기'(옮긴이의 글, 김춘미) 인용) 
  
재밌는 말은 또 있다.  
한국 칸트학회장인 강영인 교수는 <<포스트모던 칸트>>라는 글에서 하루키의 [1973년의 핀볼] 에서의 한 단락을 인용하면서  
 
"핀볼의 주인공들은 노닥거리는 데 칸트를 사용한다" 고 개탄(?)했다.   

"......칸트는 오늘날 세상의 바닥을 기어다닌다. 아무 여자 아이들하고 잠자리에서 깨어나는 젊은이의 아파트 구석에 굴러다니며 할 일 없이 무료할 때 한마디 인용되기 위한 칸트. 이제 칸트는 바닥생활이라는 새로운 운명을 살아 나가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는 진실에 대한 우울한 교훈이 아닌가? 흔히 말하는 모더니즘의 기획이 흙바닥에 떨어진 시대에 근대 계몽주의의 완성자 칸트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그냥 하루키 읽게 해주세요, 네?  

[1Q84] 때문인지, 아니, 뭐, 그저 전부터 솔솔 불어넣어진 하루키의 '사회참여'에 대한 기대(?)또는 마케팅 효과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지 않았음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루키만의, 또는 하루키 같은 소설가도 있는 것이지, 자기 스스로가 그런 뉘앙스를 풍기곤 한다해도, 하루키는 하루키지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상실의 시대]와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의 [벌꿀파이]가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지 잘 모르겠다. 아, 물론 [벌꿀파이]에서의 '결심'이 대단해 보인다면 뭐, 그렇게 봐줘도 되겠지.   

[태엽감는 새]에 나왔나, [양을 쫓는 모험]에도 나온 듯한데, '노몬한사건'에 대한 하루키의 관심과 연구가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로 인식하는 일본인들의 보편적 정서이자 인식'을 느끼게 해주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인인 나는 읽으면서 걸리더라. 그게 하루키다(하루키였나?). 그의 한계라면 한계고, 그의 세계 인식이다. 이해하든지, 거부하든지. 지극히 하루키스러운가?

[1Q84] 2부의 손발이 오그라드는 아오마메와 덴고의 놀이터 엇갈림 씬은... 실망스러웠다.  

지난 6월 요미우리와의 인터뷰에서, 1995년 옴진리교의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 사건의 이후 일들에 관심을 가졌던 일에 대해서도, 하루키는 피해자들보다는 평범한 인간성을 가졌던 사람이 세뇌를 받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언제 생명을 빼앗길지 모르는 사형수가 된 상황, 그 상황에 대해 몇 년 동안 생각해왔고, 그것이 [1Q84] 이야기의 출발점이 됐다고 말했다.   

그의 그런 대략적인 생각을 따라가보면, [1Q84]에서 '선구'의 리더에 대한 묘사를 왜 그렇게 했는지 이해가 가기도 했다.   

지하철 독가스 살포사건의 피해자들의 인터뷰를 정리한 책 [언더그라운드]는 우리 나라에 출판됐으나, 옴진리교 신자들의 인터뷰인 [약속된 장소에서]는 출판되지 않은 모양이다. [언더그라운드]의 저조한 판매실적이 [약속된 장소에서]에 여파를 미쳤을까? 

約束された場所で―underground〈2〉

하루키의 이야기 솜씨는 언제나 경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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