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여, 울어도 좋아요!
나에게, 풍경은 상처를 경유해서만 해석되고 인지된다. 내 초로의 가을에, 상처라는 말은 남세스럽다. 그것을 모르지 않거니와, 내 영세한 필경은 그 남세스러움을 무릅쓰고 있다. 풍경은 밖에 있고, 상처는 내 속에서 살아간다. 상처를 통해서 풍경으로 건너갈 때, 이 세계는 내 상처 속에서 재편성되면서 새롭게 태어나는데, 그때 새로워진 풍경은 상처의 현존을 가열하게 확인시킨다. 그러므로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다.
–김훈, 풍경과상처
김훈의 정의에 의하면 <풍경> 은모두 <상처>다. 그러므로 그의 풍경은 생채기다, 고름이다, 전치 5주, 상해, 골절, 타박, 손상’이며, “아파, 죽겠어 !”다. 그는 풍경에서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픔-다운 것을 본다. 김훈의 즉물적 사고는 냉정하지만 동시에 뜨거운 감성을 갖는, 위악의 냄새가 난다. 나는 설악산 아래 모텔에서 일 년’을 살았다. 봄에는 상춘객들로 모텔 객실이 만원이었고, 여름에는 해수욕장을 찾아온 피서객으로 붐볐으며, 가을에는 단풍과 겨울에는 설경을 보기 위한 관광객들로 붐볐다. 하지만 나의 객실’을 노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바닷물에 발을 담근 적이 없고, 단풍 구경을 한 적도 없으며 산정상에 오른 적도 없다. 산중턱 양지 바른 곳에 앉아서 한 여자를 기다렸으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도록 여자는 오지 않았다. 그해 이른 봄에 폭설이 내렸다.
누군가 나에게 <풍경> 에 대한 정의를 내려달라고 하면 이렇게 대답하겠다. 풍경이란 느리게 볼 때 비로소 보이는 투명한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굴참나무 아래에서 오랫동안 한 여자’를 기다리다가, 어느 날 그 나무를 유심히 바라보게 됐다. 대한민국 야산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였다. 하지만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나무이기도 했다. 나무를 만졌다, 스무 살 여자의 젖가슴처럼 포근했다. 나무가 살아온 날들은 나무의 키보다 더 오래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영화 <길>은 바로 그 나무’에 대한 이야기다.
여자의 이름은 <젤소미나> 다. 그녀는 바보다. 사탕과 금화 중 어떤 것을 가지겠니, 라고 물으면 냅다 둘 다 가져서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는 하지만, 젤소미나’는 바보가 맞다. 왜냐하면 서커스 유랑 극단의 으라차차 차력꾼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는 착하지도 않고, 친절하지도 않으며, 무뚝뚝하며 거칠다. 안소니 퀸이 연기한 차력꾼’는 한 마디로 나쁜 남자다. 젤소미나는 그런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바보처럼! 영화 줄거리는 다들 아시리라. 차력꾼은 바보를 몰래 버리고 떠난다. 그가 보기엔 이 여자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쓸모없는 잡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훗날, 이곳 저곳을 떠돌던 차력꾼은 어느 마을에서 낯익은 노랫소리’를 듣는다. 젤소미나가 늘 부르던 그 노래다. 사이렌의 노래에 홀린 어부처럼, 그 소리를 찾아간 차력꾼’은 낯선 아낙네’가 그 노래를 부르고 있음을 목격한다. 젤소미나 ?! 아, 그래요. 그 여자 이름이 젤소미나’였던 것 같네요. 단발머리에 눈이 동전처럼 동그란 처녀였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린다고 했어요. 그러다 병이 나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어요. 하여튼 그 여자는 늘 이곳에 앉아서 이 노래를 부르고는 했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자는 후회가 밀려오면 술을 마신다. 그리고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시비를 건다. 사람들이 이 사내의 멱살을 잡고 거칠게 바닥에 내팽개친다. 풀썩! 아지랑이처럼 모락모락 먼지가 날린다. 이 클리쉐’는 만국공통어’인 모양이다. 남자는 초라한 여자를 생각하며 운다. 파도 소리’는 더욱 쓸쓸하다. 위로란 행복한 자의 기만이 아니던가? 우리는 그저 한 남자의 통곡에 통감할 뿐이다. 어깨에 손을 얹으며 그를 위로하지 마라.
나이가 들면 나무가 좋아진다. 꽃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예쁜 꽃술로 유혹하지 않아도, 나무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우리가 나무의 풍경을 알지 못하는 까닭은, 느리게 오랫동안,나무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 속 남자’가 통곡하는 까닭은 꽃을 보느라, 단풍을 보느라, 숲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서 한 그루 나무의 소박한 풍경을 놓쳤기 때문이다. 남자는 깨닫는다. 여름에는 그늘이 되어 주고, 겨울에는 장작이 되어 주며, 마지막은 그루터기’가 되어 준다는 사실. 그는 나무를 잃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