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주는 위로 : "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
그녀는 2005년 3월 4일에 태어났다. 혈통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다면 축복이라도 받았겠지만 평범한 부모를 둔 탓이었을까. 다른 이'보다 몸집이 작았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키가 작고 깃털처럼 가벼웠다고 한다. 고작 430kg이었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작고 귀여운 그녀를 보고 차밍걸'이라고 불렀다. 혹자는 g를 kg으로 잘못 표기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몸무게는 430kg이 맞다. 경주마 차밍걸 이야기'다. ( 보통 혈통 좋은 명문가 경주마는 평균 500kg이 넘는단다. ) 다음은 차밍걸에 대한 중알일보 기사'이다.
“차밍걸, 욕하지 마세요. 얼마나 열심히 뛰는 말인데….” (유미라 기수)
‘을(乙)들의 희망’으로 불리는 경주마 ‘차밍걸’이 1922년 조선경마구락부가 생긴 이래 최다연패 신기록을 세웠다. 2005년 태어난 8세 암말 차밍걸은 26일 경기도 과천 서울경마공원에서 열린 제6경주에 출전해 11마리 중에서 9번째로 골인했다. 이로써 2007년 데뷔, 7년간 96번 경주에 출전한 차밍걸은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하며 자신과 당나루(1995년 기준)가 갖고 있던 95연패 기록을 넘어섰다. <본지 5월 25일자 1, 14 ,15면>
차밍걸은 다른 경주마보다 몸무게 100㎏이 덜 나가는 430㎏의 왜소한 말. 1등은 못하지만 끝까지 열심히 뛰는 ‘소시민’ 또는 성실한 ‘을’로 비유되며 서울 경마공원의 ‘화제마’로 부상했다. 차밍걸이 96연패 기록을 세운 26일, 1등 기수보다 더 조명을 받은 기수가 있다. 차밍걸의 기수 유미라(29)씨다. 2008년 6월 기수로 데뷔한 유씨는 같은 해 8월 차밍걸을 처음 타 12두 가운데 6위를 한 이래 차밍걸이 출전한 96회 경주 중 75번을 함께 달렸다.
유 기수는 “오늘도 레이스 중반까지 꼴찌로 처졌다. 하지만 끝까지 열심히 달려 직선주로에서 두 마리를 제쳤다. 1등을 못하지만 어지간해서는 꼴찌도 안 하는 투지 있고 열심히 뛰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내로라하는 특급 기수와는 거리가 멀다. 지난해 랭킹은 서울경마공원 소속 기수 56명 중 46위다. 유 기수는 “2007년 교육생 때부터 내게 배정돼 인연을 맺은 말이다. 연습 때는 까불대지만 막상 경기를 뛰면 승부욕이 정말 강한 말”이라고 칭찬했다. 그는 “차밍걸을 응원하는 팬도 있지만 ‘똥말이 또 뛴다’고 욕하는 사람이 있다. 정말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차밍걸이 연패 기록을 쌓아가는 동안 유 기수의 기량은 향상되고 있다. 데뷔 이후 지난해까지 5시즌 동안 622번 달려 6번 우승에 그친 유 기수는 올해 벌써 4번이나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기수를 시작했다. 말이나 기수나 여자라고 봐주는 게 없는 종목이다. 결혼을 한 뒤에도 차밍걸처럼 오랫동안 기수 생활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굵고 짧은 것보다는 가늘고 긴 걸 선호하는 ‘을’다운 포부다.
이해준 기자
드라마 같은 기적은 없었다. 성적은 말 그대로 초라했다. 96전 96패'였다. 최고 기록은 3위가 유일했다. 경마 역사상 최다 연패'를 기록한, " 불명예 기록 " 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늙은 말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경주마에게 8살이면 환갑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별다른 부상 없이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과 비록 우승을 한 적은 단 한번도 없으나 열심히 뛰어서 꼴등'을 한 적도 별로 없었던, 차밍걸의 성실한 태도'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앞에서 보느냐 아니면 뒤에서 보느냐, 에 따라서 입장'은 달라진다. 뒤'란 끝, 변방, 패자, 꼴찌, 비주류의 다른 이름이다. < 앞 > 에서 보면 차밍걸'은 한심한 경주마'이지만 < 뒤 > 에서 보면 성실한 경주마'이다.
이처럼 관점은 보는 위치가 어디인가에 따라서 판이하게 달라질 수가 있다. 중심'이란 딱히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몸의 중심은 심장이거나, 얼굴이거나, 뇌이기도 하지만 같은 이유로 누군가에게 몸의 중심은 심장이 아니거나, 얼굴이 아니거나, 뇌가 아닐 수도 있다. 아픈 곳이 중심이 된다. 나처럼 피똥을 싸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온통 항문에 신경이 집중된다. 신장이 안 좋은 사람에게는 신장이 몸의 중심이 된다. 그러므로 중심은 정해진 것이 아니다. 아파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모든 관심은 아픈 곳에 쏠린다. 병든 곳이 중심이다. 다양성이란 차원에서 보면 승자독식은 독이다. 아주, 지독한 독이다. 중심은 다양성에서 나온다.
■ 한 명의 천재가 만 명을 먹여살린다고 주장하는 이건희 리더쉽'은 가짜다. 그것은 이건희가 노동자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노망에 가까운 실언이다. 마치 21세기형 군주제 같다. 이건희는 핸드폰을 팔아서 노동자를 먹여살린다고 생각한다. 그는 지금 경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를 한다. 대통령이 정치를 통치로 착각하면 위험하듯이, 경영자 또한 경영과 통치를 혼동하면 안 된다. 생각을 달리 하자. 오히려 만 명의 노동자가 이건희를 먹여살리는 것은 아닐까 ?
앞에서 보면 보이지 않으나 뒤에서 보면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바로 초라한 어깨'이다. 사람을 정면에서 바라볼 때 어깨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얼굴이라는 강력한 아우라 때문이다. 얼굴은 모든 시선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같다. 구멍'이라는 도상학은 강력한 유혹'이라 할 만하다. 눈, 코, 귀, 입. 얼굴이란 온통 구멍투성이'다. 텅빈 기표이다. 독자여, 이런 표현을 용서해주신다면 용기를 내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람은 처음에는 얼굴을 보고 사랑에 빠지지만 사랑을 완성시키는 것은 초라한 어깨'라고 말이다. 타자의 어깨를 발견하게 되면 사랑에 빠지나니, 그것는 사랑의 묘약'이다.
- 나다니엘 페인, 1949
이 사진은 1949년도 풀리쳐 대상 작품으로 홈런 타자 베이비 루스가 은퇴를 알리는 공식적인 무대를 찍은 것이다. 사진 기자들이 이 역사적인 장면을 담기 위해 앞다투어 화려한 얼굴을 담을 때, 사진 작가인 나다니엘 페인은 쓸쓸한 어깨'를 담는다. 이 사진에는 화려한 얼굴로는 결코 담을 수 없는 < 끝이 주는 위로 > 가 짙게 깔려 있다. 등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아, 칼 끝보다 더 벼린 끝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끝......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이는 것은 관계이다. 여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쓸쓸한 끝이 있다. 사람들은 자의반 타의반, 관계를 맺거나 끊는다. 관계란 힘껏 당기면 끊어지는 끈이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사랑에는 연필심처럼 날카로운, 조금이라도 손에 힘을 주면 똑, 부러지는 그런 연약한 끝이 있다. < 사랑의 끝 > 은 < 연필의 끝 > 과 같다. 그래서 연필을 쥘 때 너무 힘을 주면 안 된다. 연필과 사랑(집착)은 이음동의어이다. 연필이라고 쓰고 사랑이라고 읽는다. 힘껏 잡으면 잡을수록 心은 부러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끝은 절망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끝이 보일 때 위로'를 얻기도 한다. 산더미처럼 쌓인 일이 끝나갈 때 기쁨을 얻듯, 연인들이 지독한 사랑 싸움 끝에 서로 끝내기로 결심을 할 때, 그때 끝이 보이는 관계는 위로'가 된다. 96전 96패를 기록한 차밍걸'은 다음 경주에도 출전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까지도 현역 선수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불명예 기록을 하나 더 추가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질주를 할 것이다. 늙은 말에게 있어서 우승은 이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젖은 빨래를 마르게 하는 바람은 무섭게 휘몰아치는 한겨울 칼바람이 아니다. 오뉴월의 느린 바람이다. 그녀는 열심히 달렸다. 바람보다는 느리지만 냇물보다는 빠른 속도로......
■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 뒷모습, 미셸 투르니에
함께 하는 책 : < 퓰리처상 사진 > 은 가격이 부담 된다. 장바구니'에서 갇힌 지 꽤 오래되었다. 미셀투르니에의 사진 에세이 < 뒷모습 > 은 도서관에서 읽기에 좋은 책이다. 여러 꼭지 가운데 하나인 < 뒤쪽이 진실이다 > 라는 짧은 글'이 책 전체를 말해준다. " 뒤쪽이 진실이다...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 오히려 이 책을 번역한 김화영 교수의 " 뒤에 붙임말 " 이 인상 깊다.
" 뒷모습은 정직하다. 눈과 입이 달려 있는 얼굴처럼 표정을 억지로 만들어 보이지 않는다. 마음과 의지에 따라 꾸미거나 속이거나 감추지 않는다. 뒷모습은 나타내 보이려는 의도의 세계가 아니라 그저 그렇게 존재하는 세계다. 벌거벗은 엉덩이는 그 멍청할 정도의 순진함 때문에 아름답다. "
말이 나온 김에 사진과 관련된 몇몇 책을 책장에서 뽑아본다. 롤랑 바르트가 쓴 < 카메라 루시다 > 는 수잔 손탁의 < 사진 이야기 > 와 함께 가장 중요한 사진 에세이'이다. 일독을 권한다. 이와 함께 존 버거가 쓴 < 이미지 > 를 참고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개인적으로는 버몬트 뉴홀의 < 세계사진사 > 보다는 장클로드 르마니, 앙드레 루이예가 편집한 < 세계사진사 > 를 추천한다. 탁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