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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보내고 싶은 엽서
양선희
生花는 꽃이 질 때 가슴이 쓰려.
조화가 좋아지니 나이가 들었나 봐.
나 요즘 조화 배우러 다녀.
조화는 신비해. 못 만들 게 없어.
조화에 정신을 쏟아부으니 아픈 게 덜해.
온 집 안에 조화뿐이야.
조화라도 있으니 집이 좀 그럴듯해.
조화를 가만히 뜯어보면
사는 게 위로가 되기도 하고.
조화, 너도 한번 배워봐.
조화 모양 초보 때는 엉성해도
생화 같은 조화 만들게 돼.
색 쓰는 법도 알게 되고.
요즘 나 조화에 파묻혀서 지내, 죽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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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시 < 너에게 보내는 엽서 > 에서 " 요즘 조화 배우러 다" 닌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꽃봉오리 가장 아름답게 터질 때의 화사한 조화'를 만든다. 이유는 " 생화는 꽃이 질 때 가슴이 " 아프기 때문이라며 변명을 한다. 그녀는 생의 유한성'보다는 모조품이 만들어내는 불멸'을 선택한다. 그러나 조화'는 불멸이 아니라 이미 죽은 것, 박제를 떠올리게 한다. 불멸에 대한 애착이 강하면 강할수록, 죽음은 보다 더 선명하게 보인다. 그녀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조화에 대한 예찬은 이내 체념으로 끝을 맺는다. " 죽은 듯. " 이, 조화처럼, 답답해. 그녀는 생화에서 조화로의 변화'를 체념하듯 받아들인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마술에 걸린 달밤'을 넘지 못한다. 봄바람 살랑살랑 꽃봉오리 터져도 이제는 설레임이 없다. 월경은 끝을 맺고 폐경기로 접어든다. 씨방 없는 조화의 삶을 살아야 한다. 폐경인 그녀'는 씨방 없는 조화'를 통해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낀다. 조화를 가만히 뜯어보면 사는 게 위로가 되기도 하고, " 조화라도 있으니 집이 좀 그럴듯해 " 보이기도 한다며 조화 예찬의 이유를 말한다. 하지만 花色 ( 색 쓰는 법도 알게 ) 을 이야기하는 화자는 어딘지 모르게 病色'( 아픈 게 덜해 )이 완연하다. 이 여자, 바람에 꽃대가 흔들리는 이 여자, 위험하다. 찬 가을바람에 단풍 물들기 전에 잎 질라, 걱정이다.
로맨스와 불륜 : " 꽃이 필 무렵 "
벽화 마을'에서 산다는 것은 꽤나 거슬리는 일이다. 해당화나 봉선화'가 곱게 핀 마을이라면 모를까, 벽에 그려진 벽화(꽃 그림)가 넘쳐나는 마을이 좋게 보일 리 없다. 해바라기와 코스모스는 단골 소재여서 한 집 건너 해바라기와 코스모스'다. 생화가 아니니 조화'다. 조화를 좋아하는 이도 있을까 ? 비록 조화(造花)가 양귀비보다 예쁜 자태로 그려졌다 한들 주변 환경과 어울리지 못하면 민폐가 되는 법이다. 양선희 시인은 시 < 너에게 보내고 싶은 엽서 > 에서 조화가 좋다고 고백하지만 속내는 다르다. 중요한 것은 예쁜 조화造花가 아니라 주변 환경과의 조화調和'다. 그래야지 조화'가 좋아'보이지, 조화가 조화롭지 못하면 좋아보일 리 없다. 이제 꽃샘잎샘하는 날이 지나면 봄이 온다. 이 마을도 꽃 구경을 하기 위한 상춘객을 맞이해야 한다.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꾸역꾸역 찾아와서 사진 찍으며 노는 모습을 보면 넉살도 좋다. 아마 당신은 내가 벽화 마을'에 산다는 글을 올리면 제일 먼저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 곰곰생각하는발, 집이 가난하네... " 부정할 생각은 전혀 없다. 가난하다. 하지만 자연으로부터 얻는 혜택을 고려하면 이건희가 사는 집보다 풍경이 좋다. 묵은 쌀을 마당에 뿌리면 참새떼가 날아와 쌀을 먹으며 재잘재잘거린다. 어림잡아 4,50마리는 된다. 창문에 숨어서 그 모습을 보면 참새들이 정말 예쁘다. 집마당에서 참새떼를 본다는 게 그리 흔한 풍경은 아니지 않은가 ? 어치도 종종 내려와서 개밥바라기에 남은 밥풀을 훔친다. 그리고 작은 터앝을 꾸미다 보니 달팽이나 배추 벌레도 자주 보게 된다. 생각보다 꽤 풍경이 좋은 동네'다. 그런데 공공 미술 프로젝트 팀'이 와서 마을에 벽화를 그리고나서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내가 사람들에게 벽화 마을에 산다고 하면, 내색은 안하지만 속내는 빈민촌'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기획한 벽화 마을 사업은 그런 용도'였기 때문이다. 관료적 발상에서 나온 생각이니 정화와 미화적 측면을 부각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을 것이다. 88올림픽 때 달동네 모습이 추하다고 달동네 지나가는 도로에 가림막을 설치했다는 일화가 떠오른다. 가난한 사람에게 그림 하나 그려주면 꿈과 용기가 생긴다는 발상 자체가 얼마나 웃긴 생각인가. 어흥 ! 차라리 떡 하나 주면 감지떡지라도 하지. 아마도 벽화 마을'이라는 아이디어'는 사회학 용어인 < 깨진 유리창 이론 > 에서 힌트를 얻어 추진한 것처럼 보인다. 건물에 유리창이 깨진 채 방치가 되면 양아치 한두 명이 모이게 되어 본드를 불게 되고 이게 확장이 되면 전체가 우범 지역이 된다는 이론이다.
보아하니 공공 프로젝트 팀은 내가 사는 동네가 잿빛이니 무지개 색깔로 알록달록하게 그려주자는 동심에서 시작을 했겠지만 그 어느 마을 주민도 삶이 잿빛에서 " 컬러풀 " 하게 바뀌지는 않았다. 개동이네 집 담벼락에 그려진 둘리 새끼는 몇 년 동안 씻지 않아 그 해맑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그지 새끼'가 되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마을 주민이 안 볼 때 몰래 벽에서 기어나와 담배를 피운다고 한다. 또 다 큰 어른보다 크게 그려놓은 포켓몬스터는 말 그대로 몬스터처럼 보인다. 그리고 백조의 하얀 날개죽지는 이제 까마귀 날개가 되었다. 하여튼 이곳은 일 년 내내 꽃이 지지않는 마을이 되었다. 마치 조화로 멋을 부린 시골 다방 인테리어 같다. 누군가는 내가 벽화 마을에 대해 쓴 글에 대해 사람의 선의'를 그런 식으로 매도하지 맙시다 라는 충고를 하기도 했다.
물론 선의였을 테지만 지나친 동정은 종종 폭력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집이 구경거리'가 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조망권'이나 일조권 주장도 알고 보면 볕을 확보하고 싶다는 속내 못지않게 인접 고층 건물에 의해 내가 사는 집 내부가 남들 눈에 노출된다는 사실에 대한 거부감이 작용한 탓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고층 건물일수록 집값이 비싼 이유는 타인에게 " 보여주지 않을 권리 " 가 작동한 까닭이다. 법으로 정한 조망권은 " 먼 곳을 바라볼 수 있는 권리 " 라고 해석되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내 집 내부를 " 타인의 구경거리 " 로부터 보호를 하기 위해 조망권과 일조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재벌 사장들이 사는 집은 대부분 높은 곳에 있다. 내려다보고 싶은 심리가 작동한 탓이다. 서민이라고 해서 다를까 ?
아파트 1층에 사는 사람은 여윳돈이 있으면 가장 비싼 꼭대기 층에서 살고 싶다는 욕심을 가진다. 그런데 벽화 사업'은 " 보여주지 않을 권리 " 를 철저하게 무시했다. 자신들은 그토록 아파트 로열층에서 살고 싶다는 욕심을 가지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내리는 꼴이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 보여주지 않을 권리 " 가 없다는 소리일까 ?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은 여기서도 통한다. 나 같은 사람이 보여주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면 배부른 소리라고 생각한다. 가난한 놈에게는 권리란 없다. 그게 바로 대한민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천박이다. 여의도에는 < 친박 > 이 득실거리고 사회에서는 < 천박 > 이 기세등등'한다. 벽화 마을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공공 프로젝트 사업일까 ? 벽화 마을 주민으로써, 봄이 오면 반갑지 않은 손님은 황사뿐만이 아니다.
카메라를 든 상춘객도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니 불청객'이다. 인근 고층 건물 때문에 자신의 집이 노출된다고 지랄을 하던 이'는 어느새 남의 집 담을 기웃거리며 구경을 한다. 주말 대낮에는 방에서 섹스도 못할 판'이다, 조또 !
오늘의 한자 공부
造
[ 告 : 고할 고 ] 는 " 牛(소 우) + 口(입 구) " 가 합친 구조다. 소를 제물(牛)로 바치고는 소원을 말한다(口)에서 아뢰다, 하소연하다, 뵙고 청하다 라는 뜻이 파생되었다. [ 造 : 만들 조 ] 라는 한자는 " 告 + 辶( =辵 쉬엄쉬엄가다 ) " 로 이루어져 있다. 즉 제물을 바치기 위해 첫걸음을 떼었다는 뜻이 된다. 그 이미지에서 처음, 시작하다, 벌여놓다, 짓다, 만들다'가 파생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누누이 주장하는 신조어 " 창조경제 " 에서 창조: 創造'는 처음으로 만들다, 신이 우주 만물을 짓다 라는 뜻이다. 번역하면 새로운 경제를 만들겠다는 소리인데, 쉰소리 아닌가 싶다. 박근혜 식 선민 의식'에 사로잡힌 무의식'이 반영된 말이어서 생강을 씹은 듯 인상을 쓰게 된다. 새로 만들지 말고 있는 경제'나 제대로 살렸으면......
友
흔히 중학교 한문 시간에 [ 又 : 또 우 ] 라고 외우고는 했는데, 그보다는 오른손 우'라고 이해해야 뜻이 통한다. 이 한자는 오른손을 본뜬 글자라고 한다. 마지막 획 삐침'이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끝나지 않은가 ? 그렇다면 왼쪽을 뜻하는 한자는 획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간다는 소리냐 ? 라고 소리칠지도 모른다. 맞다. [ 㔫 : 왼쪽 좌 ] 와 [ 左 : 왼 좌 ] 를 보면 匕와 工를 제외한 획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획, 그어져 있다. 왼손의 상형'이다. 여기서 똑똑한 사람이라면 [ 右 : 오른쪽 우 ] 는 왜 획이 왼쪽으로 삐쳤는가, 라고 따질 것이다. 사실 이 글자는 口를 제외한 획이 왼손의 상형이 아니라 又의 변형'이라고 한다. [ 友 : 벗 우 ] 는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 글자는 오른손(又)과 왼손'이 나열된 구조'이다. 친구란 사이좋게 손을 잡는 사이가 아니던가. ( 어떤 분이 한자 원리 쉽게 터득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는데 이런 식으로 공부하니 머리에 쏙쏙 박힌다. )
夭
" 기형도 시인은 29살의 나이에 요절했다 " 라고 했을 때, " 요 " 가 바로 [ 夭 : 일찍 죽다, 어리다, 아름답다 ] 다. 문득 에곤 쉴레의 < 소녀와 죽음 > 이란 그림이 떠오른다. 찾아보니 상형문자'다. 모양을 본뜬 글자라는 말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사람이 머리를 가누지 못하고 갸우뚱한 모습이다. 포인트는 바로 여기에 있다. 머리를 자기 힘으로 세우지 못하는 상태는 곧 아기'이거나 죽은 사람'이다. 여기에서 아이 + 죽음'이 겹쳐지니 일찍 죽다 라는 뜻이 파생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