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록키 호러 픽쳐 쇼 > 라는 컬트 영화를 300번 넘게 감상하고 나서 그 영화에 대한 책을 쓴 사람이 있다. ( 컬트라는 것의 정의 중 하나가 반복 관람이기는 하지만 300번이라면 도를 넘은 것이다. ) 그는 3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오로지 록키 호러 픽쳐 쇼'에 대해서만 썼다고 한다. 1회 감상에 1페이지 분량의 글감이 나온 셈이다. 만약에, 그가 500번 넘게 봤다면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책을 쓸 수 있을까 ? 우리라면 엄두도 못낼 것이다. 1번 볼 때마다 코 파고, 1페이지'를 작성할 때마다 피, 똥, 싼, 다. 하지만 그 록키 호러 열혈 무명씨'라면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 록키 호러 픽쳐 쇼 > 를 볼 때마다 " 반복 " 을 경험하지만 그는 볼 때마다 " 차이 " 를 경험한다. 이 차이는 다시 보기(반복)의 결과이다. 300번을 넘게 본 그는 볼 때마다 즐거워서 비명을 지르고, 3번째 보는 우리는 지루해서 댄스홀에서 지루박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다. 이처럼 차이'를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들은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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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키 호러 픽쳐 쇼.

필경사 : 글씨 쓰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
필경사 : 글(소설)을 쓰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소설가라고 말하고, 글씨 쓰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필경사'라고 한다. 아주 오랜 옛날 도서관 사서는 필경사였다. 그들은 손으로 직접 필사를 해서 책을 만들었다. 필사란 원본을 그대로 다시 쓰는 행위이다. 그래서 누가 책을 훔쳐서 책이 사라지면 " 다시 " 필사'를 해야 했다. 성경책 한 번 써본 사람들은 다들 알리라. 이만저만 고된 일이 아니다. 책을 도둑 맞는다는 것은 그만큼 일감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도서관 사서들은 책도둑을 혐오했다고 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무시무시한 경고문을 적었다. " 야, 시부랄 새끼야. 책 훔쳐가지 마라, 잉 ? 만약에 이 책 훔치면 니 애비는 8월의 물렁 좆이다. 알긋냐 ? 뜨거운 팬 위에 튀겨 죽을 놈아. 훔지지 마라, 잉 ? 느그들, 글씨 쓰다가 팔 빠져봤냐 ? " 농담이 아니라 진짜 이런 무시무시한 경고문을 도서관 곳곳에 써넣고는 했다. 당시의 책은 매우 비싼 물건이어서 도서관에서는 책을 쇠사슬에 묶어두기도 했다고.
가장 흔한 공상은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간 시간여행자'에 대한 공상이다. 우리는 과거로의 시간 여행'에 가져갈 소품에 대해 긴 이야기를 할 것이다. 132회 로또 당첨 번호, 월간 달려라 경주마, 1997년도 수능 시험 문제 해답지 등등. 그런데 꼭 타임머신이 꼭 1997년 어느 시점에서 내려준다는 법칙이라도 있나 ? 만약에 내가 시간 여행자'라면 스티븐 킹의 소설 하나를 원고지에 필사해서 과거로 돌아가겠다. 혹은 해리포터'는 어떤가 ?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고 느긋하게 기다리겠다. 소설가들에게 있어서 시간 여행이라는 서사만큼 매혹적인 이야기도 없다. 그래서 스티븐 킹'도 < 11/22/63 > 에서 시간 여행을 다룬다. 소설 속 주인공은 임무는 63년 11월 22일로 돌아가 케네디 암살을 저지하는 것이다. 단 시간 여행 문이 열리는 공간은 1958년 9월 9일 오전 11시 58분의 특정 거리'이다. 그러니깐, 소설 속 시간 여행자'가 총 5번의 시간 여행을 했다면 1958년 9월 9일의 그 거리 상황을 다섯 번 마주치는 것이 된다. 결국 시간 여행자'는 그들을 다섯 번이나 만나지만 그들은 항상 시간여행자'를 처음 본다. ( 킹의 모든 소설이 그렇듯이 이 소설도 곧 영화화될 것이다. ) 씐난다.
흥미진진하다. 우리는 이미 과거 속 인물의 동선과 대사가 다시 반복될 것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과거'는 완벽하게 다시 반복되지는 않는다. 뭔가가 약간씩 달라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여행자'가 과거의 시간에 개입을 해서 생긴 일 때문(이라고 말한다). 반복이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관객을 독자'로 바꿔보자. 시간 여행자가 특정한 장소'를 재방문하는 행위'는 곧 독자가 책을 다시 읽는 행위'와 비슷하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다시 읽기'는 첫 번째 읽기에서 놓친 것들, 달라진 것들을 발견해서 다시 정리를 하는 행위다. 다시 보기/읽기'는 비평의 첫 번째 과정이다. 프랑스와 트뤼포는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봤던 영화를 " 다시" 보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말했고, 소설가 신경숙도 자신의 습작 시절'을 회고하면서 가장 큰 문학 공부 방식은 필사'라고 말했다. 이 필사의 방식은 비단 작가지망생의 절차탁마'는 아니다. 책을 읽는 독자도 밑줄이라는 이름의 필사'를 한다. 밑줄을 긋는다는 행위는 일직선으로 글씨는 쓰는 일이다.
사랑의 블랙홀 : 2월 1일 다음은 2월 2일이다. 2월 2일 다음은 2월 2일이다 ?! 2월 2일 다음도 2월 2일이다. 그리고 2월 2일 다음의, 다음의, 다음날도 2월2일이다. 영화 < 사랑의 블랙홀 > 의 주인공은 그라운드호그데이인 2월 2일'이 날마다 반복되는 나날을 경험한다. 알람시계를 부수고 잠을 자도 다음날 아침 6시면 시계는 다시 멀쩡한 상태가 되어서 8월의 매미처럼 열심히 운다. 눈이 오면 내 집 앞만 쓸 것 같은, 평소 차갑고 냉정하던, 남자는 마술에 걸린 2월 2일이 계속 되자 어느새 다정하고 속 깊은 남자로 변해있다.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을 알고 있는 그는 그 능력으로 이웃 사람들을 돕는다. 2월 2일은 날마다 반복되지만 상황은 조금씩 차이가 난다. 이 반복 서사'는 비평적 책 읽기'와 겹친다. 주인공은 평면적인 종이 텍스트 대신 3D 가상 텍스트'를 경험한다. 그가 다시 2월 2일을 경험한다는 것은 책을 2번 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2월2일의 반복에서 그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된다. 반복은 차이를 만들고, 차이는 결국 비평/ 깨달음'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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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세상의 모든 창작자'는 필경사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 다시 보기/읽기/쓰기/일하기" 는 쓸모없는, 소모적인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생산적 행위'다. 첫 번째 읽기가 독서라면, 두 번째 읽기 이후'부터는 비평의 영역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카뮈의 < 시지프 신화 > 는 새롭게 읽힌다. 그동안 우리는 시지프'를 지나치게 실존적 허무와 부조리적 인간'에 방점을 찍어 그를 맬랑꼴리한 인간형'으로 만들었지만, 곰곰 생각하면 시지프는 필경사요, 저자이며, 비평가의 운명을 가진 자이다. 그는 다시 산을 오르는 행위를 통해서 첫 번째 노동과 두 번째 노동 사이에서의 차이'를 읽는다. 그리고 두 번째 노동과 세 번째 노동 사이에서 다시 차이'를 발견한다.
" 필경사 " 라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필경사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단연 허먼 멜빌의 단편 < 필경사 바틀비 > 다. 바틀비'는 어느 순간부터 일을 거부한다. 그는 오로지 일 하기 싫다는 소리만 한다. " 그렇게 안 하겠습니다. " 결국 직장에서 쫒겨난 바틀비'는 모든 것을 거부한 채 구치소에서 굶어죽는다. 아, 불쌍한 바틀비 ! < 필경사 바틀비 > 라는 제목을 처음 접한 곳은 들뢰즈의 < 비평과 진단 > 에서 였다. 필경사라는 말도, 바틀비라는 말도 무척 생경스러워서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보르헤스 또한 이 단편의 서문을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거물이 모두 이 짧은 단편에 대한 글을 쓴 것이다. 아이구야, 이 무시무시한 걸작을 안 읽어볼 수 없는 노릇 ! 필경사 바틀비'의 직업은 다시 쓰기와 다시 읽기다. 그는 두 사본을 꼼꼼히 대조하고, 다시 검토하고, 소리내어 읽는다. 그는 이 과정에서 그만 머리가 핑 돌아버린다. 그 후 계속 안 하겠다는 소리만 한다. 그의 불복종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소설 속 1인칭 화자도, 독자도 그게 왜 그런 태도를 보이는지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바틀비는 변했다는 점이다.
보르헤스는 이 바틀비 캐릭터를 눈여겨보았던 듯싶다. 그는 바틀비를 녹여서 피에르 메나르'를 창조한다. 삐에르 메나르'는 보르헤스 단편에 나오는 인물로 세르반테스의 < 돈키호테 >의 몇몇 장을 마침표 하나, 쉼표 하나까지 그대로 다시 쓴다. 결국 피에르 메나르는 세르반테스의 < 돈키호테 >를 능가하는 작품을 선보인다. 우리가 보기엔 명백한 표절이지만 보르헤스'는 다시 쓰기'를 창조적 행위'로 보았다. 사실 바틀비의 다시 읽기/쓰기'는 실패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단편을 위대하게 만든 이유는 바틀비의 중단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시 읽기에 성공한 자다. 삐에르 메나르도 다르지 않다. 이처럼 보르헤스의 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 필경의 풍경 " 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옛날에는 도서관 사서가 필경사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보르헤스야말로 가장 위대한 필경사'였다는 점이다. 보르헤스'는 서른 중반이 넘어서 도서관 사서가 되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보르헤스는 캄캄하며 축축한 지하 서고'에서 冊만 읽었다고 한다. 보르헤스가 보기에는 캄캄하고 축축한 지하 서고는 여성의 검고 촉촉한 동굴의 비유였다. 보르헤스에게는 이곳이 쾌락의 원천이었다. 사람들은 엘리트 집안 출신의 보르헤스'가 그깟 도서관 사서'에 만족하고 있다면서 조롱했지만 그는 그저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그는 시력을 점점 상실하고 있었기에 필사적으로 책을 읽었다. 사실 가장 위대한 작가는 섹스피어가 아니라 보르헤스, 세르반테스, 허먼 멜빌'이다. 섹스피어가 그냥 신라면이라면 그들은 신라면 블랙'이요, 섹스피어가 스필버그라면 그들은 오손웰즈'였다. 전자가 < 딴따라 > 라면 후자는 < 난 달라 ! > 였다.
필경사 피에르 메나르는 돈키호테를 다시 썼지만, 필경사 보르헤스는 20세기 문학의 역사를 다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