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오필스, 미지의 여인으로부터 온 편지 : 순애보에서 복수극'으로
슈테판 츠바이크의 << 낯선 여인의 편지 >> 에 대한 " 서평 " 을 읽어보았다. 나는 이 작품을 < 여인의 복수극 > 으로 읽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 여인의 순애보 > 로 읽었다는 점에서, 한 작품을 두고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린다는 점에서, 꽤 흥미로웠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 작품을 << 아내의 유혹 >> 으로 접근했는데 다른 이들은 이 작품을 << 풍금이 있던 자리 >> 로 접근했다는 점이다. 내 판단이 옳고 당신 해석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서로 취향이 다른 것이다. 내가 이 작품을 여인의 복수극으로 이해한 것은 내 장르적 취향'이 반영된 탓이기도 하거니와 " 착한-서사 " 에 대한 체질적 반감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는 소설 속 여인'은 " 체제 순응적 인물 " 보다는 " 체제 반항적 인물 " 이다. 그녀는 지독한 사랑'을 끝내기 위해 날 벼린 칼을 책상 옆에 두고 펜을 들어 편지를 쓴다. 사랑하는 님이여,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시나요 ? 절절한 고백을 듣다 보면 무쇠 같은 사내라 해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하지만 이 편지'는 사랑을 가장한 복수'다. 죽기로 결심한 순간, 여인은 그 남자에 대한 원망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한 남자를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말하는 척하면서 잔인한 복수를 계획한다. 그녀가 편지에 쓴 " 지독한 사랑 " 은 어쩌면 " 평범한 호감 " 을 과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야지 복수는 완성되니까. 불행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그 남자의 회한도 짙어질 테니까.
그러니까 그녀는 당신을 향한 사랑이 조건 없는 " 아가페 " 적 사랑이었음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 에로스 " 적 몸'을 강조한다. 그녀는 뭇 사내들에게 구애와 청혼을 받는 선망의 대상'이라는 점을 각인시킨다. 그리고 자신이 고급 창녀'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아가페와 에로스, 성녀와 창녀. 이 얼마나 완벽한 조합인가 ! 더군다나 죽은 아이'는 총명하고 아름다운 아이'다. 남자는 편지를 통해 그동안 자신이 모르고 있던 것을 모두 잃어버린, 불행한 남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신이 잡았다 놓친 물고기가 얼마나 큰 것인지...... 낯선 여인'은 남자에게 당신의 무관심'이 낳은 폐허'를 보라고 요구한다. 소설은 여기까지'다. 회한에 사로잡힌 호색한은 지난날을 회상한다. 스치고 지나갔던 일들을, 여성을 소모품 따위로 취급했던 날들을, 그런 날들을.
이 소설은 많은 감독들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은 막스 오필스가 연출한 << 미지의 여인으로부터 온 편지 >> 다. 이 영화가 원작과 다른 점은 " 결투 설정 " 장면'이다(소설에서는 편지를 다 읽고 잠시 지난날을 기억하는 것으로 끝난다). 영화가 시작되면 남자가 처한 상황이 전개된다. 바람둥이였던 남자는 유부녀와 놀아나고, 이 사실을 안 유부녀의 남편이 남자에게 결투 신청을 한다. 남자는 3시간 후에 벌어질 결투를 피하기 위해 집에 잠시 들려 짐을 꾸려 비엔나로 도망칠 생각이다. 하지만 이 계획은 모르는 여인에게 온 편지'로 인하여 실패하게 된다. " 당신이 이 편지를 읽을 때에는 나는 죽었을 겁니다. " 이 강렬한 메시지 앞에 남자는 메두사를 바라본 사내처럼 압도당한다.
그는 짐을 꾸려 나갈 도피할 계획을 잠시 멈추고 편지에 몰입하기 시작한다. 결국 편지가 계획을 늦춘 것이다. 편지를 다 읽고 나자 시간은 이미 지나버린 후다. 남자는 도망칠 계획을 버리고 결투장으로 향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막스 오필스는 원작과는 전혀 다른 결말을 선보인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결투의 결과'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관객은 이 결투가 남자의 죽음을 암시한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관객은 편지를 읽고 난 남자가 계획을 철회하고 결투장으로 갈 때 언뜻 보인 " 회한의 얼굴 " 에서 자기 징벌이 어른거린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결국 남자를 죽음(결투장으로 향하게 만든.. )으로 내몬 것은 편지'였다. 여자는 죽은 후에 복수를 완성했다.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말이다.
이 영화가 걸작인 이유는 원작이 가지고 있는 본질을 꿰뚫었다는 데 있다. 막스 오필스는 순애보 속에 감춰진 복수극을 간파했다. 이 영화는 순애보라는 지극히 남성 판타지 서사'를 여성주의 시각으로 변주했다는 점에서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 멜로 드라마'다. 이처럼 너무 늦게 도착한, 혹은 발신인이 죽은 다음에 수신인에게 도달한 편지는 불길한 증후로 작동하는 오브제'다. 송해성 감독이 연출한 << 파이란 >> 도 " 너무 늦게 도착한(발신인이 죽은 다음에 수신인에게 도달한) 편지 - 서사 " 에 속한다. 이 영화에서 파이란은 낯선 여인'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여성이다. 그녀는 3류 건달 최민식을 사랑하지만 정작 그의 기억 속에는 그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이 러브레터는 결국 남자(최민식)을 죽음으로 내몬다.
그런 점에서 영화 << 미지의 여인으로부터 온 편지 >> 와 << 파이란 >> 은 닮은 꼴'이다. 두 영화 모두 편지'가 남성의 죄의식을 호명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곰곰 생각하니, 막스 오필스의 1946년 작품인 << 미지의 여인으로부터 온 편지 >> 를 여성영화제'에서 보았다. 그렇다, 이 영화는 여성주의 시각으로 풀어낸 진정한 멜로 드라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