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의상
나이가 들다 보니 새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만큼 에너지 소모를 많이 필요로 한다. 장면 하나하나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투지와 함께 문맥을 해독해서 전체 맥락을 빠르게 이해해야 한다는 시네필로서의 사명감이 발동하다 보니 에너지 소모가 큰 탓이다.
그래서 나는 봤던 영화를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보는 취미가 생겼다. 재관람은 영화를 보다가 한눈을 팔아도 되고 딴청을 부려도 되니까. 장이모우 감독이 연출한 영화 << 국두, 1990 >> 는 천을 염색하는 염색공장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인데, 이 영화를 보다가 문득 역사 시간에 선생이 우리 민족을 가리켜 백의민족이라고 말하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레발을 쳤던 기억이 났다. 옛 조상이 흰옷을 즐겨 입은 이유는 순수, 순결, 평화를 사랑했기 때문이라나 ?! 지금도 여전히 견고하게 유통되고 있는 역사 국뽕 설레발이다. 그런데 우리 조상은 정말로 흰색이 좋아서 백의'를 즐겨 입었을까 ?
영화 << 국두 >> 에서 묘사하고 있듯이 무명 천에 색을 입히는 염색 과정은 매우 고된 일이기에 색을 입힌 천은 그만큼 품값이 많이 들고 비쌌다. 우리 조상이 백의를 즐겨 입은 이유는 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문제가 핵심이었다. 백 번 양보해서 옛 조상이 순결, 순수, 평화 따위를 사랑해서 흰색을 사랑했다면 왜 돈 많은 양반들은 화려한 비단 옷을 입었을까 ? 바로 이 맛에 봤던 영화를 다시 본다. 영화에 집중하지 않고 삼천포로 빠질 수 있는 여유가 생기니 영화를 볼 때마다 다른 생각에 빠지게 된다.
<< 국두 >> 에서 여주인공(공리)은 주로 노란색 옷을 입고 등장한다. 염색한 천을 말리기 위해 걸어둔 횃대에는 주로 노란색 천과 붉은색 천이 걸린다. 이처럼 노랑은 빨강과 함께 중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색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삼천포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 옛날 국사 선생이 백의(민족)를 두고 과도한 의미와 해석을 부여했듯이 언론은 외교 순방 중인 박근혜 패션을 놓고 입에 거품을 물며 용비어천가를 읊었던 기억이 났다. 중국 방문 기간 3일 동안 입은 패션 스타일이 7종이란다. 밝고 화사한 컬러는 국민 행복을 늘 주장하시는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엿볼 수 있다고. 어디 그뿐인가.
언론은 중국 방문 기간 중에 박근혜 대통령 각하 님께서는 7벌의 투피스와 2벌의 한복을 입으시었다 _ 고 분석 기사를 쏟아냈다. 언론은 외교를 쁘레따뽀르떼로 생각했는지 다음과 같은 북한 억양이 깃든 보그병신체를 선보인다.
위대한 영도쟈 박근혜 대통령 각하 님께서는 v넥이 강조된 비비드한 컬러가 돋보이는 바이올릿 재킷에 더해 엣지 있는 팬시퍼플한 목걸이와 세트인 브로치를 왼쪽 가슴 위에 포인트로 달아 남다른 패션 센스를 보여주시었다. 그리고 꾸뛰르적인 디테일을 선보인 엘레강스한 옐로우 재킷은 황제의 부와 권위를 상징한다고 믿는 중국인에게 프렌들리한 스킨십을 전달하는 동시에 정상으로서의 품격을 지킨 남다른 패션 열정이 돋보이시었으니 가히 세기의 퍼스트레이디프리지던트로 부상할 조짐이 아닐 수 없다.
이랬던 언론이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자 180도 달라졌어요 ! 문재인 혼밥론과 홀대론을 부각하더니 어느 언론사는 중국 경호원이 한국 기자에게 폭행을 나눌 때(도리돌림할 때) 김정숙은 스카프를 나눴다는 기사도 작성되었다. 이 정도면 보도 참사'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기자들은 맞은 기자를 옹호하며 " 맞아도 싸다 " 라는 시민 반응에 " 맞아도 되는 기자는 없다 " 고 하소연하지만, 언제부터 < 맞아도 싸다 > 는 표현이 < 맞아야 한다 > 는 표현과 동일한 것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그런 식의 비약이 가능하다면 < 오, 죽여주는데 ! > 라는 표현은 < 죽이겠다는 살의 > 를 내포한 것인가 ?
흔한 말이어서 나중에 관용구처럼 사용되는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있는 기자의 국어 실력은 보그병신체를 남발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 어느 정도 가름이 가능하다. 크리스마스에 이런 표현이 부적절하긴 하지만 기자들의 자기 연민, 참 징글벨징글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