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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자 이치도 (순정)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3월
평점 :
순정 : 술도가에서 엿도가까지, 모두 나와라 !
" 아아아, 지미랄 것, 너희 똥도 못 처먹는 개새끼들, 다 나와. 너 술도가 나와. 너 농약가게 하는 놈 나와. 너 고무신 장수 나와. 너 기름 팔아처먹는 놈 나오고 떡쳐서 파는 놈, 말고기를 소고리라고 속여 파는 놈 나와. 쌀 배달 하는 놈, 소리사 하는 놈 다 나와. 철공소, 목공소, 철물점, 대장간, 도장집, 문방구, 성냥공장, 엿도가, 고물상 나와라. 우체국, 경찰서, 읍사무소,세무서, 소방서 다 나오란 말이다. 개새끼들아, 나왔으면 일렬로 서. 이놈의 새끼들, 내 마누라하고 재미본 그 대가리들, 잘 놀게 내가 그냥 놔둘 줄 알았냐. 야, 너 흔들거리는 놈, 똑바로 서 ! 내가 땜장이라고 우습게 봤어. 사나이 봉달이를 우습게 봤다 이 말이야. 내가 오늘부터 너희 대가리에 헛구멍난 걸 몽땅 때우겠다 이 말씀이야. 너희 마누라들, 그 구멍도 다 때워버리겠어. 이눔의 새끼들, 똑바로 안 서 ! 차렷, 열중 쉬어, 차렷, 경례 ! "
걸죽한 입말의 향연'이 압권이다. 욕을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소설 속 봉달이'는 좀 띨띨한 물자지'다. 사내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오죽했으면 봉달이 마누라의 욕정'을 온 동네 남정네들이 채워줬겠는가. 봉달이 마누라는 방석집 작부였다. 내가 < 순정 > 에 나오는 욕 배틀을 보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직업의 다양성'이다. 아, 그 옛날의 사라진 가게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물자지 봉달이 아저씨는 저잣거리에 서서 일렬로 늘어선 상점'을 일일이 호명하는 것 : ① 술도가 ② 농약가게 ③ 고무신 장수 ④ 기름 파는 장수 ⑤ 떡 쪄서 파는 장수 ⑥ 말고기 장수 ⑦ 쌀 가게 ⑧ 소리사 가게 ⑨ 철공소 ⑩ 목공소 ⑪ 철물점 ⑫ 대장간 ⑬ 도장집 ⑭ 엿도가 ⑮ 고물상'이 달동네 저잣거리'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처음 듣는 낱말도 많을 것이다. 술도가는 술을 만들어 도매하는 집을 말하고, 소리사'는 얼마 전에 종적을 감춘 레코드 가게'를 말하며 엿도가는 엿 만들어 파는 가게를 말한다. 킁킁, 한 마디로 엿 먹으라는 거지. 그리고 철공소, 철물점, 대장간'은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 다르다. 아마 요즘 어린이들은 쌀 가게'가 독립적 형태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잘 모를 것이다. 여기에 두부집, 국수집 등등의 집집집'을 합치면 옛날에는 정말 다양한 가게'들이 골목에 포진했다. 그렇다면 현재는 ? 딱 세 가지 있다. 치킨집, 핸드폰 가게, 커피숍. 피씨방, 교회...... 이게 다다.
이처럼 골목 상권'은 세월이 흐를 수록 다양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라져버렸다. 옛날에는 술도가가 고무신 장수에게 고무신을 사면, 고무신 장수는 그날 번 돈으로 옆집에서 기름을 산다. 그리고 기름을 판 기름 장수 만식 씨'는 봉달 씨 마누라가 하는 막걸리집에 가서 막걸리'를 마신다. 말귀'가 빠른 사람들은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의 요점을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돈의 흐름이 골목 상권을 중심으로 해서 주거니 받거니 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깐 그 당시의 상거래는 일종의 품앗이'다. 봉달 씨가 기름 팔아줬으니 만식 씨 또한 막걸리집에 가서 막거리 한 사발 마시는 거다. 돈, 돌고 도는 것 !
그런데 이러한 상권'이 한순간에 무너진다. 거대 공룡 < 이마트 > 의 출현이다. 이마트가 입점하는 순간 술도가에서 시작해서 엿도가까지 모두 엎드려야 한다. 납작, 엎드려야 한다. 술도가'는 엿도가'가 파는 가격의 절반으로 판매하는 이마트 엿을 먹기 위해 그곳에서 엿 먹어 ! 도장 가게, 쌀 가게 주인도 모두 이마트 엿 먹어 ! 그렇게 되면 수입이 줄어든 엿가게 만식 씨'는 허리띠를 졸라매기 위해 한 달에 한 번 가던 이발소를 석 달에 한 번 가게 된다. 그렇다면 이발소는 ? 이런 식으로 나가면 한순간에 이 저잣거리'는 불황이 닥친다. 수입이 시원치 않으니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가장 저렴한 이마트 가서 라면을 사는 것. 저잣거리는 이런 식으로 폐허가 되는 것이다.
이마트가 위험한 이유는 쌍끌이 전략 상술뿐만이 아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옛날에는 돈이 돌고 돌았다. 엿도가가 번 돈은 술도가의 주머니로 들어오고, 술도가는 그 돈으로 엿도가 마누라가 하는 막걸리집에 가서 술을 마신다. 그런데 이마트'가 등장하고부터는 이 거대 기업에서 벌어들인 돈은 서울 본사로 직행한다. 돈은 지역에서 번다. 그리고 이 돈들은 삼성 가문 자제들'이 프랑스 백화점에 가서 루이비통을 사는 데 소비된다. 지역 사회'는 돈이 풀리지 않으니 장기적으로 불황이 닥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마트 구조가 골목 상권을 망하게 만든 주범이다.
우리는 흔히 이마트 같은 거대 할인 마트'를 서민들의 천국이라고 생각한다. " 싸잖아 ! " 내가 이마트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면 하나같이 하는 소리'가 이마트'보다는 백화점'을 공격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 그런데 나는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클린턴은 " 병신아, 문제가 경제야 ! " 라고 말했듯이 나 또한 " 멍충아, 문제는 백화점이 아니라 이마트야 ! " 라고 말하고 싶다. 이마트'는 친서민 기업이 아니다. 이건희'는 1억짜리 옷을 입어야 한다. 이건희에게 우리가 10만 원 양복을 입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폭력이다. 이 사회를 병들게 만드는 것은 백화점 고객들의 사치가 아니라 배가 고파서 자신의 꼬리'를 야금야금 먹고 있는 이마트 이용자들이다.
조금 더 불친절하고, 조금 더 비싸도 골목 상권을 위해서 구멍가게'에서 물건을 사야 한다. 그것이 바로 착한 소비'다. 그래야지 술도가, 도장집, 소리사, 말고기 주인, 엿도가들이 다시 나타나서 왁자지껄 거리를 물들게 할 것이다. 비록 그들이 봉달 씨 마누라'와 그짓을 했어도 용서해야 하지 않을까. 소설 속 의기양양하던 봉달이 아저씨'는 사고'로 죽는다. 불쌍한 봉달이 아저씨,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