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알파벳(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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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드 44 ㅣ 뫼비우스 서재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44 = 1'이다.
특정 장르'를 선호하지는 않는다. 닥치는 대로 읽고 보는 편이다. 깊게 파기보다는 넓게 파는 스타일'이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깊게 파기 위해서는 넓게 파야 한다. 그래야 깊게 팔 수 있는 법이니깐. 추리 소설'도 건드려 보고, 하드보일드 소설'도 찔러 보고, 공포 소설도 펼쳐 본다. 그리고 스릴러'도 살짝 간본다. 설핏 보기엔 곁가지만 요란하게 뻗는 것 같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은 < 범죄 소설 > 이라는 큰 범주에 속하니 간보는 독서 취향이'기보다는 편식 없이 맛보는, 탐미적 춘향이'라고 스스로 자위한다. ( 자위'하니 하루키'가 생각난다. 나는 하루키'만 읽지 않는다. )
연쇄 살인'을 다룬 범죄 소설은 대부분 서로 무관해 보이는 사건'에서 공통분모'를 찾는 과정을 다룬다. 무관에서 유관으로, 비정형에서 정형으로, 그리고 무질서(엔트로피)에서 질서(네트로피)를 찾아내는 과정이 바로 수사'이다. 그러니깐 스릴러'란 < 차이/다름'에서 동일성 - 같음, 통일성, 공통점'을 뽑아내는 과정 > 이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애거사 크리스티'는 이 방면에 있어서 도가 튼 도사'였다. < 오리엔트 특급 살인 > 에서 탐정 포와로는 국적과 신분이 서로 다른, 비슷한 구석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12명의 열차 승객'에게서 어린이 유괴'라는 단 한 가지 공통 분모를 뽑아낸다. 12명의 승객은 무질서를 나타내는 카오스'를 의미하지만, 포와로는 이 카오스에서 이들을 하나로 연결해 주는 코스모스'를 발견한다. 12 = 1'이다.
그런가 하면 < abc 살인 사건 > 에서는 A로 시작되는 마을'에서 A로 시작되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살해되고, B로 시작되는 마을에서는 B로 시작되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살해되는 사건을 다룬다. 전형적인 묻지 마 범죄'이다. 살인자는 살인을 게임'이라고 생각하고는 포와로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그리고는 도전장에 이런 말을 남긴다. " 나, 잡아봐라 ! 히히히 " 하지만 눈치 빠른 포와로는 서로 무관해 보이는 무질서에서 공통분모 하나를 뽑아낸다. " 잡았다, 이놈아 ! 으하하. "
< 차일드 44 > 도 같은 맥락이다. 희생자는 주로 여자아이이거나 남자아이'이다. 나이대는 십대 후반까지 다양하다. 살인이 벌어진 장소'도 넓게 흩어져 있다. 전형적인 카오스'이다. 네트워크 사회 이전인 50년대 자폐적인 스탈린 공포 정치 시대를 감안하면 이 사건들은 모두 개별적 범죄'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인공 레오'는 희생자 입 속을 채운 검은 흙(으로 추정되는 나무 가루)와 발목에 묶인 올무'를 통해 이 사건이 연쇄살인자에 의한 단독 범행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니깐 마흔넷 건의 살인 사건에 대한 범인은 마흔네 명이 아니라 한 명'인 것이다. 44 = 1'이다.
< 차일드 44 > 는 범주를 스파이 소설'에 묶느냐, 아아니면 스릴러 소설에 두느냐에 따라 별점'에 달라질 것 같다. 이 소설을 스파이 소설'로 보면 ★★★★★ 이지만 스릴러 소설'로 묶으면 ★★★ 정도. 이래저래 평균값을 내니 ★★★★ 이다. 스파이 서사'로는 매우 탁월하지만 스릴러 서사'로는 그리 훌륭한 설정은 아니었다. 지못미, 톰 롭 스미스 ! 나는 연쇄살인마의 살해 동기'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살해 목적이 작위적이었다. 결국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가족 서사극인가 ? 눈물이 앞을 가린다.
톰 롭 스미스 씨'는 소설이 생각보다 잘 빠지자 끝에 가서 욕심을 냈는지도 모른다. 하드보일드했던 스탈린 시대의 비참'은 느닷없이 웅장한 그리스 시대의 비극'이 되었다. 하지만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전체적인 구성은 탄탄하다. 글 재주도 좋고, 괄약근'을 조이게 만드는 서사 배치도 훌륭했다. 역시 똥구멍과 화투 패'는 쪼여야 맛이다. 차라리 살인자가 가진 살해 동기'를 매우 심플하게 설정했다면 탁월한 작품 하나 나올 뻔했다. 스콧 스미스의 < 심플 플랜 > 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