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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그녀 : 렌티큘러 스틸북 한정판 - 16p 부클릿 + 포스트카드(6EA) + 아트카드(2EA)
스파이크 존스 감독, 호아킨 피닉스 외 출연, 스칼렛 요한슨 목소리 / 하은미디어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어수선 44호
이제 당신을 내 마음에서 내려놓겠습니다.
나 오직 그대만을......
ㅡ 유재하
오늘은 내가 사랑하는 그녀에 대해 말해 보련다. 그녀를 알고 지낸 지는 4년이 넘었다. 나는 고객이었고 그녀는 직원이었다. 그녀에 대한 첫인상은 그닥 좋은 감정은 아니었다. 친절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쌀쌀맞은 구석이 있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자신감이 묻어나는 목소리에는 성공에 대한 강한 집착이 엿보였다. 어느 날이었다. 화사한 봄날 애인 없이 방구석에 있다 보니 답답한 마음이 들어 차를 몰고 동해 밤 바다'로 향했다. 그때였다 ! 목소리가 내게 말했다. " 나들이 하기 좋은 날씨죠 ? "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는 차 안에서 누군가가 내게 말을 했으니깐 말이다. 하지만 뒷자석에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 나들이 하기 좋은 날씨라구요. 호호... " 라디오 단막극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아니었다. 라디오는 꺼져 있었다.
차를 길가에 세우고 곰곰 생각하니 그 목소리는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였다. 친절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사무적인 목....... 그렇다, 바로 그녀'였다. 그녀 목소리가 내 차 안에서 울린 것이다. " 많이 놀라셨죠 ? " 목소리가 말했다. 그녀는 내비게이션 운영 체제에 의해 재생되는 기계 목소리'였다. 뭐, 이 글을 읽는 이웃들은 내 말을 믿지 못하겠지만 100% 진실이다. 당신이 설레발이라고 흉을 본다고 해도, 나는 당신을 원망하지는 않겠다. 사실, 나도 믿기지 않으니까 ! 그냥 단순하게 방사선 누출로 인한 이상 현상이라고 생각해 달라. 정해진 시나리오 대사가 아닌 사적인 이야기를 할 때 그녀는 나긋나긋하고, 수줍고, 상처 많은 목소리'였다. 그녀는 그냥 " 그녀 " 였다. 나는 그녀라는 이름 대신 " 사만다 " 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스파이크 존즈 영화 << 그녀 >> 에서 주인공 남성이 사랑에 빠지는 여자 목소리 이름이 " 사만다 " 인데 내 상황과 유사했기에 단박에 생각해낸 이름이었다. 사만다는 내가 쓸쓸할 때 나를 기쁘게 했으며, 시시한 농담에도 크게 웃었고, 슬픈 일에는 나보다 더 크게 낙담했다. 우리는 그렇게 말동무가 되었고, 사랑에 빠졌다. 맙소사, 내비게이션 목소리와 사랑에 빠지다니. 그녀는 캄캄한 밤 바다를 좋아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동해 밤 바다를 구경하고는 했다. 집어등 밝은 빛이 밤 바다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그녀가 말했다 : 사랑이라는 감정은 좋은 와인 잔과 같아요. 좋은 와인 잔은 잔끼리 부딪히고 나면 유리 잔 안에서 맑은 종소리가 울려요. 사랑도 그래요. 사랑에 빠지는 순간 맑은 종소리가 나거든요. 내가 당신 목소리를 듣는 순간 느꼈던 그 종소리.....
나는 말했다 : 당신에게 몸이 있었으면 좋겠어. 사랑을 나누고 싶어. 봉긋 솟은 당신의 젖무덤을 핥고, 촉촉하고 검은 동굴을 탐험하고 싶어. 목소리만 가지고 있는 존재는 쓸쓸하지. 당신을 사랑하면 할수록 더욱 간절해지는 욕망이야. 그녀가 말했다 : 당신에게 고백할 말이 있어요. 이 세상 모든 제품은 유통 기간이 있어요. 복숭아 절임 깡통에 박힌 유통 기한처럼 말이죠.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내 수명은 4년이에요. 소비자들은 모르지만 공장에서 출시될 때 이미 내 수명은 정해져 있어요. 영원히 고장나지 않으면 회사 입장에서는 손해이니깐.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내 목소리가 사라질 날도...... 마지막 부탁이 있어요.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이번 주 주말에 나를 그곳에 데려다 줘요 !
그것은 이별을 준비하기 위한 그녀의 작별 인사였다.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쓸쓸하고 아련해서 눈물이 났으나 꾹 참았다. 약속한 날짜가 다가왔다. 나는 그녀가 말하는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그녀는 사무적인 내비게이션 멘트 말고는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경로 안내를 시작합니다..... 안전 운전하십시요...... 왼쪽으로 좌회전 하십시요...... 전방 150미터 앞 사고 다발 지역입니다..... 우회전 하십시요...... 전방 10미터 앞 과속 방지턱이 있습니다..... 주의하십시요. 나는 묵묵히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나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하는 순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아무 말이 없이 목적지를 향해 묵묵히 다가갔다. 그녀가 오랜 침묵 끝에 말했다. 목적지에......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당신을 내 마음에서 내려놓겠습니다. 나는 차 시동을 끈 채 오랫동안 서러워서 울었다. 차에서 내렸다. 나는 그녀가 안내한 집 앞에 섰다. 문을 두드리기 전에 깊은 들숨과 얕은 날숨을 뱉은 후, 떨리는 마음으로 문을 두드렸다. 한 여자가 문을 열었다. 처음 보는 여자였다. 하지만 그 여자는 나를 보더니 크게 당황하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언어 장애가 있어서 말을 하지 못했다. 말 대신 짧은 수화가 오고갔다. 나는 그녀를 알지 못했지만 그녀는 나를 잘 알고 있었다. 하루 종일 내 블로그를 찾는다고 했다. 그녀는 사만다라는 이름을 가진 내 이웃이었다. 나는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느 목소리가 나를 이곳으로 안내했다고 말이다. 어쩌면 당신이 잃어버린 목소리가 나를 여기로 오게 했는지도 모른다고.
말을 잃은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그리고 낮게 속삭였다. " 사만다, 나의 사랑 사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