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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장관전서 세트 - 전13권
이덕무 지음 / 솔출판사 / 1997년 5월
평점 :
품절
실패한 첫사랑은 모두 독이다.
아름다움이란 우리 가까스로 견딜 수 있는 무서움의 시작에 불과함으로
- 두이노의 비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
황석영이 몽골 대연합을 주장하고 김지하가 율려운동이라는 범우주론을 제시했을 때, 나는 웃으면서 코 팠다. 꼴사나운 짓이라고 생각했다. 구호가 거창할수록 가짜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아시아 대연합론이나 범우주론은 얼핏 보기엔 대단한 것 같지만 사실은 뜬구름 잡는 헛것이다. 두 거목은 이러한 거대 담론이 자기 몸에 맞는 옷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이 정도 수준은 되야 내 품격에 맞다는, 일종의 허세가 작용한 탓이다. 누누이 지적하지만 미시적 비판은 쪼잔한 것처럼 보이고, 거시적 비판은 거창한 것처럼 보인다. 안철수 현상이 대표적이다. 그가 주장하는 < 새정치 > 는 거시적 비판이다.
인간 존중 사회, 특권 없는 사회, 공정 사회, 신뢰 프로세스 등 또한 모두 거대 담론이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있을까 ? 아무도 없다. 여기에는 이데올로기적 색깔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확장된 범위를 좁히면 충돌이 된다. 무상급상, 수도 이전, 제주 해군 기지 건설 등등. 사실 여기까지도 범위가 넓다. 이 범위를 더 좁혀보자. "화장실에서 똥 닦은 휴지는 휴지통에 버리지 말고 변기 안에 버리자. 개새끼들앙 ! " 이라거나, " 데이트 비용은 각자 추렴하자, 개새끼들앙 ! " 이라고 하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안철수 같은 분들은 결코 화장실 휴지 문제나 데이트 비용 쪼개기'에 대한 이의 제기'는 하지 않는다. 왜냐, 쪽... 팔리니깐.
여기에 직격탄을 날린 지식인이 있었다. 김수영 시인'이다. 그는 지식인들이 항상 거창한 것에만 문제를 제기한다고 지적한다. 생활인으로써의 지식인은 없고 온통 민주, 평화, 자유와 같은 투사 이야기만 쏟아낸다고 비판한다. 그가 보기엔 한심한 것이다. 한국 문단에서 가장 위대했던 이 시인'은 에세이'에서 온통 쪼잔한 일상을 쏟아낸다. 가난 때문에 쪽팔리다는 말은 해도 가난 때문에 넉넉한 삶이오, 라고 말하지 않는다. 스스로 그는 " 나는 왜 쪼잔한 것에만 분노하는가 ! " 라는 말을 하고는 했다. 이 자리를 빌려 김수영을 대신해서 내가 속 시원히 한마디 하련다. " 글 좀 쓰는 문인이라고 하는 양반들, 김수영이 쓴 글은 읽어봤냐, 개새끼들앙 ! "
한국 문단 제도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지적한 이도 김수영이었다. 등단은 밥그릇 싸움이라는 것이다. 없어져야 할 제도라는 지적과 함께. 그 스스로도 등단 작가이면서 말이다. 등단 작가 중에서 한국 등단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한 이는 김수영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내가 지금 쓰고자 하는 이는 김수영이 아니라 이덕무'라는 선비이다. 현대사에 김수영이 있다면, 조선사에는 이덕무와 같은 백탑파'가 존재했다. 조선 선비들이 사상과 선비로서의 자세에 대해 글을 쓸 때, 이덕무라는 선비는 신변잡기에 대한 글을 썼다. < 이목구심서 > 는 잡다한 것투성이'다. ( 박물학적 글쓰기의 결정체는 정약전의 자산어보가 아닐까 ? )
쥐가 닭 똥구멍을 갉아먹는 이야기, 지네가 뱀 몸속에 들어가 뱀을 죽이는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사대가 양반들이 보기엔 잡문이요, 신변잡기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이 작품이야말로 위대한 작품이다. 그는 박학다식했으며 박물학적 사고를 가진 인물이었다. 耳目口心書라는 책 제목이 말하듯이 그는 공자, 맹자 같은 뜬구름 잡는, 뽐나는 사상을 말하기보다는 그냥 자신이 듣고, 보고, 마음이 동한 것'들에 대한 담담한 것만을 적는다. 적어도 알지도 못하면서 구름 위를 걷는 짓은 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 엿보인다.
내가 < 이목구심서 > 에서 흥미롭게 본 대목은 뱀과 지네'에 대한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지네-포비아'라고 할 만큼 지네를 무서워하기 때문이었다. 다리 없는 무지류에 대한 애정 ( 지렁이를 직접 키웠다. ) 은 다지류에 대한 혐오와 공포'로 전이된 탓이리라. 하여튼.... 다지류 가운데에서도 지네는 범접을 할 수 없는, 절대적 아우라'를 가지고 있는 짐승이었다. 지네를 보면 사람들은 오금이 저린다. 땀이 나고, 호흡이 빨라지며, 무서워서 몸이 굳는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토록 무서운 존재이면서도 지네를 계속 보게 된다는 점이다.
이 지네- 포비아'의 정체를 깨닫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느 날, 나는 한 여자'를 우연히 보았다. 땀이 났다. 호흡이 빨라졌다. 모든 시간은 멈춘 채 동상처럼 한 여자를 지켜보았다. 그, 토록 무서운 존재.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지네를 무서워하는 것은 사실은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나는 지네를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첫눈에 반한 거라고 말이다. 매혹적인 주체는 모두 독을 가지고 있다. 조인성과 송혜교는 아름다운 얼굴이 아니라 독을 가진 얼굴이다. 시간이 멈춘 듯한, 그런 경험들. 그래서 나는 < 깻잎 오소리 입말 사전 > 에 다음과 같이 쓴다.
지네 : < 동물 > 지네강의 절지동물을 통들어 이르는 말이다. 몸은 가늘고 길며, 여러 마디로 이루어져 그 마디마다 한쌍의 밭이 있다. 다리에는 한 쌍의 더듬이와 독을 분비하는 큰 턱이 있고 눈은 없거나 네 개의 홑눈만을 가지고 있다. 붉은 색일수록 독이 강하다. 축축한 흙에 살고 작은 벌레를 잡아먹는데 전 세계에 2000여 종이 분포한다. [ 비슷한 말 ] 첫눈에 반한 사람 : 실패한 첫사랑은 모두 독이다.
- 깻잎 오소리 입말 사전, 소율. 형설시공사.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