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와 벌레
우울증 약에는 강력한 수면제'가 들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에서 깨는 이유는 타는 듯한 갈증 때문이다. 주변 사람 가운데 물을 자주 마시는 사람은 우울증 약을 복용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갈증은 종종 통증을 수반한다. 눈을 떴다. 바퀴벌레 한 마리'가 벽을 타고 기어다녔다. 나는 순간 무엇을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a. 침대에서 일어나 바퀴벌레를 죽이고 물을 마신다. b. 물을 마시고 나서 바퀴벌레를 죽인다. c. 다 포기하고 죽은 듯이 잠을 잔다. 바퀴를 죽이는 일'에도 몇 가지 선택을 해야 한다. d. 화장지를 이용해서 죽인다. e. 걸레를 던져 떨어뜨린 후 죽인다. f. 책으로 내려친다. g. 살충제를 뿌린다. 이런 식으로 우선 가상의 수를 종합하니 총 98개나 되었다. 아, 자본주의'란 선택의 폭이 너무나 많아서 선택에 대한 고민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이다가 죽는 체제'이다. 자본주의에서 선택은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나는 고민하다가 눈을 감고 잤다.
다시 눈을 떴다. 몇 분이 흘렀을까 ? 아니면 몇 시간이 흘렀을까 ? 몸은 석고처럼 굳어 있었다. 눈동자만 굴려서 바퀴벌레가 기어다니던 벽을 쳐다보았다. 바퀴벌레는 보이지 않았다. 선택의 폭은 좁아졌다. a. 물을 마실 것인가. b. 계속 잠을 잘 것인가. 바퀴가 사라졌다고 해서 이렇게 많은 경우의 수가 줄어든 것이다. 숨을 쉬었다. 숨을 쉴 때마다 입에서 비릿한 약 냄새'가 진동을 했다. 미원을 잔뜩 입에 넣었을 때의 불쾌감이다. 문득 이마를 긁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택이 하나 더 늘었다. c. 제일 먼저 이마를 긁을 것인가. 나는 c를 선택했다. 툭 ! 이마를 긁자 검은 물체가 떨어졌다. 깜짝 놀라서 침대 바닥을 보니 커다란 바퀴벌레였다. 그 사이, 바퀴벌레는 바닥으로 떨어져 구석진 곳에 몸을 숨겼다. 화, 났다 !!!! " 나 죽고 너 살자 ! " 라고 외쳤다. 아차, 너 죽고 나 살자지 ? 피식. 인간사랑에서 출간된 지첵의 < 향락의 전이 > 를 뽑아 바퀴벌레를 내리쳤다.
바퀴벌레는 몸 밖으로 내장이 흘러나왔다. 머리와 발은 바삐 움직였으나 바닥에 놀린 몸은 움직이지 못했다. 끈적거리는 내장은 풀과 같은 작용을 했다. 나는 거실로 가 물을 마시고, 걸레에 유한락스를 묻혀 책 하드커버를 닦았다. 방으로 돌아왔을 때 바퀴벌레는 보이지 않았다. 탈장한 몸으로 살기 위해 어디론가 숨은 모양이었다. 은신처에 숨은 바퀴'는 신호를 보낼 것이다. 인간은 들을 수 없는 울음을 울 것이다. 바퀴들은 그 소리를 듣고 모인다. 몸에 붙어 있던 알집은 떨어져나가 부화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몸은 동료들을 위해 기꺼이 뜯길 것이다.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으리라. 알은 부화하리라. 그리고는 곰곰생각하는발'에게 복수를 할 것이다. 더 많은 바퀴들은 내 침대를 공격할 것이다. 수면제로 시체가 되어버린 내 몸 위에 똥을 쌀 것이 틀림없다. 어택, 어택 ! 일보전진 !!!! 한밤중에 깜짝 놀란 탓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형설시공사 판 < 깻잎 오소리 입말 사전 > 에서 " 바퀴 " 를 찾아보았다. 바퀴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바퀴 : [ 명사 ] < 동물 > 바큇과의 곤충. 바퀴를 발견하게 되면 인간은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의 수'가 최소 10배 이상 증가한다. [ 유의어 : 상품. 물건 ] 자본주의에서 상품은 인간에게 끊임없는 선택을 강요하도록 만든다. 나이키 덩크 로우를 살 것인가, 덩크 하이를 살 것인가. 검은 나이키 로고를 살 것인가, 빨간 나이키 로고를 살 것인가. 정가를 주고 나이키 매장에서 살 것인가, 인터넷 쇼핑몰에서 할인된 가격으로 살 것인가. 등등. 자본주의 상품은 본질적으로 인간에게 다양한 선택을 강요한다. 자본주의 체제 속 인간은 선택을 하다가 스트레스를 받아 죽는다. 바퀴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죽일 것인가 ? 그러므로 자본주의 상품과 바퀴는 동일어'다.
- 깻잎 오소리 입말 사전, 소율. 형설시공사. 1999
< 깻잎 오소리 입말 사전 > 은 아무리 봐도 이상한 사전'이다. " 서슴없이 " 란 부사'를 찾아보니 단어에 대한 뜻은 없고 대신 그림 하나가 있었다. 사슴이었다. 그리고는 붉은 X자가 그 그림 위에 겹쳐진 상태로 있었다. 너무 황당해서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국어사전으로 검색하니 " 말이나 행동에 망설임이나 거침이 없이 " 란 뜻이다. 그런가 하면 " 일리있다 " 라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 일리 있다 " 라고 띄어쓰기'를 해야 하는지 아리송해서 오소리입말사전'을 찾아보니 " 어떤 면에서 그런대로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이치 " 라는 뜻 대신에 " 1.2.2.5 " 라고 표시되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무릎을 아, 쳤다. 일(1) 리 (2) 있 (2) 다 (5) 아무리 생각해도 < 깻잎 오소리 입말 사전 > 은 이상한 사전이다. 이왕 펼쳤으니 사전을 이리저리 살폈다.
사전에 <딱정> 이라는 이름의 곤충은 없다. < 딱정벌레 > 라는 이름이 있을 뿐이다. 같은 이유로 < 사슴 > 과 < 사슴벌레> 는 전혀 다르다. 사슴은 사슴과’에 속하는 동물이고, 사슴벌레’는 사슴벌레과’에 속하는 곤충이다. 그렇다면< 바퀴벌레 > 도 ?! 정식 명칭’은 바퀴’다. 바퀴벌레’가 아니다. 그러므로 바퀴는 바퀴과’에 속하는 곤충이지, 바퀴벌레과’에 속하는 곤충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구상에 바퀴벌레과 곤충은 한 마리’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철썩같이 바퀴’를 바퀴벌레’라고 알고 있다. 그런식으로 유유상종하자면 사슴과 사슴벌레도 모두 하나다 ! 우리가 바퀴’를 바퀴벌레’라고 부르는 이유 중 하나는 바퀴’라는 곤충에 대한혐오와 경멸’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둘의 관계는 곰곰생각하는발 박사의 어투를 빌리자면 < 질문 : 하우아 유 >와 < 답변 : 아임 파인탱큐. 앤드 유’ > 의 관계와 같다.
바퀴와 벌레는 장소팔과 고춘자, 서수남과 하청일이고 유재석과 박명수, 팝콘과 콜라, 맥주와 치킨 사이’다. 그런데 바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백해무익’한 해충일까? 인간이 바퀴’를 징그러운 해충이라고 규정한 후 < 박멸 > 한다면, 어쩌면 지구는 멸망할지’도 모른다. 곤충은 지구 생태계 종’의 70%를 차지한다. 자연생태계’에서 곤충은 좋은 식량’이다. 많은 동물들이 곤충’으로 허기진 배를 채운다. 바퀴’는 새나 쥐, 고양이와 개도 즐겨 먹는 일용할 양식’이다. 그뿐이 아니다. 개미도 바퀴’를 즐겨 먹으며, 심지어는 바퀴’도 바퀴’를 즐겨 먹는다. 바퀴’는 닭’보다 단백질 함유량이 3배나 많다 ! 이 녀석’은 말 그대로 단백질 덩어리다. 양질의 단백질 공급원인 셈이다. 영양학적 가치’를 인정한다면 바퀴’는 아웃벡 같은 패밀리레스토랑에 선보일 만한 자원이다.
조인성이 나와서 “내가 다 해줄게. 바퀴 위에 구운 마늘을 이렇게 으깨서...한 입 ! “ 만약에 인간이 바퀴’를 멸종시킨다면 그 영향은 나비효과’가 되어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 바퀴의 상위 포식자는 그만큼 먹이’를 먹지 못하게 되어 개체수가 줄어들고, 바퀴의 상위 포식자’가 줄어들면 바퀴의 상위 포식자를 잡아먹는 상위 포식자’ 또한 굶어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바퀴의 박멸’은 생태계 재앙’을 야기시킬 것이 분명하다. 이 세상에 잡초’라는 이름을 가진 풀은 존재하지 않듯이, 해충이란 곤충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깐 < 해충 박멸’ > 이라는 문구’는 인간 중심적 사고가 낳은 존나 촌스러운 의기양양’이다. 자연생태계 입장에서 보자면 바퀴’는 매우 소중한 식량 자원 중 하나이다. 오히려 인간’이라는 동물이 해충에 가깝다. 자연을 지저분하게 만드는 것’은 바퀴가 아니라 인간이다.
오소리 깻잎 입말 사전'에는 " 곰곰생각하는발 " 이란 낱말도 기재되어 었다. 뜻은 이렇다. " 아는 것은 많으나 깊게 알지는 못하는 놈. 이 자에게 진지하게 묻지는 말 것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