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꼴찌를 위한 변명 " 시리즈 2탄
힘줄과 고독
당신이 결혼 따위 생각하지 않는 여자였으면 좋겠어 우리 그냥 연애만 하자 사랑이 현실에 갇히는 건 끔찍해 결혼은 천민들의 보험일 뿐이야 진부해 그냥 연애만 하자 서로의 눈을 바라보자구 구속하는 일 따위 구역질난다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해야지 밤에 내게 전화하는 건 구속받는 기분이어서 싫더라 주말에 약속 잡는 사람들 정말 이해할 수 없어 정서적 난민 같아 주말엔 책을 읽고 음악을 들어야지 당신은 내게 뭔가 요구하지 않을 사람 같아서 참 마음에 들어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사랑은 폭력이야 천박해 그러니 우리 쿨하게 연애하자구 참, 내가 전화 받기 곤란할 만큼 바쁜 사람이란 거 알지 ? 전화는 항상 내가 먼저 할게 사랑해 이런 느낌 처음인 것 같다 우리 좀더 일찍 만날 걸 그랬지 ?
- 유부남 전문, 시집 상처적 체질
마초란 근육 있는 남자'다. 시인 류근'은 마초다. 잘생긴 얼굴에 상대를 홀릴 만한 말'을 가졌으니,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눈물바람을 낸 여자 많았을 것이다. 고래 힘줄 같은 정력으로 잘록한 허리를 거칠게 휘어감으면 여성들은, 아... 탄산음료 같은 황홀한 탄성이 쏟아지리라. 시에 등장한 사내는 사랑이 현실에 갇히는 건 " 끔찍해 " 하고, 결혼 제도는 " 진부해 " 하며, 서로의 사생활은 " 존중해 " 야 된다고 주장한다. 여기까지는 쿨하고 리버럴해서 좋다. 하지만 주말에 약속을 잡는 사람들 정말 " 이해 " 할 수 없다고 할 때부터 뭔가 좀 이상하게 흘러간다.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사랑은 폭력이어서 " 천박해 " 라고 하더니 전화 받기 곤란할 만큼 바쁜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시적 화자'는 이내 전화는 자신이 항상 먼저 하겠다며 " 사랑해 " 라고 매조지한다. 이쯤에서 우리는 곧 이 욕망이 매우 뻔뻔하다는 사실에 웃고 만다. 결혼 제도가 진부다고 말하는 남자는 유부남이다. 한때 마초였던 꼰대의 희망사항이었던 것이다.
이두박근, 삼두박근 같은 힘줄은 주로 연애'를 할 때나 사용될 뿐이지 정의의 문제'와는 무관한 근육'이다. 행동하는 양심'은 두근두근'에서 나온다. 염통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염통이 쫄깃쫄깃해야지, 변두리 회 센터 수족관 속 개불처럼 흐물흐물하거나 이명박 각하처럼 꾀죄죄하면 생산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행동하는 양심이다. 이처럼 힘줄'을 너무 단련하면 이두박근'은커녕 이명박근(혜)이 되기 십상이다. 이상적인 < ① 마초' > 는 고독해야 한다. 힘줄과 고독이 6 : 4 정도로 배합되면 좋다. 여기에 염통이 가지고 있는 양심'을 적절하게 사용하면 그보다 섹시할 수 없다. 그런가 하면 < ② 속물' > 은 힘줄은 있는데 고독은 없는 놈이다. 여자와 술을 마실 때마다 외롭다며 술잔을 한입에 터프하게 터는 놈은 진짜 마초가 아니다. 외로움'이란 피동적 결과이고 고독'은 자발적으로 선택'한 결과이다. 속물이란 외롭다는 핑계로 여성이 가지고 있는 모성 본능을 자극하려는 계략일 뿐이다. 이상적인 마초는 여자를 지키려고 하고 찌질한 속물은 여자를 건드리려고만 한다.
그런데 이 속물'보다 한발 더 나아가는 부류가 있다. < ③ 꼰대'> 는 남근도 근육이라고, 괄약근도 힘이라고 믿는 무리'이다. 힘줄(力)을 칼(刀)처럼 휘두르는 인간이다. 반면 힘줄도 없고 연어처럼 펄떡이는 염통도 없는 무리는 잉여 인간이 된다. < ④ 잉여' >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결핍을 숨기거나 보상받기 위해서 허세와 뻥으로 망가진다. 나는 아무래도 힘줄도 없고 심장박동도 약한 무리에 속하는 부류인 듯싶다. 사실 내게도 남근과 괄약근'이라는 미약한 근육'이 있었으나 이제는 그나마도 쓸모가 없게 되었다. 부실한 괄약근은 치질'을 낳았다. 대장항문과 의사 선생'은 늘 다음과 같은 처방을 내리고는 했다. " 치질이란 게 그렇습니다. 허허, 너무 오래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지 마세요 ! 의자에 오래 앉아 있는 것도 치질을 악화시킵니다. 아참, 그리고 오래 서서 있으면 치질에는 정말 최악이란 사실도 알고 계시죠 ? "
앉으나 서나 치질 생각에 고통스러웠던 나는 속으로 쌍욕을 했다. " 씹새끼.... 바닥에 앉아도 안 된다, 의자에 앉아도 안 된다, 서서 있어도 안 된다 ?! 아예, 공중부양을 해라고 해라, 인간이 붕어 새끼냐, 시바 !! " 의사는 내 속도 모르고 열심히 전문 지식을 뽐냈다. " 치질와 요통은 직립을 하게 된 인간에게 생긴 병이지요. 더군다나 치질은 의자에 앉아서 오랫동안 생활을 해야 하는 현대인에게는 운명적인 병입니다. 치질로 인해 괄약근이 망가졌다고 해도 선생님에게는 우람한 남근이 있으니 너무 상심 마십시요. 뭐라고요 ?! 전립선 기능 저하라고요 ? (혼잣말로) 가지가지하는구나. 맙소사. 그래도 시도 때도 없이 케겔 운동을 하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당신 앞에 벌거벗은 여자가 앙탈을 부려도 남근에 힘 주지 마세요.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괄약근이지 남근이 아니니깐 말이죠. "
어찌 되었든 나는 괄약근마저 없는 인간이었다. 류근이 유근( 有筋 : 힘줄 근 ) 이라면, 나는 괄약근도 망가지고 거시기도 부실하니 무근( 無筋 : 힘줄 근 )이면서 동시에 무근( 無根 : 뿌리 근 )이었다. 시바, 뒷방 늙은이처럼 이게 무슨 지랄병인가. 의사 선생이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인간에게 꼬리'가 달렸다면 치질로 인한 질병은 사라지지 않았을까 ? 라는 생각을 잠시 하게 되었다. 꼬리 근육을 열심히 움직이면 당연히 괄약근 운동에 도움을 주어서 치핵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불행은 없었을 것이 아닌가. 마초와 꼰대'는 < 쪽 > 을 중요시한다. 양심은 팔아도 쪽 팔린 건 못 참는 부류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쪽 팔리면 하와이 간다. 그들에게 어울리는 사자성어는 < 어두육미 > 다. " 성님, 그래도 생선은 대가리가 맛있지라, 잉. " 힘을 숭배하는 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것이 바로 대가리 찬양‘이다.
미래 권력에게 줄 서기 위해서 안달이 난 사람들은 대가리'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다. 하지만 신체 가운데 가장 많은 구멍’이 쏠린 부분 또한 대가리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파리가 죽은 자의 내부에 제일 먼저 접촉하는 부분이 대가리다, 얼굴이다, 구멍이다. 파리는 눈, 코, 입, 귀’를 통해 내부로 잠입하여 금쪽같은 새끼를 낳는다. 그러므로 대가리는 부패의 위풍당당 개선문‘이다. 그래서 권력이란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것이 아닐까 ? 방향을 설정하는 것’은 물고기의 대가리이지만 추동하는 힘‘은 꼬리’에서 나온다. 꼬리를 흔들지 않으면 진전은 없다 ! 언행일치‘란 대가리로 방향을 설정하고 꼬리로는 물살을 힘껏 가르는 행동을 의미한다. 하지만 지식인 대부분은 머리로 방향을 설정하는 능력은 탁월하지만 꼬리를 치는 힘’은 부족하다. 막상 행동해야 될 시기‘가 오면 꼬리를 내린다.
만약에 인간에게 꼬리가 달렸다면 인류는 어떻게 진화되었을까 ? 얼굴은 거짓말을 하지만 꼬리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얼굴은 감정을 숨기기 위해서 고개를 외면하거나 웃는 시늉을 해도, 꼬리는 감정에 충실한 나머지 모든 감정이 들통난다. 무서우면 꼬리를 내리고,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흔들며, 화가 나거나 싸움을 하려고 하면 꼬리를 높이 쳐든다. 그러니깐 꼬리는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 다혈질 이드‘ > 이고, 얼굴은 참고 참고 또 참는 < 캔디형 초자아’ > 다. 동료 직원에게 성적 호감을 느낀 여직원이 속마음을 숨긴 채 “ 전, 당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요 ! ” 라며 내숭을 떤다고 치자. 하지만 꼬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여름에 부채질하는 노인의 부채처럼 꼬리’가 한들한들 흔들린다면 ?
혹은 상사가 실없이 던진 농담에 박장대소하는 박 대리의 꼬리‘가 물에 젖은 양말처럼 우울하게 축 늘어져 있다면 ? 전철 안에서 예쁜 여자를 보고 꼬리가 발딱 선다면 ? 꼬리는 감정을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골치 아픈 요물이지만 달리 생각하면 이 솔직한 기관은 꽤나 매력적이다. 인간에게 꼬리가 달린다면 < 내숭의 사회 > 는 사라질 것이다. 누가 적이고 누가 동지인지는 명약관화하니 인류는 보다 솔직한 사회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 알고 보니 당신은 나의 배경을 사랑한 것이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소 > 류’의 신파 멜로 드라마‘는 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꼬리를 보고 사랑을 찾는 사회. 왠지 모르게 꽤 근사하다는 생각을 한다. 언젠가 꼬리/꼴등’도 대우받는 사회가 올까 ?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