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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칼의 날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93
프레데릭 포사이드 지음, 석인해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총 맞은 것'처럼......
내가 가지고 있는 책 가운데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책은 하서 출판사에서 < 세계 추리 문학 전집 > 으로 나온 " 재코올의 날 " 이다. 발행일이 1974년이다. 당시 정가가 1700원인데, 나는 이 책을 2500원 주고 샀다. 물론 세로쓰기'다. 하지만 구닥다리'라고 해서 모양새나 만듦새가 볼품없을 거란 생각은 착각에 가깝다. 튼튼한 사철방식으로 만들어진 양장본은 클래식한 맛이 있다. 더군다나 황변 현상으로 인해 누렇게 변색된 종이가 바스라질까 봐서 조심스럽게 넘기다 보면 < 장미의 이름 > 에 나오는 눈먼 호르헤 수사'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착각이 드는 이유는 종이 재질이 꽤나 거칠어서 점자로 된 책을 읽는 기분이 나기 때문이다. 손끝에서 나무의 섬유질이 느껴질 정도'이다. 이 느낌이 좋다 ! 오래된 책이 가을 벼처럼 누렇게 변색이 되는 이유는 산성지'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반면 요즘 사용되는 종이는 중성지'이다.
다들 아시겠지만 중성지로 만들어진 요즘 책'은 기생오라비처럼 창백해서 광원이 직사광일 경우 눈부셔서 잘 보이지 않는다. 닝기미, 어찌나 미끄러운지 종이를 넘기다가 손가락이 미끄러질 판이다. 이미지 컷이 삽입된 사진이나 미술 관련 책이 아니라면 중성지'보다는 산성지'가 낫다. 종이 위에 손끝을 올릴 때 느껴지는 담백하면서도 건조한 촉감은 애교는 없으나 속정이 깊은 애인 같다. 더군다나 책장을 넘길 때 중성지처럼 붙지 않고 쉽게 낱낱이 떨어져서 침을 묻히거나 종이를 구겨서 넘길 필요가 없다. 또 하나의 장점은 종이 표면이 고양이 혓바닥처럼 까끌까끌해서 색연필로 밑줄을 긋고 나면 깊이 스며들어 색이 진하다. 중성지에 그어진 밑줄이 수채화 물감으로 그은 획 같다면, 산성지에 그어진 밑줄은 유화 물감으로 그은 획 같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산성지의 수명이 500년이라는 점이다. 이 책이 1974년에 발행되었으니 적어도 2400년까지는 그 모양새를 유지한다고 보면 된다. 이래저래 중성지보다는 산성지'가 책을 만드는 데 더 적합한 종이가 아닐까 싶다. 시작부터 입바람을 불어제쳐서 " 들어가기 말풍선 " 을 크게 한 감이 있다. 내 허파'가 큰 탓이다.
새마을 운동이 한참이던 1970년대에는 외래어 표기법이 " 쟈칼 " 이 아닌 " 재코올 " 인 모양이다. 20세기 표기법'은 묘하게 중절모와 클래식한 양복으로 멋을 낸 모던보이적 감수성을 전달한다. 개인적 취향을 고백하자면 이탈리아'보다는 이딸리아'라고 표기할 때 더 그 시대적 감수성이 묻어난다. 그래서 조용필만 간절히 원했던 21세기의 지랄같은 편애와 표기법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창비의 표기법을 지지한다. ( 내가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21세기가 간절히 나를 원했기 때문이다 / 킬리만자로의 표범 가사 ) " 21세기여 ! 시바, 조용필만 좋아하지 말고 나도 좀 좋아해 달라 !!! " 재코올 씨'는 킬러'다. 단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으니 프로패셔널 킬러'다. 중국 거상 왕서방도, 이탈리아 마리아치 안토니오 반들반들도, 한국 무도인 마루치, 아루치 그리고 똘이 장군의 암살도 모두 재코올 씨 솜씨'다.
조용필이 < 킬리만자로의 표범 > 에서 주장했듯이 고독한 사냥꾼은 혼자서 일을 처리해야 하는 직업이다. 눈 덮인 산 정상에서 얼어 죽거나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킬러는 표범처럼 혼자'다. 오다 가다 다 만나면 텔레토비'이듯이 떼거지로 몰려다니며 먹잇감을 노리는 놈은 하이에나'다.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고 하지 않았던가 ? 바닥에 나뒹구는 머리가 쌓일수록 재코올 씨'에 대한 명성은 명성을 넘어 전설이 되었다. 그에게 불가능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 위기가 닥친다. 불란서 대통령 샤를 드골'을 암살하라는 제의였다. 그는 한동안 망설인다. 다들 아시겠지만 대통령 암살은 바람난 남편을 암살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 ! 그렇다고 이 제안을 거부하면 재코올 씨가 그동안 쌓은 전설적 스펙'에 오점을 남기게 되는 것 ! 그는 곰곰 생각하다가 이 제안을 수락한다. 돈에 욕심이 났기보다는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는 이 위험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준비한다. BBC 기자로서 로이터 해외 특파원을 지냈던 프레더릭 포사이스'는 그 특유의 기자질을 발휘해서 재코올 씨가 대통령 암살을 준비하는 과정을 르포 형식으로 자세하게 다룬다. 이 소설은 재코올 씨가 작업을 하기 전에 치뤄야 할 온갖 준비(잔무)를 집요하게 다룬다. 기자 정신이 발휘된 대목이다. 일반적인 스릴러 소설은 전설적인 킬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꾀죄죄한 잔무'를 생략해 버리는데 프레더릭 포사이스는 오히려 꾀죄죄한 잔무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내가 무릎을 탁 하며 아, 한 이유는 바로 이 지점이다. 독자는 재코올 씨의 꾀죄죄한 잔무를 통해서 그도 먹기 살기 위해서는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는, 잡다한 잔무에 시달리는, 나와 비슷한 샐러리맨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어느새 시도 때도 없이 시가나 피워대는 드골의 안위보다는 재코올 씨의 성실함에 빠져든다.
읽다 보면 재코올 씨에게 하트 빵빵'을 날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무모한 도전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 물론 그는 실패한다. 이미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드골이 암살당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성실한 재코올 씨가 실패할 것이란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독자가 알고 싶은 것은 이 실패가 얼마나 성공에 근접했는가 이다. 재코올은 성공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간발의 차이로 실패한다. 드골이 그 무수한 무공훈장을 가슴에 달았다면, 성실한 재코올 씨'는 르베르 경감이 쏜 MAT 49형 자동 카아빈 총에서 발사한 9밀리 탄이 재코올의 가슴에 훈장처럼 박혔다. 아,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나는 어느새 그가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던 것이다. 이 소설은 대통령 암살이라는 흥미진진한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주제는 불가능한 것에 대한 두려움 없는 도전'이다. 범죄 소설이라는 장르를 선택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스포츠 서사이며 이루어질 수 없는, 아.... 르베르 경감과의 사랑'이다.
그는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정상에서 고독하게 죽는 것을 선택했다. 오고 가다 다 만나게 되는, 텔레토비 꿈동산에서의 지루한 일상'보다는 간절히 원했으나 늘 어긋났다가 마주치게 되는 킬리만자로 산 정상에서의 운명적 만남을 원한 것이다. 오우삼 감독이 만든 < 첩혈쌍웅 > 은 피 튀기는 대결을 다루고 있지만 " 남성적 혈맹이라는 우정을 가장한 동성애적 관계 " 를 은연 중에 전파하듯이, 재코올 씨와 르베르 경감 또한 동성애적 코드가 이 작품에 스며든다. 그것은 반드시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에 기댄다. 그들은 꼭 만나야 한다. < 재코올의 날 > 은 그들이 서로 만난다는 전제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서사 진행 방식이다. 예상대로 대통령을 암살해야 하는 킬러 재코올과 대통령을 지켜야 하는 경감 르베르는 만난다. 편지 왕래'로만 알고 지내다가 드디어 만나게 되는, 그런 만남처럼 말이다. 하지만 잘못된 만남만큼 애끓는 통증'은 없는 법이다. 그들 앞에는 짧은 만남 끝에 긴 이별이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