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사용설명서를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는 사람은 꼼꼼한 사람이다. 반면 내용을 취사 선택해서 부분만 읽는 사람은 성격이 급한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아예 읽지 않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다. 내 경우는 제품사용설명서'를 읽어본 적이 없는 부류에 속한다. 나는 그것을 아이스크림 " 붕어 사만코 포장지 " 취급을 한다. 뜯으면 바로 버린다. 이렇듯 사용 설명서를 읽어본 적이 없으니 제품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래서 나는 제품의 기능 10가지 중 2,3개만 사용한다. 나머지는 몰라서 사용을 못한다. 이런 내가 답답한지 주위 사람들이 일일이 가르쳐준다. 그러나 불만은 전혀 없다. 폰뱅킹을 할 줄 모른다고 불편한 건 없다. 내가 휴대폰을 고를 때의 기준은 첫째가 기능이 없는 것이다. 통화와 문자 그리고 사진 이외'에는 다른 용도로 써 본 적이 없다. 디지털 노마드에서 추방당한 아날로그적 쪼다새끼'라고 욕하지 마라. 그 옛날, 칼 융 선생님께서 인간의 유형을 16가지로 분류하였나니 내 경우는 INTP 유형이었다. 그는 나 같은 유형을 " 제품 사용 설명서'는 절대 읽지 않을 놈 " 으로 이미 규정했다. 농담이 아니라 INTP형은 제품 사용 설명서'를 잘 읽지 않는다. 허진호의 98년도 영화 < 8월의 크리스마스 > 를 보면 나와 비슷한 캐릭터'가 나온다. 한석규'가 아니다. 한석규 아버지로 나오는 신구'다. 그는 제품사용설명서의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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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편지.
제품사용설명서'를 읽는 것만큼 나를 미치게 하는 것도 없다. " ~ 오 " 로 끝나는, 묘한 명령체'가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치 영혼이 없는 좀비와 소통을 하는 느낌이다. 제품사용설명서'에는 문장과 문체가 없다. 그것은 온통 삿대질 이모티콘
<☞>: 삿대질 이모티콘.
들이 문자로 둔갑해서는 문자인 척 하는 것이다. A를 누른 후 B를 올리시오 ! C를 클릭한 후 복사한 고유번호를 입력하시오 ! 저리 가시오 ! 이리 오시오 ! 아, 하시오. 오, 하시오. 아흥아흥 하시오 ! 질문은 내가 하오. 묻는 말에나 답변 하시오 ! 제품 설명문의 세계는 온통 삿대질'이다. 그것은 손가락으로 이루어진 지시문'이다. 영화 < 8월의 크리스마스 > 에서의 사진사 정원은 아버지에게 청기 올려, 백기 내려, 백기 올리지 말고 청기 내리지 마, 라고 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아버지는 눈이 캄캄해서 글을 읽을 수가 없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생각해낸 것이 바로 문자 대신 이미지'로 제품사용설명서'를 만드는 것으로 " 사진이라는 도구를 사용한 필사 " 이다. 그러므로 그 또한 필경사'다.
필경사이며 사진사인 정원(한석규)'은 나와 같은 INTP 유형'을 위해서 제품사용설명서'를 새롭게 재해석한다. 그것은 일종의 메타-언어'다. 아마 인류 역사상 최초로 " 제품사용설명서(원본) " 를 사진(사본) 으로 재해석한 전무후무한 방식의 < 비디오 아트 > 행위로 남지 않을까 ? 사실 이 세상 모든 창작물은 원본의 사본'이다. 누군가의 것을 베낀 것에 불과하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피에르 메나르가 그대로 필사하고, 바틀비'는 필사하다가 미친다. 오리지날은 바닥이 난 지 이미 오래. 그래서 니체는 미래를 " 패로디'가 시작된다 ! " 로 규정했다. 19세기에 가까웠던 20세기 인간인 니체'는 확실히 21세기의 눈을 가진 천재'다.
카메라는 만연필이다. 그러므로 사진은 문장'이다. 연필이 문자로 이미지'를 기록한다면, 사진기는 이미지로 문자를 대체한다. 때론 사진 한 장'은 책 한 권의 내용보다 풍부할 때가 있다. 전쟁 보도 사진'은 그 정점에 다다른 영역이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대중에게 주는 메시지는 보다 더 강렬하다.
허진호 감독은 박찬욱과는 정반대의 연출 스타일'을 갖췄다. 박찬욱이 상징을 중요시한다면 허진호는 상징을 배제하는 쪽으로 연출한다. 전자가 칼칼한 매운탕이라면 후자는 맑은 탕'이다. 그는 카메라의 움직임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롱숏'를 자제한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 자신의 작품이 예술 영화'처럼 보이게 하려는 얄팍한 야심을 가진 이'는 롱숏을 자주 활용한다. 하지만 허진호는 롱숏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롱숏 다음에는 필연적으로 미디엄 숏과 풀숏이 따르기 때문에 정적인 느낌이 깨지기에 그렇다. 그래서 그는 고집스럽게 미디엄 쇼트'로 간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사진사에게 가장 어울리는 프레임은 미디엄샷이다. 증명사진은 대부분 미디엄숏이니깐 말이다.
허진호 감독의 고백에 의하면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은 < 즐거운 편지 > 였다고 한다. 황동규의 시'를 무척 좋아해서 외우고 다녔다고....... 그러니깐 이 영화 속 사진은 곧 LETTER'의 은유이다. ( 이 단어는 편지와 함께 문자'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 그가 남긴 것은 사진으로 쓰여진 필름 현상기 제품 사용 설명서'이다. 황동규 시집 < 三南에 내리는 눈 > 에 수록된 " 즐거운 편지 " 로 끝을 맺겠다. 시인은 " 밤이 들면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한다 " 고 말한다.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의 깊은 밤이었나 보다.
즐거운 편지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