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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 - 개정판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며칠 전 : 책장에 꽂힌 공지영의 소설책 두 권을 뽑았다. <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 과 < 고등어' > 다. 사실 < 우행시 > 는 200페이지 정도 읽다가 던져버렸지만 책 내용'들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 책은 헌책방에서 헌책으로 장만했지만 책 상태는 지금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진열장에 꽂아 넣어도 새책으로 오해할 만큼 깨끗하다. 밑줄을 긋지 않은 것'을 보면 기억할 만한 문장이 전혀 없었나 보다.
그것은 이 책을 헌책방에 판 책 주인에게도 해당된다. 그는 흔적이 될 만한 밑줄, 접힌 모서리, 메모, 갈피 사이에 끼워진 낙엽이나 네잎 클로버 혹은 편지나 영화표 그리고 영수증따위'로 낡은 책'이라는 기표를 남기지 않았다. 감정적 전이 상태가 없었던 까닭이리라. 그러다가 책 맨 뒷 장'을 펼쳤다. 책 알림 정보'를 살펴보니 초판 167쇄'라는 기록이 인쇄되어 있었다. 167쇄 ? 167쇄?!!!! 아니, 이 책이 167 쇄'나 팔렸다는 말인가 ?
이번에는 < 고등어 > 를 꺼냈다. 매우 오래된 책'이다. 내가 공지영의 소설을 처음 접한 것은 <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 였다. 풀빛에서 출판되었었나 ?! 그때부터 나는 으르렁거리는 안티'가 되었다. " 지랄 같은 소설이군. 대한민국의 화염병 가운데 70%는 모두 소설 속 주인공이 던진 것처럼 말하네.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이 땅의 민주주의와 자유가 아니라 최루탄 속 사랑'이잖아 ? 러브스토리이면서 왜 투쟁을 이야기하지 ? " 나는 공지영이 이토록 유명한 소설가'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 예상을 깨고 신경숙과 함께 최고의 작가'가 됐다. 아니, 가장 많은 책을 파는 작가'가 됐다.
고등어'를 살펴본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사 놓고 읽지 않은 책'이 워낙 많기에 이 책'도 사 놓았을 뿐 읽지 않은 것이다. 중구난방으로 이 책 저 책 읽다 보니깐 산 책을 다시 산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종종 읽지도 않은 책을 읽었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고, 읽었으면서도 읽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내가 이 책을 읽었는가 읽지 않았는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흔적이다. 노란 색연필로 그은 밑줄, 연필이 눌린 자국, 메모, 모서리가 접힌 자국, 각종 영수중, 서표'를 통해 유무를 판단하고는 했다. 일단 책 맨 뒷 페이지'를 살펴보았다. 맙소사 ! 95년 초판 57쇄 ? 초판 1쇄'가 94년 6월인데 1년만에 60쇄에 도달한 것이다. 미치겠군 !
그런데 서른 페이지 정도 읽다가 노란 색연필'로 그어진 문장을 발견했다. 노란색 밑줄이 그어졌다는 사실은 내가 이 책을 읽었다는 증거다. 그런데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 아무리 재미없는 영화'라도 몇 분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잃어버렸던 장면들이 다 복기되는데 이 소설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읽다가 만 소설일까 ? 맨 뒷 부분을 살피는데 노란 밑줄이 다시 발견된다. 끝까지 읽었다는 명백한 증거다. 그런데 단 한 줄도 줄거리가 기억나지 않는다.
이런 경우가 가능할까 ? 이렇게 표백된 기억'이 가능할까 ? 불가능하다.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깐 말이다. 대충 내용을 살펴보니 80년대 운동권 세대'에 대한 스케치다. 이번에는 불륜을 건드렸나 보다. 피식 웃음이 났다. " 여전히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사랑'을 이야기하는구나. " 책 맨 뒷장을 살피니 다음과 같은 메모가 있다.
TO. 곰곰생각하는발
피로 맺은 우정, 죽음까지도 함께 하리라.
김은호 ( 011 - #### -#### )
FROM. ○○○
피로 맺은 우정이라......... 사인' 부분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휘갈겨쓴 상태라 이름을 알 수는 없었다. 누구일까 ? 내가 아는 사람이 분명할 터인데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이 책의 주인이었던 사람은 왜 느닷없이 김은호'라는 사람과 그 사람 연락처를 남긴 것일까 ? 나는 이 사람에 대해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여튼 날이 밝으면 김은호'라는 사람에게 전화를 할 것이다. 아직까지 011 - 로 시작하는 핸드폰 번호'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래도 전화해 볼련다.
" 김은호 씨 ? 011-739 -0*** 번 김은호 씨 ? 제가 공지영의 고등어라는 책을 가지고 있는데 맨 뒷 장에 선생님 이름과 전화번호'가 있더군요.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혹시 누구인가요 ? 아... 화내지는 마십시요. 제가 기억을 잃어버렸거든요. 그래서 그 기억을 찾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찾아뵙고 말씀 나누고 싶습니다. 필체와 사인을 보여드릴 테니 기억나시는 분이 계시면 말씀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어제까지의 : 에필로그
1. 김은호 씨'와 통화를 한 후 그를 찾아갔다.
2. 책 뒷 장에 쓰여진 필체를 김은호 씨'에게 보여줬다.
3. 김은호'는 사인을 자세히 보더니 " 박명욱 "이라는 자를 지목했다.
4. 나는 박영욱을 찾아갔다.
5. 그는 3일 전 의문의 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6. 그의 부인을 찾아갔다.
7. 부인의 이름은 김은혜'다.
8. 김은혜'는 남편이 공지영 팬 사인회에서 얻은 책이라고 말했다.
9. 나는 공지영을 찾아갔다.
10. 공지영을 만났다.
11. " 돌아가는 꼴 " 을 이야기하며 공지영 씨에게 사실 확인'을 부탁했다.
12. 공지영 씨'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는 말했다.
" 이 책을 어떻게 아시지요 ? 고등어'는 지금 제가 집필하고 있는 소설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 곰곰생각하는발 씨 ! 출판된 적이 없는 책이라구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책이란 말입니다. 도대체 당신 누구야 ? 아, 아아... 그러고 보니...... 나, 당신... 누군지 알 것 같아요. 그때 팬 사인회'에서 실수로 내 옷에 커피를 쏟았던...... "
갑자기 나는 정체성의 혼란을 느낀다. " 전... 저는.. 다만.... 그러니깐.... ..... 달콤쌉싸래한 씀바귀입니다. " 뒷걸음질친다. 돌부리에 걸린 것일까 ? 휘청, 넘어진다. 박영욱, 박영욱, 박영욱이라....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기는 하다. 내가 박영욱이었던가 ?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주머니 속 손수건을 꺼내다가 구겨진 종이뭉치를 꺼낸다. 펼쳐보니 정신과 처방전이다. 박영욱이란 이름이 박혀 있다. 어디선가 박수소리가 들린다. " 브라보 ! 가는 길에 영광 있으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