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닝구와 빤스.
머리를 잘랐다. 2년 만이다. 내가 머리를 기른 이유는 롹 페스티발에 가서 헤드뱅잉'을 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 가위 공포증 " 때문에 그렇다. 정확히 말하면 " 가위 공포증 " 이 아니라 " 가위 소리 공포증 " 이다. 생각보다 심각해서 현기증을 동반한 구토 증세 때문에 머리를 깎다 말고 쇼파에 30분 정도 누운 적도 있다. 프로이트였다면 나를 거세 불안 증세'라며 학회에다 보고서를 제출했을 것이다. 사실 내가 왜 가위 소리'를 두려워하는지는 나 자신도 잘 모른다. 굳이 추측을 하자면 어릴 때 어머니가 내 머리를 자르다가 머리카락 대신 귀'를 살짝 잘랐던 경험이 있는데 이 어릴 적 경험이 원인'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하지만 이러한 추측도 그닥 속시원한 정답은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은 이별 후에 상실, 슬픔, 그리움 따위가 찾아오는데 나에게는 이별 후에 가위와 코카콜라'가 찾아왔다.
청량음료라면 입에도 대지 않던 내가 이별 후에는 코카콜라를 하루에 10캔씩 마시고는 했다. 가위는 그렇다고 쳐도 < 이별과 코카콜라 > 는 도무지 설명할 방도가 없다. 지금 이 시간에도 나는 코카콜라가 미치도록 마시고 싶어서 구멍가게가 문을 열 시간만 기다리고 있다. 이제는 코카콜라에 대해서 A4 용지 4장 분량으로 쓸 자신이 있다. 사실 이 글도 코카콜라에 대해서 주저리주저리 썼다고 모두 지웠다. 왕가위 영화에 대한 페이퍼를 작성하는 마당에 가위나 코카콜라 이야기'로 분량을 채운다는 게 말이나 되나. 하지만 꼭 안 될 것도 없다. < 아비정전 > 하니 왕가위 감독이 생각나고, 왕가위 하니 가위가 생각난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맘보와 코카콜라가 아니었던가 !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는 충격적이었다. 흰 " 난닝구 " 와 " 빤스 " 만으로도 완벽한 밀라노 패션을 선보이는 저 배우는 도대체 무엇이냐.
장국영이 난닝구와 빤스만 입고 맘보를 출 때, 그 장면이 너무 멋있어서 학교 갈 때 그렇게 입고 가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나도 난닝구와 빤스만 입고 거울 앞에서 맘보를 춘 적이 있다. 깜짝 놀랐다 ! 거울에 오징어 한 마리가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아무나 소화할 수 없는 패션이다. 장국영이니깐 가능한 것이다. 생각날 때마다 보았다. < 중경삼림 > 과 < 타락천사 > 는 내 기억 속에 뒤죽박죽 섞여서 하나의 영화로 자리하고 있다. 세기 말 감수성'을 이토록 감각적으로 뽑은 영화가 또 있을까 ? 세기 말과 21세기'는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았다. 조용필은 21세기가 간절히 자신을 원한다며 도도하게 말을 했지만 세기 말은 생각보다 시시했다. 왕가위 감독은 그 시시한 일상을 톡 쏘는 코카콜라처럼 감각적으로 잡아냈다. 어쩌다 한 작품 정도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으나 연이어 좋은 영화를 내놓는다는 것은 운이라기보다는 실력에 가까웠다.
< 동사서독 > 과 < 화양연화 > 는 왕가위의 화룡점정이었다. 하지만 좋은 감독이라고 해서 계속 성공작만 내놓지는 못한다. < 2046 > 은 끔찍한 실패작이었다. 거장이 되기 위해서는 후 샤오시엔'처럼 < 비젼 > 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왕가위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들을 훔쳐저 짜집기하다 보니 어디서 본 듯한 영화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가 최근에 < 동사서독 > 을 재편집해서 선보인 < 리마스터링 : 동사서독 > 은 끔찍한 결과였다. 디지털 작업을 통해 색을 화려하게 입혔는데 그것은 마치 알타이 동굴 벽화 그림이 선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아크릴 물감으로 덧대는 꼴처럼 사나웠다. 그리고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나레이션과 자막이 추가되었는데 이 또한 꼴불견'이었다. 어쩌면 왕가위는 재능이 뛰어난 감독이라기보다는 운이 좋아서 몇 편의 걸작을 연속적으로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만우절에 장국영은 거짓말처럼 죽었다. 내가 그 소식을 접했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이제 왕가위의 영광도 여기서 끝이겠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뮤즈이자 페르소나인 배우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사실 왕가위 영화의 페르소나는 장국영이 아니라 양조위'였다. 장국영이 왕가위 영화에 출연한 경우는 < 아비정전 > 과 < 동사서독 > 이 유일했다. ( 생각해 보니 해피 투게더'에서도 주연을 맡았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있어서 왕가위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장국영'이었다. 난닝구와 빤스만으로도 밀라노 패션을 선보였던 매력적인 배우. 오늘 갑자기 그가 생각났다. 그를 생각하며 콜라 한 잔 하련다. 톡 쏘는 탄산 알맹이가 피라냐처럼 내 혓바닥을 물어뜯어도 좋다. 이왕이면 유리병 속에 담긴 콜라'를 마시고 싶다. 난닝구와 빤스만 입어도 멋진 존재, 그런 존재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
종종 직업이 미용사인 여자를 애인으로 두는 상상을 한다.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나는 난닝구와 빤스도 벗은 채 가부좌를 틀고 욕실 바닥에 앉고, 애인 또한 브라자와 빤스도 벗은 채 내 머리를 다듬는 것이다. 난닝구와 브라자와 빤스와 빤스가 바닥에서 뒹굴고 내 머리카락은 낙엽처럼 떨어지리라. 그래, 직업이 미용사인 여자를 만나야겠다. 그것만이 내가 살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