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추억
내가 하루키'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의 부르주아적 근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만 골라서 좋아한다는 점도 큰 몫을 차지했다. 그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문학적 취향을 자랑하고는 했다. < 해변의 카프카 > 에서 카프카가 그렇고, < 1Q84 > 에서의 조지 오웰'이 그렇다. < 1Q84 > 에서 Q'는 일본어로 큐( 9 )'로 발음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작품을 조지 오웰에게 헌사한 것이다. 주접이다. 솔직히 말해서 부르주아적인 하루키가 프롤레타리아적인 조지 오웰'을 동경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한번 미운 놈은 뭘 해도 밉다. 르포 문학의 최고 걸작 중 하나인 < 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은 영국 광부들을 밀착 취재한 기록'이다. 이 작품은 르포이면서 동시에 부르주아였던 자신에 대한 참회록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부르주아'였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한 지식인이었다. 이러한 그의 신념은 < 카탈로니아 찬가 > 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 1984 > 를 통해 공산주의자'를 혐오하는 반공주의자처럼 보였지만 사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식민주의자'에 대한 혐오였다. 그 스스로가 인도 식민지의 경찰 간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증오는 뼈저린 자기 반성인 것이다. 그는 전형적인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한국의 김수영 시인처럼 말이다. 이 자리에서 고백하자면, 조지오웰은 셰익스피어'보다 위대하다. 내가 운명의 주사위'를 던지는 신이라면 1초의 주저함도 없이 조지 오웰을 선택할 것이 분명하다. 그가 바라본 거대 악'은 식민주의'였다. 내가 봉준호 감독의 < 살인의 추억 > 을 보면서 제일 먼저 생각난 사람은 조지 오웰이었다.
미국 백작’으로부터 온 편지 !
1. 향숙이는 정말 예뻤을까?
향숙이는 예뻤다. 소소리바람에 볼이 발그댕댕해지면 물오른 복숭아처럼 보기 좋았다. 가슴도 제법 커서 아이 넷은 어미의 젖만으로도 무럭무럭 키울 수 있을 만큼 풍만했고젖꼭지도 지우개 연필 끝에 달린 지우개처럼 크고 곧고 말캉해서 보기에 좋았다. 백광호는 향숙이 생각을 할 때마다 어릴 때 놀이동산에서 먹던 솜사탕을 떠올리고는 했다. 아, 저 아름다운 젖가슴 ! 만지면 터질 것 같은 저 작약. 백광호는 향숙이 생각을 하면 자주 아랫도리가 근질거리면서 오줌이 마려웠다. 그런 향숙이’가 죽었다. 그래도...... 이 동네에서 향숙이가 제일 예쁘다- (고 백광호는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관객은 향숙이’를 본 기억이 없다. 향숙이가 영화 속에 등장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백광호가 취조실에서 과거를 회상할 때에도 나는 향숙이의 얼굴을 본 기억이 없다. 내가 기억하는 향숙이’는 논 수로 안에 손과 발이 묶인 채로 죽은 모습이 전부였다. 그래도 모든 사람들이 향숙이는 예뻤다고 하니 예쁜 것만은 분명한 모양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토록 마음 착하고 예쁜 향숙이를 잔인하게 죽였을까, 누가?
2. 식스팩 없는, 80년대 남자 이야기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은 “수컷의 무능”에 대한 이야기’다. 울타리 속의 양들은 울타리 밖의 들짐승’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국가에서 파견된 양치기 개’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농장을 감시하지만 아무 소용 없다. 괴물’은 수컷들의 무능을 조롱하듯 좀더 잔인한 방식으로 힘 없는 양들을 할퀸다. 5년 동안 9명이 잔인하게 죽었고, 2건의 모방 범죄’가 발생했다. 손과 발은 희생자의 스타킹이나 브래지어’로 포박당했고, 입에는 돌멩이를 넣은 스타킹에 재갈이 물렸으며, 눈은 팬티’로 가려졌다. 그리고 희생자의 질 속엔 온갖 것들이 삽입되어 있었다. 복숭아 9조각, 포크, 숟가락, 연필, 칼, 우산......
감독은 시골 형사 박두만과 서울 형사 서태윤’의 얼굴을 빌려 무능과 속죄’에 대한 고해성사’를 한다. 특히 박두만으로 분한 송강호의 얼굴은 백 마디 대사보다 물오른 표정 하나’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봉준호의 인물 클로우즈업’은 달리와트랙킹을 이용한 히치콕의 그것보다 우아하지는 않지만 종종 그것보다 강렬할 때가 있다. 화면을 가득 채운 배우의 얼굴은 희생자에 대한 죄의식’으로 가득하다. 진심을 담은 얼굴은 일종의 프레스코 벽화와 같다. 수컷의 무능은 곧 울타리 속 자기 새끼를 지키지 못한 초라한 아버지의 무능으로 전이되고, 영화가 절정으로 치닫는 부분에서는 대한민국 자체의 무능으로 확대된다. 우리는 범인을 잡아놓고도 범인을 증명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과학적) 장치’가 없음을 목격한다. 희생자의 옷에 묻은 괴물’의 정액 유전자 감식을 위해서는 미국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미국에서 우편이 발송되기만을 기다리는 무능한 경찰서 내부의 풍경을 본다. 사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유전자 감식 결과가 용의자인 박해일의 유전자와 동일한가, 가 아니다. 그것은 부차적인 조건이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죄수를 처형하기 위한 미국의 승낙’이다. 그 사이 꽃다운 여중생’이 마지막 희생자가 된다. 희생자의 질 속에는소녀의 가방 속 필통에 있던 필기구들이 꽂혀 있다. 그러니깐 이 영화에서의 마지막 희생자’는국가의 무능이 죽인 참사’다. 더군다나 사건이 발생한 11월 15일은 공교롭게도 민방위 훈련 등화관제의 날이었다. 국가의 강압적 지시에 의해 각 관공서와 상점 그리고 가정집에서 불을 끄고 상가의 셔터’를 닫을 때 죄 없는 여중생’은 무참히 죽는다. 소녀는 한 줄기 빛도 보지 못한 채, 춥고, 어둡고, 서러운, 동정 없는 세상’에서 천천히 죽어 간다. 어떤 면에서 보면 국가는 이 소녀의 죽음에 대해명백하게 유죄’다. 어둠 속 괴물’은 국가가 친절하게 마련한 어둠/등화관제’ 속에서 한 소녀를 농락한 것이다. ( 실제로 여중생’은 등화관제가 있던 11월 15일에 희생당한다. )
3. 미국으로부터 온 편지
도대체 그토록 기다렸던 < 미국으로부터 온 편지 > 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일까 ? 왜 우리는 손 놓고 미국의 메시지’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기차 터널 앞 격투 장면’에서, 우리는 분노에 찬 김상경’이제우스의 판결 없이 살인자의 머리에 총을 겨루며 처형’을 거행하려는 순간을 지켜본다. 이때 그토록 기다리던 편지’가 마침내도착한다. 처형은 잠시 미루어진다. 물론 다들 아시다시피, 미국의 메시지’는 <혐의 없음, 사건 종결> 이다. 아버지의 말은 곧 법이다. 미국의 메시지는 곧 법이다. 하지만 아무도 이 충격적 결과를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누군들 믿으랴.제우스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선고 앞에서 당황한다. 거역할 것이냐, 순종할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
이때 갑자기 어두운 터널에서 기차가 튀어나오면서 무능한 두 남자와 한 명의 용의자’를 양쪽으로 가른다. 기차는 아버지의 두 번째 메시지’다. ( 기차가 남근에 대한 은유라는 사실은 개나 소나 다 안다! 많은 영화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상징으로 기차’가 등장한다. ) 제우스는 기차의 형상’으로 변하여 지상에 내려온 것이다. 첫 번째 메시지가 사건 기각’이라면, 두 번째 메시지는 첫 번째 메시지’를 어길 경우에 따른 무시무시한 응징’이 있을 것이라는 아버지의 경고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은 바로 어둠 속 터널 안’으로 도망가는 용의자’를 향해 형식적으로 터널 속 허공을 향해 쏘는 세 방의 총 소리’다. 그렇게 함으로써 형사는 상징적 처형’을 감행한다. 아버지의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 억울하고, 더럽고,치사하고, 분통이 터지고, 미치겠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죽은 희생자’에 대한 미안함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이 허공을 향한 총 소리’가 죽은 자의 넋을 달래기 위한 조총 소리’처럼 들린다.그것은 김상경이 죽은 자에 위해 마련한 위령제’다.
4. 그래도 향숙이는 예쁘다.
향숙이는 예뻤다. 상고 졸업해서 읍내 은행 직원이 되었다. 돈을 꼬박꼬박 모아서 아버지 백내장 수술비를 마련했으며, 어머니에게는 대용량 냉장고도 사 드렸다. 향숙이는 얼굴이 예쁘고, 심성이 고왔으며, 더군다나 가슴도 예뻐서 많은 남자들의 청혼 대상이었다. 향숙이가 결혼하는 날 백광호’는 울었다. 결혼한 그녀는 잘생긴 아들과 어릴 때부터 남다른 가슴 발육을 보인 딸’을 두었다. 나이 마흔 하나’에 아파트 한 채를 샀고, 그날 그 동안 고생한 것들을 생각하며 가족과 함께 울었다. 그 밤엔 남편과 달콤한 섹스’를 했고, 그 후’에도 행복하게 살았다. 그녀가 그날 괴물에게 희생당하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그렇게 살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향숙이의 죽음과 백광호의 자살이다. 어쩌면 우리는 향숙이의 불행과 백광호의 자살에 대해 모두 공범자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를 단 한번도 본 적 없지만 늘 미안한 마음이 든다. 향숙이는 참, 예쁘다. 안 봐도 다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