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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고든을 사랑한 소녀 ㅣ 밀리언셀러 클럽 50
스티븐 킹 지음, 한기찬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0월
평점 :
공 하나의 낙차가
홈런을 헛스윙으로 잡는다.
삼천포로 빠지지 말고 바로 직언직설'로 가자. 내가 서평가의 입장이라면 이 작품에 대해 별 1개를 주겠다. 반면 문학평론가'라면 이 작품에 대해 별 3개'를 주겠다. 그리고 문학을 꿈꾸는 학생을 가르치는 문학창작과 교수라면 별 5개'라는 값을 정했을 것이다. 3명으로부터 총 별 9개의 점수'를 얻었으니 평균값을 내면 별 3개'다. 개인적인 판단 기준에 의하면 < 비평 > 은 " 건물 설계도 " 에 해당되고, < 서평 > 은 그 설계도에 의해 만들어진 " 건물 " 에 해당된다. 무슨 말인가 하면 비평은 텍스트(설계도)를 중심으로 評을 하는 것이고, 서평은 만들어진 책(건물)을 중심으로 評한다. 어쩌면 비평과 서평은 전혀 다른 영역인지도 모르겠다. 직접 설계를 의뢰해서 집을 만들지 않는 이상, 대부분은 만들어진 집을 산다. 수압이 좋은가 확인하기 위해 수도꼭지를 틀어 보기도 하고, 변기물은 잘 내려가나 물을 내려 보기도 한다.
꼼꼼하게 챙긴다. 책을 사는 독자 입장도 마찬가지'다. 책 표지 디자인은 좋은가, 레이아웃에 신경을 썼는가, 종이 재질은 무엇인가, 오타는 없는가, 번역은 깔끔한가....... 표지 디자인이나 레이아웃은 그렇다 치고, 오타나 번역이 엉망인 경우는 작가가 만들어준 설계도대로 집을 만들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설계도에는 창문이 오른쪽에 있는데 실제로는 왼쪽에 창문이 설치된 경우다. 화, 난다. 이것은 깐깐한 소비자의 존나 꾀죄죄한 진상'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왜냐하면 출판사가 작가가 건내준 설계도대로 만들지 않고 엉터리로 책을 만들었다는 것은 독자뿐만 아니라 저자에 대한 실례'이기 때문이다. < 톰 고든을 사랑한 소녀 > 는 오역투성이'다. " ... 고든이 투구 자세를 취합니다. 와인드업했습니다. 던졌습니다. 삼진 아웃. 마르티네스가 잡았습니다. 멋진 슬라이더였습니다! 안쪽 구석으로 들어오는 공이었는데 버니 윌리엄스는 손도 대지 못했군요 ! 오, 이런 ! 2회가 끝나고 반 이닝이 진행되었는데 여전히 양키스가 2점, 보스턴 레드삭스는 득점이 없네요. " ( p. 86 )
이 문장 읽고 나서 한참 생각했다. 9회 때나 등장하는 고든 투수가 마운드에 나온 것으로 보아 9회 말'이다. 와인드업... 고든은 슬라이더를 던져서 버니 윌리엄스를 삼진 아웃으로 잡는 설정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페드로 마르티네스 투수가 삼진을 잡았다고 번역을 해놓았다. 어리둥절할 즈음에 결정타를 날린다. 마무리 투수 고든이 나온 것으로 보아 9회인 줄 알았는데 2회가 끝나고 반 이닝이 진행 중이란다. 무슨 말인가 ? 팀 고든이 마무리에서 선발로 기용되었다는 뜻일까 ? 그런 소식은 내 평생 들어본 적이 없다. 명백한 실수다. " 싱글 안타를 뽑아내고... ( p. 88 ) " 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공기 반 소리 반도 아니고, 영어 반 한글 반을 섞어서 " 싱글 안타 " 는 무슨 조합일까 ? 차라리 싱글 히트'라고 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단타나 1루타'라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 야구 스포츠 해설 20년 동안 청취했지만 싱글 안타라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
데릭 지터'를 굳이 데렉 제터'라고 표기한 부분은 그냥 웃고 넘어가자. " 주자는 1루와 3루에 있었고, 아웃된 타자는 하나밖에 없었다. 펜웨이의 관중들은 회망을 품고 환성을... ( p. 91 ) " 양키즈가 원 아웃에 주자를 1,3루에 보내 득점 찬스를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레드삭스 홈펜들은 이 상황에 대하 희망을 품고 환성을 지른단다. 태어나서 이런 악질적인 팬'은 본 적이 없다. 아마도 저 문장은 양키즈 선수에 대한 환성이 아니라 마무리 투수 톰 고든에 대한 격려와 지지일 것이다. 하지만 문장 자체만 보면 마치 레드삭스 팬들이 양키즈 선수를 응원하는 것만 같다. 압권은 " 양키스의 어린 왼손잡이 타자 앤디 페티트... ( p. 152 ) " 이다. 투수는 타자로 바뀐다. 이런 문장은 어떤가 ? " 고든은 3안타 3득점을 내주고 말았다. 레드삭스 팀은 2 대 1로 패했다. " 고든은 3실점을 했는데 2 대 1로 패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 < 득점 > 은 상대팀 선수가 1루에 나가서 동료 선수의 안타로 직접 홈을 밟을 때 얻는 점수를 득점이라 하고, 동료를 불러들인 타자가 얻은 점수는 타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고든은 타자가 아니라 투수이므로 3안타 3실점을 허용했다고 해야 정확한 문장이 된다. 번역가가 모든 분야에 대해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책에서 인용되는 야구 관련 페이지는 기껏해야 2,3 페이지 분량이 전부다. 조금만 발품을 팔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들이다. 더군다나 이 소설은 스티븐 킹이 레드삭스를 위한 헌정 소설에 가까우니 관심을 가졌어야 했다. 서평가적 입장에서 보면 이 책은 별 하나도 아깝다. 반면 비평가의 입장에서 책 만듦새는 신경 쓰지 않고 설계도( 텍스트 ) 만 놓고 평가하자면 스티븐 킹 작품으로는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작품이다. 하지만 문학 지망생을 가르치는 문학창작과 교수 입장에서 보자면 이 소설은 정말 기막힌 소설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기가 막힌 소설이 아니라 기막힌 소설이다. 글을 다루는 솜씨가 일품이기 때문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9살 소녀가 길을 잃고 숲속을 헤맨다는 내용이 전부다. 만약에 당신이 스티븐 킹처럼 9살 소녀가 숲속에서 헤매는 이야기를 300페이지에 가깝게 써야 한다면 ? 보이는 것이라고는 풀과 고사리와 냇물이 전부인,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숲속에서 이야기를 전개시켜야 한다면 과연 잘 쓸 수 있을까 ? 아마, 황석영이라고 해도 쩔쩔맬 것이다. 소설 작법으로써 이 소설이 놀라운 점은 회상 장면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숲속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9살 소녀를 가지고 이야기를 끌고 간다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작가들은 숲속 장면과 아이를 찾기 위한 수사 진행이 교차 편집으로 이루어질 터인데, 이 작품은 거의 숲속이 주를 이룬다. 300페이지 분량이 숲에서만 이루어진다.
더군다나 주인공은 9살 소녀다. 9살 소녀가 가지고 있는 교양 수준에 맞춰 서사를 진행해야 하는데 이게 쉬운 게 아니다. 몽테뉴나 로빈슨 크루소라면 막힌다 싶으면 잡다한 사유를 꺼내서 박물지를 선보이며 페이지 수를 차곡차곡 쌓을 수 있으나 9살 소녀에게는 그런 꼼수가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스티븐 킹은 해낸다. 그는 9살 소녀가 숲속에서 일주일 간 벌이는 원맨쇼'를 꽤 흥미롭게 묘사하다. 웬만한 스토리텔러가 아니고서는 힘든 작업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문학창작과 교수'라고 한다면 이 작품에 별 5개를 주겠다. 독자가 저자의 텍스트를 오독하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책을 만드는 출판사가 저자의 설계도를 엉터리로 해석해서 집을 지으면 ? 별것 아닌 손거스러미 때문에 일하는 데 집중을 하지 못한 경험이 있듯이, 사소하지만 뼈아픈 실수가 이 책의 완성도'를 떨어뜨렸다.
좋은 투수가 되기 위해서는 빠른 공보다 제구력이 필수다. 공 한 개 정도의 사소한 낙차가 홈런을 헛 스윙을 유도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