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필경사 바틀비 ㅣ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21년 5월
평점 :
빤스 벗고 덤벼라 : 윤창중 사태'에서 희망을 보아야 하는 이유.
윤창중은 빤스'를 벗었다. 거두절미하고... 아무래도 그는 기자 생활을 너무 열정적으로 해온 탓에 영화 관람 같은 문화 생활을 하기에는 여유가 없었던 듯하다. 공포 영화 몇 편'만 보았어도 국제적 개망신'은 피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공포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피 범벅 난도질 영화가 주는 교훈은 집 밖에서는 빤스를 내리지 마라, 이다. < 할로윈 > 이나 < 13일밤의금요일 > 같은 영화에서 잔인하게 죽는 사람은 항상 무리에서 벗어나서 으슥한 곳에서 빤스를 내리는 남녀'가 아니었던가 ! 이들 영화에서는 빤스를 자주 내리는 남자와 브래지어를 자주 풀어헤치는 여자가 제일 먼저 죽는다. 반대로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대부분 금욕적인 사람이다. 우리 빤스까지는 내리지 말기로 해요 ! 아흥.
" 꼴리면 죽는다 " 는 서사는 신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바기나 덴타타 신화/ 이빨 달린 질' 가 대표적이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메두사 신화'일 것이다. 프로이트는 남자들이 메두사를 보면 돌처럼 굳어서 죽는 현상을 < 페니스의 발기 > 라고 설명한다. 타당한 접근이다. 자세히 보면 메두사는 여성 성기'를 닮았다. 메두사 얼굴은 촉촉한 검은 구멍이고, 뱀은 여성 성기 주변에 웃자란 거웃이다. 메두사는 바기나 덴타타이다. 이 신화를 변형해서 현대적 감각에 맞게 각색해서 성공한 작품이 나카다 히데오 감독의 < 링 > 이다. 영화 속에서 주요 장소로 등장하는 검은 우물은 말 그대로 촉촉하고 검고 깊은 구멍이다. 이 영화에서 링 바이러스'에 감염된 비디오를 보는 사람은 모두 딱딱하게 굳은 채 죽는다. 곰곰생각하는발이란 녀석이 근본없는 태생임을 너그럽게 봐주신다면 용기를 내어 이 자리에서 한 마디 하련다. " 링은 성병에 대한 공포를 다룬 영화다. 링은 여성 성기를 의미하고, 바이러스는 성병 병원균을 의미한다 !! " 이처럼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 미국에서 빤스 벗고 주접 떤 사건 > 으로 윤창중은 단칼에 갔다 ! 그가 슴가 속에 품은 에로스는 타나토스로 연결이 되었다. 윤창중이 공포 영화에서 이 메시지'를 깨달았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비극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공포영화, 꽤..... 좋은 장르다. 무시하지 마라. 만약에 내가 감독이어서 이 사건을 바탕으로 영화로 각색한다면 제목으로 < 개새끼들아, 빤스 벗고 덤벼라 ! > 따위로 짓겠다. 블랙코미디 장르로 손색이 없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누가 될까 ? 문제는 주인공이다. 윤창중일까 ? 아니면 ( 윤창중 식으로 ) 가이드일까, ( 박근혜 식으로 ) 해외 동포 학생'일까 ? 나라면 문화원 여직원'을 주인공으로 선택하겠다. 핵심은 윤창중이 아니라 문화원 여직원'이다. 그녀는 작은 영웅이다. 불의에 분노한 내부 고발자이며 정의를 알리기 위한 공익 제보자'이다. 만약에 당신이 문화원 여직원이라고 하자.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 사표까지 던지고 불의에 대항한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다. 피해자의 불행에 함께 분노하고,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알린 용기'야말로 아름다운 용기'다.
언론은 온통 윤창중과 피해 여성에게만 촛점을 맞추고 있을 뿐, 불의에 대항한 한 여성의 용기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언론의 생태적 천안함이다. 오타다, 천박함이다. ( 천안함, 아님 !! ) 내가 아는 선에서는 이 공익 제보자에 대한 용기를 조명한 기사나 사설'은 찾아볼 수 없다. 사회적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지긋지긋하다느니, 나라 망신이니 그만하면 됐다는 논조가 슬슬 기어나온다. 내부 고발자, 공익 제보자를 대하는 삐딱한 자세'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 삐딱함에는 감춰도 될 것을 중뿔나게 설치고 다닌 문화원 여직원에 대한 원망도 섞인 것처럼 보인다. 국익을 위해서는 사소한 공익은 은폐해도 좋다는 사회적 동기가 암암리에 작동한 결과이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좋은 태도가 아니다. 국익보다는 공익'을 우선해야 된다. 누누이 말하지만 애국심은 타자가 보기에는 파시즘이기 때문이다. 일본 식민지 시대를 떠올려 보라. 일본 입장에서 보면 일본군의 용맹은 애국심이 되지만 식민지 국가로 전락한 한국인이 보기에는 군국주의'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당신이 하면 불륜이 되는 것이 바로 애국주의'이다. 문화원 여직원은 국익보다는 공익'을 선택한다. 그녀는 정의를 위해서 사표까지 던진 것이다. 번데기보다 뻔뻔하고 쫀드기보다 쫀쫀한 우리는 늘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외면했던 불의를, 그녀는 정면으로 직시한 것이다.
허먼 멜빌의 눈부신 걸작 < 필경사, 바틀비 > 에서 바틀비'는 항상 " i would prefer not to ~ " 라고 말한다. 문법적으로나 통사적으로는 딱히 틀린 문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연스러운 문장도 아닌 이 상투어를 번역하면 " 차라리 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시렵니다아아아앙. " 정도가 될 것이다. 그는 상사에게 웃으면서 개긴다. 상사가 이것 하라, 라고 주문하면 웃으면서 " 차라리 하지 않으렵니다. 잇힝 ! " 하며 코판다. 하지만 이 우스꽝스러운 말투에는 핵심을 찌르는 화두'가 숨겨져 있다. 바틀비의 불복종을 단순한 거부이거나 게으름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왜냐하면 바틀비는 일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 하는 것 > 과 < 안 하는 것 > 사이에서 심사숙고 끝에 < 안 하는 것 > 을 선택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乙인 바틀비는 ( 甲인 상사의 명령에 대항하여 ) 소극적 거부 대신 적극적 거부를 선택한 것이다. " 선택 " 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출판사 책 소개'에서는 바틀비가 취하는 태도를 소극적 저항이라고 했는데, 왜 이러한 태도가 소극적 저항인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는다. 분신이라도 해야 적극적 저항으로 인정해 줄 것인가 ? ( 피식 ) 웃으면서 코 판다. 바틀비는 할 건 다 한다. 해고에 저항해 출근 투쟁을 벌이고, 단식 투쟁'도 마다하지 않는다. 바틀비가 거부하는 것은 상사가 내린 명령이 아니라 노동 그 자체에 대한 거부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을 거부한다는 것은 니체가 신은 죽었다, 라고 말한 것과 유사하다. 갑을 향한 빅엿'이다.
http://blog.aladin.co.kr/749915104/6268737 : 필경사 바틀비.
문화원 여직원은 국익보다는 공익을 선택했다. 甲 입장' 에서 보면 그녀의 태도는 적극적 거부'에 해당한다. 명령 불복종이다. 그녀가 사표를 던졌다는 사실은 윗선에서 강압'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사표란 결국 불복종에 대한 강한 의사 표현이 아니었던가 ? 아마도 정부 관계자'들은 이 사건을 쉬쉬하는 차원에서 막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국익이라는 거대한, 정말 거대한 甲 앞에서 쫄지 않을 소시민 乙이 있을쏘냐. 더군다나 여성들이 아니었던가. " 여성이여, 군대에서 딱총은 쏴봤냐잉? " 보잘것없는 여자가 방미/ 訪美 를 불미/不美'로까지는 번지게 하지는 않으리라, 라는 수컷들의 근거 없는 자신감도 한몫을 했을 거시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그녀의 이름이 바틀비였다는 사실을.
한국 사회는 내부 고발자나 공익 제보자를 범죄자'처럼 취급한다. 북아메리카나 유럽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시츄에이션이다. 한국에서 영웅은 김연아나 박세리 같은 스포츠 스타이지만 북아메리카나 유럽 국가에서는 공익을 위한 내부고발자를 영웅 취급한다. 문화적 차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만 자랑할 만한 문화적 차이'는 아닌 것 같다. 김연아는 개인의 명예와 부를 위해서 빙판을 달렸고, 추신수 또한 부와 명예를 위해 방망이를 휘두른 것뿐이지 애국심과는 관련이 없다. 외화벌이'를 했으니 애국했다'는 주장은 매우 낯익은 기시감을 전해준다. 그렇다, 북한의 태도와 다를 것이 없다. 도토리 키재기다.
노무현은 개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것은 상부의 권력 구조가 매우 견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안철수를 믿지 않는 것만큼 문재인도 믿지 않는다. 그들을 폄하하자는 의도는 없다. 그들이 상부 권력에 대항하기에는 벽은 지나치게 딱딱하게 고착화되어서 부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위에서부터의 개혁이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노무현의 실패가 그 예이다. 오히려 희망은 아래로부터의 딴지'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 문화원 여직원이 내린 용기가 좋은 예이다. 남양유업 사태에 대한 乙의 단결도 마찬가지다. 시작은 미미하지만 끝은 창대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창대'는 미미한 것에서 시작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