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노에서.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가 상징성'에 기반을 둔다면, 벨라 타르는 현시성'에 방점을 찍는다. 그것은 즉물성이다. 벨라 타르는 그 어떠한 첨삭 없이 날것을 현시함으로써 진실을 보게 만든다. 그의 영화는 온갖 상징으로 압도되는 알레고리화'라기 보다는 쿠르베나 일리야 레핀의 소박한 그림에 가깝다. 그는 < 과정을 과장 > 없이 보여준다. 양말을 신고, 바지를 입고, 셔츠를 입고, 그 위에 스웨트를 걸치고, 마지막에 외투를 입는다. 그리고 옷을 벗을 때는 그 역순을 편집 과정 없이 집요하게 보여준다. 말의 장신구를 입히는 과정과 벗기는 장면도 지루하도록 반복된다. 결국 과장 없는 과정의 목격을 통해서 관객이 깨닫는 것은 우리가 깨닫지 못했던 일상의 반복'이다. 인간은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감독은 생의 의지를 죽음의 묵시록과 연관시켜서 인간은 시지푸스처럼 부조리한 존재라는 사실을 각인시킨다. 벨라 타르는 生은 환희가 아니라 형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생의 의지'에 대한 경멸을 의미할까 ?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늙은 남자가 얼어버린 감자'를 씹을 때, 우리는 어떤 숭고함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이 숭고함은 생의 찬양이 아니다. < 겨우 > 살아야 하는 인간'에 대한 감독의 연민이다. 영화 < 토리노의 말 > 에서는 니체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니체가 늙고 병든 말의 목덜미'를 잡고 울다가 미쳐버린 곳이 바로 토리노'다. 이 일화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은 롤랑 바르트의 < 카메라 루시다 > 이다. 그는 " 1889년 1월 3일, 학대받아 숨진 말의 목덜미에 울며 매달리던, 연민'때문에 미쳐버린 니체 " 라고 적는다. 나는 이 하나의 문장 때문에 이 책을 사랑했다. 그것은 박완서의 < 그 남자네 집 > 에서 한때의 찬란을 " 내 생애 구슬 같은 겨울 " 이라고 말해서 내 심장을 뛰게 했던 것과 같은 울림이다.

옛 고전 그림'은 대부분 알레고리畵였다.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징'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화가 얀 반 에이크의 걸작 <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 / 1434年 > 그림은 배경 속 사물의 속뜻'을 이해하면 보다 선명하게 보인다. 미술학자 파노프스키는 이 작품을 결혼(을 증명하기 위한) 그림이라고 해석했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촛대 위에 켜진 단 하나의 초는 신의 통찰력과 지혜 혹은 결혼에의 맹세를, 오렌지는 아담의 사과를 의미하는 과일을, 강아지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충성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묵주는 영혼의 걸음이고, 빗자루는 마음을 쓸어담는 도구이고, 벗어놓은 신발은 결혼식을 수행하는 공간이 신성한 곳이라는 것을 상징하기 위한 배치다. 그리고 거울 뒤에 반영되는 세 인물은 화가와 조수 그리고 결혼을 증명하는 증인'이라고 한다. 파노프스키'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실 상징이라는 것은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피어싱이고, 목에 걸면 목걸이다. 엿장수 마음대로'다.
도상학'이 우습다는 것이 아니다. 그림을 마음 속으로 받아들일 때 도상학이 主가 되면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상징 해석은 별책 부록 정도로 다루어야 한다. 냉정하게 이 그림을 보자 ! 이 그림에서 낮인데도 불구하고 불이 켜진 하나의 초는 신의 통찰력에 대한 상징일까 ? 그렇지 않다. 네덜란드의 일조량은 매우 적다. 일년 내내 비가 내리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낮에도 촛불을 켜 두고는 했다. 그리고 오렌지에 대한 해석도 과장된 해석이 많다.
<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 > 에서 왼쪽 창가를 보면 오렌지가 놓여 있다. 도상학자 파노프스키'는 이 과일을 선악과 이전의 순수'를 상징한다고 해석했다. 미술학계의 거목이니 그의 말은 권위'를 얻는다. 그런데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면 오렌지'는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그림 속 모델인 아르놀피니는 부호'였다고 한다. 당시 그림은 부자들의 사치품 중 하나였다. 일반 서민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접어들어서 거상들이 그림 속 모델로 등장한 이유는 부의 탄생과 맥을 같이 한다. 그림은 그 이전에는 주로 성서나 신화 속 주인 혹은 권력자들의 몫이었다. 그러던 것이 상인들이 떼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파워의 중심으로 들어온 것이다. 아르놀피니'가 궁정 화가였던 아이크를 고용해서 그림을 그리게 했다는 것은 아르놀피니가 아이크에게 꽤 비싼 비용을 지불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 고흐가 이웃집 모델을 그리는 따위의 서민적인 풍경을 연상하면 안 된다. 당시에 그림은 사치품이었다. )

홀바인의 < 대사들 > 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그림들은 대부분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한 뽐내기 중 하나였다. 만약에 당신이 아이크에게 그림을 주문했다고 하자. 무엇을 요구하겠는가 ? 나라면 이렇게 요구하겠다. " 제가 책을 좋아하다 보니 거실을 배경으로 그려주십시요. 아, 그리고 이쪽... 이쪽으로 오세요. 요 책장이 콩가에서 직수입한 삼나무인데요. 번개 맞은 나무입니다. 명품이죠. 이곳에 서 있는 것을 그려주세요. 구두는 페리가모'를 신겠습니다. 하하하, 제가 이 수제 구두를 러브합니다. 아, 그리고 바나나 ! 하하하하. 창가에 바나나 하나 놓고 그립시다. 맛 좀 보신 적 있소 ? 이놈의 바나나 하나가 농민들 한 달 품삯이라니, 비싸도 너무 비싼 과일이오. " 대충 이런 식이다.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네덜란드에서 오렌지'는 구경하기 힘든 과일 중 하나였다고 한다. 오렌지를 먹는다는 것은 곧 부를 상징하는 것. 아르놀피니가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서 오렌지'를 선택했다면 ? 오렌지에 대한 해석에서 전자가 도상학적 접근이라면 후자는 사회경제학적 접근'이다. 도상학적 접근이 맞을 수도 있고, 경제학적 접근이 맞을 수도 있다. 경제학적 접근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 책 읽어주는...... > 따위의 미술 소개 책들은 모두 오렌지'를 성악과 이전의 순수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파노프스키의 해석이 맞을 수 있다. 하지만 틀릴 수도 있다.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소리이다. 과일을 종교적 성스러움과 결부시키려면 차라리 사과나 포도'를 그렸어야 하지 않을까 ? 오렌지'는 오히려 파노프스키의 도상학'이 매우 위험한 접근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당시 르네상스 시대는 부와 사치'를 훌륭한 덕목이라고 생각했다. 그림 또한 그러한 사치 품목 중 하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부의 과시는 지금처럼 부도덕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림을 주문한 거상들은 자신이 소유한 부를 과시하기 위해서 그림 속에 명품이 함께 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림 속 오렌지'는 아담의 사과에 대한 은유가 아니라 그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구하기 힘든, 가장 비싼 과일 중 하나였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라는 의견도 설득력을 가진다.
지나치게 과도한 상징과 기호'는 부르주아적 시선이다. 그것은 일종의 살롱 문화'가 선호하는 취향이다. 많이 배운 놈이 그림의 이해력도 좋다. 결국 도상학이란 많이 배운 놈들이 가지고 놀기 좋은 재료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번역하자면 < 갑 > 의 놀이터이다. 여기에 반기를 든 사람이 있다. 바로 귀스타브 쿠르베'다. 그는 체질적으로 상징과 기호'를 경멸했다. 상징을 해석해야지만 그림이 비로소 선명하게 보인다는 것은 민중에 대한 배,배배배배신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천사를 보지 않았기에 천사를 그리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가 그린 그림은 상징에 대한 오브제'를 배제했다. 도상학에 대한 상식이 없이도 그림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가 원한 것은 순수한 리얼리즘'이었다.
< 세상의 근원 > 은 여성의 성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리얼리티란 완벽한 재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것을 재현하려는 욕망임을 분명하게 밝힌다. 일리야 레핀의 <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 도 리얼리즘의 걸작이다. 이 그림 또한 도상학적 오브제'가 사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 어떤 상징 해석'보다 풍부하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아버지의 느닷없는 출현은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기쁨과 놀람이 교차하는 지점을 포착하는 레핀의 눈은 매와 같다. 이 작품이 알레고리화'와 차별점을 두는 것은 날것의 생생함이다. 리얼리즘은 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