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반성

 

 

 

 

 

 

 

 

 

 

 

 

 

 

 

 

세헤라자데, 살기 위해서는 밤마다 이야기'를 속삭여야 하는 박복한 여자. 그녀에게 있어서 침묵은 곧 죽음이 아니었던가. 침묵의 본질이 정지라면 세헤라자데의 수다는 생의 지속'이다. 시지푸스가 구르는 돌을 계속 정상에 올려놓는 형벌이라면, 세헤라자데'는 계속 이야기 / 소설'을 말해야 하는 형벌을 가진 여자다. 천일야화( 1001日 야화 ) 는 1000일 동안의 이야기'가 아니라 1001일 동안의 이야기'다. 엄밀히 말하자면 천일(일)야화'인 셈이다. 여기서 0'이라는 아라비아의 숫자가 완성을 의미한다면, 1'은 시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깐 < 1001'= 1000 + 1' > 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 1000 and 1 > 이다. 1000'으로 완성되었다고 여기는 순간 다시 1부터 시작해야 한다. 겹치는 데자뷰, 그렇다 ! 시지푸스'가 연상된다. 바위를 산 정상'에 올려놓으면 다시 바닥으로 구르는 돌'을 다시 정상으로 올려야 하는, 반복이라는 형벌'을 간직한 시지푸스' 말이다.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반복을 동일증식'이라고 말하고, 들뢰즈'는 반복에 따른 미세한 차이'를 발견한다. 복제는 원본과 동일하면서 동시에 동일하지 않다. 누군가는 이것을 변주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원본 없는 복제'라고 지시하며, 또 누군가는 실존적 균열'이라고 말한다.

 

 

 


 

 

 

 

 

북촌방향

 

영화는 시작부터 관객에게 저예산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라고 알려준다. 빨간 바탕에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타이틀'은 70년대에나 쓰던 타이포그라피'다. 하지만 관객들은 실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객들은 홍상수가 지금까지 저예산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앞으로도 게릴라 방식'으로 영화를 찍을 것이란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흑백 화면과 펜/pan 그리고 성급한 줌인 효과'는 복고'라기보다는 오히려 초창기 무성영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만약 홍상수의 이 영화를 복고적 취향'으로 이해했다면 잘못 판단한 것이다. 홍상수는 공지영 식 후일담'을 이야기하는 작가가 아니다. 이 영화'는 영화와 감독의 관계, 창작자와 창착품의 관계, 나아가 영화 서사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다. 북촌방향'을 보면서 내내 내 머리속'에서 맴돈 것'은 천일야화' 와 시지푸스 신화'였다.북촌방향'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반복'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재생은 원본과는 조금씩 다르다. 관객은 어느 순간 < 틀린 그림 찾기 > 의 재미에 푹 빠진다. 홍상수는 지금 영화적 서사1의 변주'를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 < 북촌방향 > 은 세헤라자데'처럼 이야기'를 끊임없이 생산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감독 자신의 시지푸스적 운명'에 대한 고백이다. 단언하건대, 섣부른 감'이 있지만2, 북촌방향'은 지금까지 만들어진 홍상수 영화 중에서 최고 걸작'으로 남을 것이다. 그가 에릭 로메르'를 벗어나 우디알렌 쪽'을 선택한 것은, 결과적으로 탁월하다. 그는 이 영화에서 자신의 초기작'들을 영화 속으로 끌어들인다. 데뷔작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 과 < 강원도의 힘 > 에서 주연을 맡은 배우'를 호명하고,

 

 

< 오, 수정 > 에서의 인사동 고갈비집'를 배경으로 찍은 만취' 장면은 일종의 초기작에 대한 자기반성과 화해3'처럼 보인다. ( 실제로 홍상수의 분신인 영화 속 성준'과 김의성이 분한 중원'은 이 영화를 통해 화해한다. 성준'이 중원을 이야기하면서 < 착한 사람 > 이라고 말할 때, 이 울림은 홍상수가 김의성'에게 하는 고백으로 중첩된다. 홍상수는 영화를 빌려서 고백을 한 셈이다. ) 그리고는 그의 영화를 거론할 때마다 따라붙는 일상성'과의 이별을 준비한다, 혹은 준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긋지긋해진 것일까 ?

 

 

다시 세헤라자데'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세헤라자데가 임금에게 들려주는, 280편의 이야기'는 정말 각기 다른 이야기일까 ? 다작의 작가로 알려진 조르주 심농'이 300여편의 소설'을 쓴 것을 보면 인간의 한계'는 여기까지인 것 같다. 하지만 사실 심농은 300편의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 1편의 소설'을 약간 다른 방식으로 쓴 것'에 불과하다. 탐정이 범인을 찾아내는 이야기'가 전부이니깐 말이다. 그러니깐 이야기의 원형' 은 하나인데 각기 다른 살인과 죽음이 300' 개인 것이다.

 

 

세헤라자데' 또한 한 가지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말한다는 측면에서 <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는 > 고주망태'에 가깝다. 하지만 ( 이 부분이 중요하다 ! ) 임금은 이 여자의 주사'를 알아채지 못한다. 그에게는 어제의 이야기와 오늘의 이야기'가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들린다. 왜 알아채지 못했을까 ? 그것은 바로 < 반복과 변주' > 에 답이 있다. 어제의 악당은 칼잡이'이지만 오늘의 악당은 소매치기'다. 그리고 내일의 악당은 사기꾼'이 될 것이다. 세헤라자데'는 이런 식'으로 살짝 레퍼토리'를 바꾼다. ( http://myperu.blog.me/20115635317 )

 

영화 북촌방향'에서 홍상수는 영화감독'을 세헤라자데와 시지푸스 같은 운명을 동시에 가진 자'라고 말한다. 창작'이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원형의 반복과 변주'를 통해서 이야기를 재배치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그는 몇 가지 팩트, 그러니까 몇 가지 논픽션을 가지고 수많은 픽션'을 만들어낸다. 영화 북촌방향'에서의 이야기 뼈대'는 몇 개 없다. 고척동과 만취 만담 그리고 거리에서의 우연한 만남'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독은 이 허술한 몇 개의 아이디어'만 가지고, 반복과 변주를 통해서 든든한 동앗줄'을 만든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서 하나의 원형이 어떻게 반복되고 변형되어서 재생되는가를 지켜보게 된다. 관객은 똑같은 레퍼토리'를 보며 낄낄거린다. 그리고 동시에 불안'을 감지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웃음기'가 사라진 유준상의 불안한 얼굴'이다.

 

 

이것은 일종의 희비쌍곡선'이다. 그는 시지푸스를 통해서 창작의 고통을, 그리고 세헤라자데를 통해서 창작의 무한한 변주의 방식'을 본다. 영화 만들기'란 고통 속의 희열'이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그 사실'을 깨달은 것 같다. 그는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강박관념을 버리고 느긋하게 낡은 이야기'를 꺼낸다. 그런데 이 여유만만'한 자포자기'는 그 어느 영화보다도 새롭고 경이롭게 다가온다. 이 영화는 확실히 홍상수의 새로운 출발점이다.이 영화가 놀라운 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여기에는 낡은 자' 의 삶에 대한 아름다운 성찰이 엿보인다. 그래서 그랬을까 ? 우디알렌이 뉴욕의 밤 풍경을 잡아내고, 히치콕이 샌프란시스코의 거리'를 아름답게 창조했듯이, 홍상수는 서울의 눈 내리는 풍경을 포착한다. 흑백으로 처리된, 느릿느릿 내리는 눈은 묘하게 슬프다. 어느 시인은 말했다. 빠른 것'은 슬프다고,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느린 것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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